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과 소금] 너 나 무시해?

박재찬 2022. 5. 21. 0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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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재찬 종교국 차장


아버지 유산을 당겨 받아 허랑방탕한 외지 생활 끝에 거지 행색으로 집에 돌아온 둘째 아들, 아무런 조건 없이 그를 아들로 인정하면서 맞이해주는 아버지. 성경 속 ‘돌아온 탕자’ 이야기는 둘째 아들과 아버지에 대한 메시지가 중심을 이룬다. 우리가 진심으로 회개하고 돌이킬 때 용서와 사랑으로 품어주시는 하나님을 강조하는 메시지가 익숙하다.

이달 초 출석교회 설교에서는 아버지와 탕자 사이에 있는 첫째 아들의 모습을 유심히 들여다볼 수 있었다. 가출했다가 돌아온 동생을 위한 잔치가 열린다는 소식에 큰아들은 아버지에게 분노한다.

“제가 집에 남아서 한시도 속을 썩이지 않고 아버지를 모신 것이 몇 년째입니까. 그런데도 아버지는 저와 제 친구들을 위해 잔치 한 번 열어 주신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아버지 돈을 창녀들한테 다 날리고 나타난 저 아들에게는 성대한 잔치를 베풀어 주시다니요.”(메시지 성경) 같은 장남으로서 이렇게 울분을 토하는 그의 모습이 이해가 가면서도 안타깝기도 하다.

수년 동안 성실하게 일하면서 아버지 곁을 지킨 장남이었다. 하지만 아버지의 속 깊은 마음을 헤아리지도, 잘못을 뉘우친 동생을 용서하지도 못하는 모습은 큰아들답지 못했다. 성경은 사랑의 관점에서 사람이 율법을 엄격히 지킨다 하더라도 사랑이 없을 수 있다는 메시지를 전해준다. 그래서 집을 나간 적이 없는 큰아들이지만 ‘영혼의 가출자’처럼 그 또한 회개하고 돌아와야 할 대상이라고 말한다.

큰아들을 인정 욕구 관점에서 바라볼 수도 있겠다. 큰아들이 아버지에게 퍼붓는 말속엔 ‘나는 이렇게까지 아버지를 위해 헌신했는데 왜 인정도 안 해주는 겁니까’라는 마음이 전해진다.

부부 싸움을 하면서 결정적인 순간이 있다고 한다. 남편 입에서 “너 나 무시해?”라는 말이 나올 때다. 이 말은 싸움판이 커진다는 신호다. 27년 동안 아버지 살리기 프로그램인 ‘아버지학교’를 이끌어 온 김성묵 전 아버지학교 이사장의 오랜 경험담이다. 얼마 전 만난 그는 ‘건강한 부부관계의 철칙’을 딱 한 가지만 꼽아 달라고 하니 “부부가 서로 인정해주는 것”이라고 했다. 인정해주는 대상은 많다. 상대방의 역할과 가치관, 욕구, 스타일, 취미 등 여러가지다. ‘너 나 무시해?’라는 말은 ‘나는 인정받기를 원한다’는 또 다른 표현이라고 했다.

20년 넘게 인정 욕구를 연구한 오타 하지메 일본 도시샤대 정책학부 교수에 따르면 인간의 인정 욕구는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그는 한 인터뷰에서 인간이 인정 욕구를 벗어날 수 없는 이유에 대해 “공동체의 인정과 평판은 생존과 직결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자신이 속한 공동체로부터 받는 인정을 각별하게 여기는 일본이나 한국 문화에서는 인정 욕구가 더 강하다고 한다. ‘무소유’로 유명했던 법정 스님도 생전에 ‘가장 끝까지 남는 욕심이 무엇이냐’는 질문을 받자 “인정받고 싶어 하는 거지”라고 털어놨다고 하지 않던가.

지난 16일 윤석열 대통령이 국회 시정연설 뒤에 보여준 몇몇 장면도 인정 욕구라는 측면에서 볼 만한 여지가 있다. 그가 여의도 국회 본회의장에서 연설을 마친 뒤 밖으로 나갈 때였다. 통상 통로 쪽 여야 의원들과 인사를 나누고 밖으로 빠져나간다. 그런데 윤 대통령은 본회의장 뒤편을 가로질러 더불어민주당 의석으로 향한 뒤 민주당 의원들과도 골고루 악수를 나눴다. 이어 소수당인 정의당 의석에서도 심상정 장혜영 의원 등과 인사를 나눴다. 이례적인 장면에 장내에선 환호성과 박수가 이어졌다.

소수당 의원들은 그 순간만큼은 ‘대통령이 우리도 인정해주는구나’라고 느꼈을 법하다. 제스처로, 쇼맨십으로 끝나지 않으면 좋을 일이다. 탕자 이야기의 큰아들처럼 영혼의 가출자를 예방하고, 가정의 평화를 위해서라도 ‘너 나 무시해?’란 말은 안 나오게끔 처신해야겠다. 오늘 부부의 날 나의 다짐이다.

박재찬 종교국 차장 jeep@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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