조선시대 왕실을 장악한 여성들.. '붉은 단심'에도 있다 [김종성의 사극으로 역사읽기]
[김종성 기자]
▲ KBS 2TV 드라마 <붉은 단심>의 한 장면 |
ⓒ KBS |
KBS 2TV 드라마 <붉은 단심>에서는 왕실 여성들의 정치적 비중이 비교적 잘 나타나고 있다. 반정공신들의 지원을 받아 왕실 일원이 된 유정(강한나 분)과 조연희(최리 분)의 활약상도 나타나고, 조정에 대한 대비 최가연(박지연 분)의 막강한 영향력도 묘사되고 있다.
최가연은 반정공신인 박계원(장혁 분)의 연인이었지만, 후궁이 되어 궁궐에 들어간 뒤 왕후가 되고 대비가 됐다. 그는 임금 이태(이준 분)의 친어머니는 아니다. 하지만 조정 실세 박계원과 제휴하고 있기 때문에 이태가 그를 구박하기는 힘들다. 최가연은 이태를 억누르는 박계원과 손잡고 정치에 깊숙이 개입해왔다.
<붉은 단심>에서처럼 다수의 왕실 여성들이 주목을 받은 대표적 시기로 조선 전기인 성종시대와 조선 후기인 숙종시대를 들 수 있다. 두 시기에는 한두 명이 아닌 다수의 왕실 여성들이 현실 정치에 커다란 영향을 끼치는 양상이 이어졌다.
성종 시대의 3대비 체제
열두 살 된 성종이 임금이 된 1469년은 할머니인 정희왕후 윤씨가 수렴청정을 개시한 해다. 세조(수양대군)의 부인인 정희왕후는 손자를 대신해 국정을 운영했고 이 상황은 1476년까지 계속됐다.
그때 왕실에는 대비가 셋이나 있었다. 정희왕후가 대왕대비였고, 정희왕후의 첫째 며느리이자 성종의 어머니인 소혜왕후 한씨(인수대비)가 왕대비였고, 둘째 며느리이자 예종의 부인인 안순왕후 한씨가 대비였다.
성종의 전임자는 성종의 아버지가 아니라 작은아버지인 예종이었다. 성종의 아버지인 의경세자가 19세에 요절하는 바람에 의경세자의 동생인 예종이 왕이 됐고, 그 예종에 뒤이어 성종이 즉위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예종의 부인이 성종시대에 대비가 됐던 것이다.
그런데 소혜왕후는 왕대비이고 안순왕후는 대비였다. 왕세자와 세자가 동의어인 것처럼, 왕대비와 대비 역시 같은 말이었다. 그런데도 왕대비와 대비를 별도로 둔 것은 동서지간인 소혜왕후와 안순왕후의 위상을 구별하기 위해서였다. 이 경우에는 왕대비가 '왕의 대비'가 아닌 '큰 대비'라는 의미로 쓰였다. 한자 왕(王)에 담긴 '크다'라는 의미가 이렇게 활용됐던 것이다.
대왕대비-왕대비-대비의 3대비 체제 하에서 중심 인물은 정희왕후였다. 하지만 실질적 주도권은 인수대비로 불리는 소혜왕후에게 있었다. 정희왕후는 한문에 약하다는 이유로 한문에 능통한 큰며느리에게 국정을 맡겼다. 그래서 형식상으로는 정희왕후가 7년간 수럼청정을 했지만, 실제로는 성종의 어머니인 인수대비가 실권을 행사했다. 인수대비의 카리스마는 이로 인해 생겨난 것이었다.
▲ KBS 2TV 드라마 <붉은 단심>의 한 장면 |
ⓒ KBS |
성종시대에는 3대비 말고도 주목을 끈 여성들이 더 있었다. 한명회의 딸인 공혜왕후가 세상을 떠난 뒤에 중전 자리에 오른 후궁들이 바로 그들이었다. 연산군의 어머니인 윤씨 후궁이 공혜왕후를 뒤이어 성종의 중전이 됐고(페비 윤씨, 제헌왕후), 윤씨가 질투심에 사로잡혀 성종의 얼굴을 할퀴는 등의 파행을 일으키고 폐위된 뒤에는 또 다른 윤씨 후궁이 대궐 안방을 차지했다(정현왕후 윤씨).
연산군의 어머니인 폐비 윤씨는 함안 윤씨이고, 그 뒤를 이은 정현왕후는 고려시대 동북 9성 축조로 유명한 윤관의 후손이다. 정현왕후는 파평 윤씨로서 윤석열 대통령과 본관이 같다.
