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스로를 먹이고 살리는 일을 지속하기 위한 투쟁

문희정 2022. 5. 20. 1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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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노동자 권리 보장을 위한 기록 '반란의 매춘부'

[문희정 기자]

몇 년 전의 일이다. 젠더이론을 주제로 모인 한 세미나 뒤풀이 자리에서 누군가 말끝에 불쑥 이런 이야기를 꺼냈다. '성매매 여성인데 자기가 페미니스트래요. 계속 일할 거라고 하고 그게 자기한테 맞다고까지 하면서 스스로를 페미니스트라고 주장하는 게 말이 돼요? 진짜 어이없어.'

그때 나는 '왜요, 그럴 수도 있죠.'라고 작게 답하며 황급히 화제를 돌렸다. 대화 속에 등장한 여성에 대한 심정적 동의는 있었으나 '그 일'과 '페미니스트'가 어째서 상충하지 않는지, 혹은 어째서 동시에 말 되어질 수 있는 개념인지 설명할 언어가 나에게 없었던 것이다. 
 
 <반란의 매춘부> 사진
ⓒ 희음
 
이 마음 편치 않았던 기억이 희미해져 갈 때쯤 나는 이 책 <반란의 매춘부>를 읽게 되었고, 책의 '들어가며' 부분 말미에서 눈이 번쩍 뜨이는 경험을 했다. "성노동자는 원래 페미니스트다"라는 문장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이 문장을 뒷받침하는 근거로, 성노동자들이 얼마나 오랜 역사에 걸쳐 광범위한 사회운동의 주체가 되었는지에 대한 내용이 나온다. 중세유럽에서 성매매업소 노동자들은 길드를 형성하여, 경찰의 단속과 직장 폐쇄, 노동조건에 맞서 파업을 하고 거리 시위를 벌였다. 15세기의 매춘부들은 독일 바이에른 시의회 앞에서 그들의 활동이 죄가 아닌 노동이라 주장한 바 있다. 1917년 샌프란시스코에서 200명이 업소 폐쇄에 항거하는 행진을 비롯해 HIV/AIDS, 성소수자 운동, 라이엇 걸, 슬럿워크, 성교육, 논모노가미운동 등 많은 운동에는 이들의 시간이 새겨져 있다.

이쯤에서 궁금해질 수도 있다. 이 운동들을 모두 페미니즘 운동으로 분류할 수 있는가? 적어도 그래야지만 이들을 페미니스트라고 할 수 있을 테니 이는 필수적으로 따라 붙는 질문일지 모른다. 여성운동으로서의 성격이 분명한 운동들을 제외한, 15세기에서 19세기에 이르는 사회운동에 대해서라면 특히나 더 의구심이 불거질 수밖에 없다.

나는 이 같은 질문에 이렇게 답해보려 한다. 먼저 페미니즘의 가장 기본적인 테제가 '여성도 인간이다'라는 것이라면, 인간이 무엇인지를 먼저 물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남성에게만 주어져 있었던 그 '인간임'이 무엇인지를. 나는 그것이 한 존재가 자신의 삶을 둘러싼 조건과 환경을 이해하고 해석하여 어떤 삶을 살 것인지를 정하여 스스로, 혹은 서로가 그러한 방향으로 나아가는 주체가 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페미니스트란, 여성을 포함하여 사람으로 태어난 이 땅의 모든 존재가 이 '인간임'을 선포하고 드러내는 자에 다름 아닐 것이다. 말하기로써, 행위와 실천으로써, 또 그렇게 살아감으로써.

그렇다면 이들 성노동자들의 명확한 의지와 목표의식이 집단적 행위로 표출된, 파업과 거리 시위와 행진 그리고 세상을 향해 울려 퍼진 목소리는 이들이 "원래 페미니스트"였음을 증명하고도 남는 것이 아닐까.

그뿐만이 아니다. 그것이 사회구조적으로 강제되어 있었든 그렇지 않든 생존하기 위해 택할 수 있었던 유일한 수단이 매춘뿐이었을 때, 그 일을 한 것 역시 그 자체로 이들이 '인간임'을 드러내는 데 모자람이 없을 터이다.

