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주류의 신화, 이제는 태극호 선장으로

이준목 2022. 5. 20. 1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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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농구 대표팀 사령탑에 추일승 감독 선임

[이준목 기자]

'코트의 신사' 추일승 감독이 위기의 대한민국 농구대표팀을 구원할 새로운 선장이 됐다. 대한민국농구협회는 지난 19일 남자농구 대표팀 사령탑 공개모집을 통하여 추일승 감독과 이훈재 코치를 선임했다고 밝혔다. 추일승호는 7월 FIBA 2022 남자아시아컵과 2023년으로 연기된 항저우아시안게임에 도전하게 된다.

추일승 감독은 한국농구계에서 대단히 독특한 이력을 지닌 인물이다. 학연과 인맥이 중시되는 보수적인 한국농구계에서 무명에 가까운 현역 시절을 보내고 구단 프런트를 거쳐 지도자로 뒤늦게 성공하기까지 입지전적인 행보를 통하여 '비주류의 신화'를 창조해냈다.

추 감독은 홍대부고 2학년 시절 뒤늦게 농구를 시작했고, 홍익대를 거쳐 1985년 기아 농구단의 창단 멤버로 합류했다. 하지만 한 시즌을 치른 후 곧바로 상무에 입대했고 제대 후 곧바로 은퇴했다. 

은퇴 후에는 평범한 회사원으로 한동안 농구와 관련없는 삶을 이어가다가 1990년 친정팀 기아자동차 농구단 지원 업무로 발령받으며 다시 농구와 인연을 맺게 되었고, 매니저와 경기운영 팀장을 거치며 프런트로 활동했다. 1997년에는 군팀인 상무에서 코치 제의를 받게 되었고 1999년에는 상무 감독으로 선임되며 본격적인 지도자의 길에 뛰어들었다.

상무에서 프로 출신 선수들을 지도하며 능력을 인정받은 추 감독은 2003년 부산 코리아텐더(현 수원 KT)의 감독 제의를 받으며 마침내 프로 지도자로서 첫 기회를 얻게 됐다. 당시 코리아텐더는 모기업의 부도로 구단 운영이 불투명한 상황에서 검증된 거물급 감독을 영입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급하게 대안으로 섭외된 것에 가까웠다. 다행히 코리아텐더가 그해 11월 KTF에 인수되며 오히려 전화위복이 됐고 추 감독은 프로무대에서 자신의 역량을 증명해 보였다.

추 감독은 KT 시절부터 고양 오리온에 이르기까지 무려 16년간 프로무대에서 활약하며 동갑내기 유재학(현대모비스)-전창진(KCC) 감독과 함께 KBL을 대표하는 '63년생 명장 트리오'의 한축으로까지 올라섰다. 그리고 2015-16시즌에는 오리온에서 마침내 프로 첫 정상에 오르며 무관의 한을 풀고 농구인생의 정점에 올랐다.

당시 우승직후 인터뷰에서 추 감독은 "학교를 어디 나왔다는 것은 중요치 않다. 오히려 연세대, 고려대 나오지 않은 사람이 주변에 더 많기에 나도 주류라고 생각한다"며 "'비주류 출신이다' '우승을 못했다'라는 이야기 때문에 그동안 남몰래 스트레스도 받았다. 하지만 내가 인생을 열심히 살았다면 부끄러울 게 없다"라는 답변으로 감동을 주기도 했다. 

추일승 감독은 2019-2020시즌 후반기 오리온의 지휘봉을 내려놓으며 프로농구를 떠난 이후 대한민국 농구협회 경기력향상위원장, 방송 해설위원 등으로 활동했다. 또한 현장을 떠난 시기에도 꾸준히 농구 관련 저술을 집필하거나 유튜브 컨텐츠에도 참여했다. 2021년에는 미국에서 열린 이벤트 대회였던 더 바스켓볼 토너먼트(TBT)에 참여하여 외국인 선수로만 구성된 'Forces of Seoul'이라는 팀의 지휘봉을 잡고 새로운 도전에 나서는 등 뼛속까지 변함없는 농구에 대한 열정을 보여줬다.

국가대표 감독직은 추 감독의 오랜 꿈이기도 했다. 추 감독은 지난 2021년에도 국가대표 감독직 공모에 제자인 김도수 코치와 팀을 이뤄 도전하여 조상현-김동우, 김진-김영만 코칭스태프와 3파전을 펼쳤으나 아쉽게 탈락했다.

하지만 조상현 감독이 선임된지 불과 1년만에 프로농구 창원 LG 감독으로 자리를 옮기면서 대표팀 사령탑이 다시 공석이 됐고, 두 번째 도전에서 추일승 감독은 이상윤 감독-김희선 코치팀과 경쟁한 끝에 경기력향상위원회의 면접과 평가 점수에 앞서 마침내 태극호의 선장이 됐다. 