성종시대에 왕실 여성들이 보인 활약상은 오늘날의 사극에서 다분히 흥미 위주로 묘사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그들의 활약상은 그 시기에 왕실 여성들의 정치적 비중이 그만큼 높았음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여성들이 왕실 내에서뿐 아니라 조정 차원에서도 주목을 끌었기에 그들의 활약상이 두고두고 회자되고 있는 것이다.
조선 후기 숙종 때도 왕실 여성들이 정치의 중심에 있었다. 숙종의 부인인 인현왕후 및 장희빈(희빈 장씨)과 후궁인 최숙빈(숙빈 최씨)이 보여준 활약상 역시 오늘날 사극의 단골 소재가 되어 있다.
성종시대와 달리 숙종시대에는 왕실 여성들의 권력투쟁이 조정의 당쟁과 직접적으로 연동됐다. 이것이 이 시대 여인천하의 특징이었다.
인현왕후는 보수세력인 서인당의 지원을 받았고, 장희빈은 상대적으로 진보적인 남인당의 지지를 받았다. 두 여성이 중전이 됐다가 폐위되는 과정은 당쟁의 추이와 거의 일치했다.
1689년에 인현왕후가 쫓겨나고 서인정권이 붕괴하면서 장희빈과 남인의 세상이 도래했다. 1694년에 인현왕후와 서인당이 복귀하면서 장희빈과 남인당은 타격을 입었다. 각 당파들이 중전 자리를 놓고 치열한 경쟁을 벌임에 따라 중전 자리와 집권당 자리가 연동됐던 것이다.
시대가 배출한 인물, 문정왕후
<붉은 단심>의 시대적 배경은 1506년 중종반정 이후다. 중종에 이어 인종·명종으로 이어지는 이 시대에도 여성들의 활약상이 대단했다. 중종반정 주역들의 양녀 혹은 친딸인 박경빈(경빈 박씨), 홍희빈(희빈 홍씨), 안창빈(창빈 안씨), 한귀인(귀인 한씨)이 가문의 힘을 배경으로 후궁이 되어 궁에 들어갔다.
중종의 조강지처로 조선 후기에 단경왕후로 추증될 신씨 역시 이 시대 정치에 영향을 끼쳤다. 연산군의 처조카라는 이유로 남편 중종이 왕이 된 직후에 이혼을 당한 신씨는 개혁세력인 사림파(유림파)의 지지를 받으며 정치 이슈를 만들어갔다. 사림파는 신씨와 중종의 재결합을 촉구하면서, 신씨를 몰아낸 보수세력인 훈구파를 비판했다.
중종의 아들인 명종 임금 때 20년간 실권을 행사하면서 불교중흥을 추진한 문정왕후 윤씨 역시 그 시대가 배출한 걸출한 인물이다. 중종이 신씨와 이혼한 뒤 장경왕후 윤씨에 이어 두 번째 왕비가 된 그는 아들 명종을 억누르고 실질적인 군주 역할을 수행했다.
성종과 숙종시대에도 그랬지만 이 시대 역시, 어쩌다 한두 명이 두각을 보이는 정도가 아니라 다수의 왕실 여성들이 집단적으로 부각되는 양상이 나타났다. 이런 양상을 추동한 배경 중 하나로 주목할 만한 것이 있다. 동아시아 국제관계의 안정이라는 정치적 배경이 그것이다.
1592년 임진왜란 이전의 약 200년간은 태평성대로 불릴 정도로 장기간의 평화가 이어졌다. 여진족과 왜구로 인한 소요 사태나 전투는 계속 있었지만, 대규모 전쟁이 발발하지 않아 국제사회가 안정된 시기였다.
유사한 상황은 조선 후기에도 있었다. 병자호란 이후인 1644년에 중국대륙을 차지한 여진족이 안정적인 제국 운영을 위해 조선·일본·유구(오키나와) 등과 평화를 추구함에 따라 조선 후기에도 태평성대에 준하는 시절이 이어졌다.
조선 전기와 후기에 있었던 두 차례의 태평성대는 조선의 왕권을 안정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안보 상의 위험요인 감소가 조선 군주의 리더십 상승으로 이어졌던 것이다. 이로 인한 왕권 안정이 왕실의 위상을 높여주었고, 이것이 왕실 여성들의 영향력 강화로 이어졌다. 안보 갈등을 부추기는 세력이 약해지고 평화를 추구하는 세력의 입지가 강해진 것이 왕실 여성들의 영향력 확대를 도왔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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