위에 열거한 저항운동의 여러 움직임 중 특별히 인상적이었던 기록 하나를 따로 빼두었다. 1859년 <런던 타임즈>에는 "나는 분별 있게 처신하는 사람이며, 당신과 경찰에게 항거한다. 왜 당신들은 매끄러운 얼굴로 도덕에 대해 떠드는가? 도덕이란 무엇인가?"라는 한 매춘부의 글이 실렸다고 한다. 여기서 경찰은 법의 사제다. 공식적으로는 법의 이름으로 법과 도덕 바깥의 울퉁불퉁한 군더더기를 잘라내는 자다.

그런데 현실에서는, 특히 성노동이 범죄화된 국가에서는 전혀 그렇지가 않았다. 그들의 제복은, 그들을 거의 자동적으로 성노동 종사자에게 전지전능한 폭력을 행사하도록 만들었다. 이 책에서는 성노동자들에게 구타, 강간, 강탈을 서슴지 않는 경찰들의 만행을 수도 없이 들려준다.

극단적으로는 매춘부 거리 '청소' 운동의 일환으로 18년 동안 82명의 여성을 마음껏 살해한 러시아의 경찰이자 살인자인 미하일 폽코프의 예시에서부터, 함정 수사를 통해 대상 여성을 강간한 뒤 체포하는 많은 폭력의 예시들까지.

영국의 성노동자 여성이 <런던 타임즈>를 통해 묻고 꼬집었던 저 날카롭고도 통찰적인 질문이 150년이나 흐른 뒤에도 여전히 유효하다는 사실이 놀랍고도 참담했다.
그 질문은 어쩌면 '경찰관'을 넘어서는 '법' 자체에 대한 질문이 아니었을까. 법이 어떻게 한 사회의 가장 소외되고 취약한 집단과 사회적으로 낙인찍힌 신체에 무자비한 비도덕과 폭력으로 내리꽂히는지에 대한. 법이 아니었다면, 법이라는 이름을 빌리지 않았다면 성노동 현장 곳곳에서 경찰들의 이 같은 폭력 행위가 이렇게 당당히 자행되지는 못했을 테니까.

이 책을 읽은 후 '성노동자'는 나에게 예전과는 다른 템포와 뉘앙스를 갖는 단어가 되었다. 저자들 역시 맥락에 따라 성노동자를 매춘부, 성산업 종사자, 성판매자 등으로 바꾸어 사용하기는 하지만, 성을 파는 행위가 그 행위 주체 스스로를 먹이고 살리는 일이 될 때 그것은 '성노동' 이외의 다른 것이 될 수 없음을 확실히 한다.

이 책의 모든 문장과 행간을 떠받치고 있는 전제가 바로 이것임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흔히들 남성 중심의 가부장제와 여성에 대한 남성의 (성적) 지배에 대한 구조를 먼저 보아야 한다고 말하지만, 성산업이 세계의 수맥처럼 촘촘히 뻗어 있는 시대에 이미 그 영역에서 일하면서 생계를 보전하고 있고 또 그곳에서 계속 일하지 않으면 안 되거나 그곳에서 일하기를 원하는 이들에게 구조를 보라는 말은 어떤 의미가 되는가.

다시 말하자면 이들은 구조를 보지 못해서가 아니라, 만천하에 드러난 지금의 이 명백한 성적 착취구조 속에서도 성산업을 통하지 않고서는 온전히 생존하기 어렵거나 자신이 이루고자 하는 삶을 이어가기 어렵기 때문에 이 일을 한다. 또한 성산업 현장에서 일어날 수 있는 위험과 그곳에서의 젠더화 되고 성애화 된 노동이 갖는 한계를 알면서도, 그보다 더 긴급한 제 삶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그 일을 하는 경우가 많다.

이럴 때 구조를 보라는 말은, 나아가 그 말 안에 있는 진의, 즉 구조를 봄으로써 성산업 하에서 이뤄지는 노동들이 진짜 '노동'일 수 없음을 보라는 말은, 지금 그들이 이어나가고 있는 그 생생한 삶을 삶이 아닌 것으로 취급하겠다는 말과도 같지 않을까. 혹은 그 삶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않는 이들이라면 누구라도 그 '치욕의 구조' 속에서, '노동권'을 주장하거나 보장받지 못하는 상황을 당연하게 받아들여야 하며, 안정과 안전의 권리를 탈취 당해도 좋다는 말과 같지 않을까. 만일 그것이 '성노동'이 아니라고 말하려 한다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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