이로써 추 감독은 오리온에서 지휘봉을 놓은 지 2년 만에 사령탑으로 복귀했다. 또한 대표팀 전임감독제가 도입된 이래 사상 최초로 무명선수 출신이자 국가대표 경험이 전무한 인물로 사령탑에 오르는 또다른 기록을 세웠다.

농구팬들의 반응은 대체로 긍정적이다. 농구팬들 사이에서는 이미 오래전부터 프로보다 차라리 대표팀 감독에 더 잘 어울릴 만한 인물로 추일승 감독이 자주 거론되어왔다. 그동안 농구계에서 추 감독이 오랫동안 축적한 실적들과 진정성, 농구에 대한 깊이있는 식견이 주는 신뢰 때문이다.

추 감독은 농구계에서 '공부하는 지도자'로 널리 알려져 있다. 환갑을 바라보는 나이에도 현대농구의 흐름을 이해하기 위하여 NBA 등 해외농구까지 꾸준히 섭렵하며 농구이론과 전술을 연구하는 학구열은 농구팬들 사이에서 이미 유명하다.

흔히 '한국식 농구'를 강조하는 보수적인 농구인들에 비하여 추 감독은 일찍부터 지도자의 전문성과 시스템, 현대농구의 트렌드에 대한 이해를 강조했던 몇 안 되는 인물이기도 하다. 또한 단기적인 국제대회 성적에만 집착할 수밖에 없었던 기존의 대표팀 감독들과 달리, '한국농구가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과 비전'까지 제시할 수 있는 이론을 겸비한 인물이라는 점에서 기대가 높다.

추일승 농구의 장점은 흔히 무한 로테이션과 포워드 농구가 꼽힌다. 추 감독은 선수들은 개인능력보다 유럽 스타일의 조직적인 농구를 선호하며, 주전에게만 의존하지않고 가급적에게 여러 선수에게 출전시간을 고르게 분배하는 스타일 때문에 '공산 농구'라는 애칭이 붙기도 했다. 추 감독이 맡은 팀은 항상 백업들의 가용 비중이 높아지며 자연스럽게 선수층이 두터워졌고 이는 팀을 재건해야 하는 '리빌딩' 상황에서 유리한 장점으로 작용했다.

또한 추 감독은 현대농구의 흐름에 맞게 활동량과 멀티플레이 소화능력을 갖춘 장신포워드들을 국내에서 잘 발굴-활용하는 전술가로 꼽힌다. 현대농구는 포지션 파괴가 보편화되었고, 경기를 풀어가는 데 가드보다도 키가 크고 개인기를 갖춘 포워드들을 적극 활용하는 추일승 농구는 빅맨과 가드진의 신장이 낮은 한국농구에서 효율적인 대안이 될 수 있다. NBA에 도전하는 이현중을 비롯하여 여준석-최준용-송교창-양홍석 등 최근 한국농구에서 높이와 기술을 겸비한 포워드 인재풀이 점점 넓어지고 있다는 것은 추일승 감독에게는 호재다.

무엇보다 추 감독은 바닥으로 떨어진 농구대표팀의 국제 경쟁력과 전임감독의 위상을 회복해야 한다는 과제를 안고 있다. 한국 농구 대표팀은 2월 코로나19 감염자 속출로 2023년 국제농구연맹(FIBA) 월드컵 아시아 예선에 불참하며 실격 처리를 당했다. 자연히 월드컵 본선은 물론 FIBA 랭킹으로 경쟁이 이뤄지는 2024 파리 올림픽 도전도 어려워졌다.

2022 항저우 아시안게임도 1년 연기되면서 대표팀의 연속성과 경쟁력을 끌어올리기 쉽지 않은 상황이다. 남자농구는 1996 애틀란타 대회 이후 더 이상 올림픽 본선무대를 밟지 못하고 있으며, 홈에서 열린 2014 인천 아시안게임 금메달 이후 국제무대에서 더 이상 이렇다할 성적을 내지 못하고 있다.

과연 추일승 감독은 이런 악순환을 끊어낼 수 있을까. 감독 개인의 노력만이 아니라 협회와 농구계의 적극적인 지원이 필요하다. 추 감독이 학연과 인맥 면에서 상대적으로 불리한 비주류 출신이기에 더욱 중요한 대목이다. 어쩌면 지도자로서 농구인생의 마지막 도전이 될지도 모르는 농구대표팀 사령탑 자리에서 추 감독이 과연 또 하나의 비주류 신화를 이뤄낼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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