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고점 60점, 대다수 50점.. 이 시험, 한 번 풀어보시죠 [아이들은 나의 스승]
[서부원 기자]
'기억하지 않는 역사는 되풀이된다.'
5.18 민주화운동의 상징과도 같은 글귀다. 국립 5.18 민주 묘지와 5.18 민주화운동 기록관을 비롯해 관련 사적지 어딜 가나 만날 수 있는 죽비소리다. 해마다 세월호 참사가 있은 4월부터 5.18의 5월까지 이곳 광주의 학교마다 실시하는 계기 수업의 주제로 맞춤한 경구다.
어느덧 5.18 42주년이다. 당시 시민들을 무참히 학살한 신군부의 수괴 둘 모두 세상을 떠났지만, 진상규명을 위한 발걸음은 아직도 더디기만 하다. 머지않아 진상규명 작업이 마무리된다 한들 이미 책임자 처벌은 물 건너간 상태다. 무심한 세월은 학살자의 편이었다.
이제 남은 거라곤 비통한 역사의 교훈을 미래세대에게 전하는 것뿐이다. 잊지 않겠다는 다짐을 아이들과 공유하는 것은 교사의 역할 이전에 기성세대로서 당연한 책무다. 학교마다 교문에 현수막을 내걸고, 매년 5월 18일 당일의 급식 메뉴가 주먹밥인 것도 그래서다.
▲ 지난 5.18 42주년 당일, 오후 자습시간을 빌려 '5.18 고사'를 치렀다. 예상 밖으로 점수가 낮았지만, 나름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데는 성공적이었다. |
ⓒ 서부원 |
그런데, 코로나가 전 세계를 휩쓴 지난 두 해 동안 사실상 손발이 꽁꽁 묶여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비대면 원격수업조차 버거웠던 터라 음악회 등의 추모 행사는커녕 교실에서의 계기 수업조차 여의치 않았다. 그저 조회나 종례 때 5.18 몇 주년임을 알려주는 게 고작이었다.
올해 전면 등교가 허용되면서 발길이 분주해졌다. 그렇다고 예전처럼 돌아갈 수는 없었다. 감소 추세라고는 해도 여전히 확진자가 이어지는 데다, 밀집이 불가피한 학교 특성상 긴장의 끈을 놓긴 힘들다. 지금도 학교에선 운동장에서도 마스크를 착용하도록 권장하고 있다.
코로나로 무기한 연기됐던 5.18 행사를 다시 시작하려니 제약이 한둘 아니다. 당장 행사를 함께 꾸려본 아이들이 이미 졸업하고 없다. 대개 학교 행사는 준비 과정에서부터 선배에서 후배로 이어지는 게 보통인데, 지금 대입을 앞둔 고3 아이들조차 아무런 경험이 없다.
오랫동안 정기적으로 해온 행사라도 몇 해 미룬 뒤 재개하는 건 여간 힘든 일이 아니다. 하물며 경험한 이가 아무도 없다면 차라리 새판을 짜는 편이 낫다. 코로나로 인한 공백은 예산 편성에도 영향을 끼쳤다. 적어도 올해 5.18 행사는 작년과 마찬가지로 예정에 없던 일이다.
덩달아 5.18에 대한 아이들의 관심도 예년 같지 않다. 몇 해 전까지만 해도 5월이 시작되면 교내 분향소가 설치되고 갖가지 추모 행사를 알리는 포스터가 나붙었는데, 올해는 학교 안팎의 분위기가 이상하리만큼 썰렁하다.
역사 교사로서, 뭐라도 해야 한다는 절박함
5월을 이대로 흘려보내면 다시 1년을 기다려야만 한다. 본디 시간은 망각의 편이어서, 이대로라면 43주년인 내년에는 올해보다 더 썰렁해질 게 분명하다. 하릴없이 흐르는 세월 속에 5.18의 정신은 몰각된 채 한낱 역사 교과서에 나오는 수험용 지식으로 전락하게 될지도 모른다.
역사 교사로서, 뭐라도 해야 한다는 절박함이 밀려왔다. 코로나를 핑계로 헛되이 보낸 지난 두 해의 5.18을 똑같이 반복해선 안 된다는 다짐이 섰다. 학생회의 도움도, 예산도, 준비할 시간도 없었지만, 이가 아니면 잇몸이라는 배짱으로 실현 가능한 방안을 찾아 나섰다.
그렇듯 번갯불에 콩 볶듯 계획된 것이 '버스킹'과 '5.18 시험'이다. 학사일정에 별도의 시간을 할애할 수 없어 마련한 고육지책이다. 5월 18일 당일 점심시간에 급식소 앞에서 간이 공연을 열고, 자습 시간을 빌려 지필고사 형식으로 5.18 관련 내용을 공부해보자는 취지다.
버스킹은 일단 뜻 맞는 동료 교사와 의기투합했다. 함께할 아이들을 모집하고 행사 계획을 짤 여유가 없어서다. 따로 연습할 시간이 마땅치 않아 몇 해 전 행사 때 무대에 올렸던 노래를 다시 부르기로 했다. 어차피 '청중'이 달라진 만큼 옛것과 새것의 차이가 느껴질 리 없다.
총 네 곡에 공연 시간은 고작 20분이다. 무대도, 객석도 따로 없다. 노래하는 이도, 듣는 이도 서서 부르고 들어야 한다. 급식을 위해 줄을 서고 식사 후에 교실로 가는 도중의 잠깐이지만, 노래를 함께 부르고 들으면서 5.18 42주년임을 떠올리게 된다면 그걸로 족하다고 여겼다.
첫 곡은 '그날이 오면'. 영화 < 1987 >의 OST로 사용되면서 요즘 아이들에게도 잘 알려진 노래다. 1987년 6월 민주항쟁이 5.18의 연장선에서 일어난 역사적 사건이라는 점을 자연스럽게 깨닫게 해줄 수 있다. 알다시피, 80년대 민주화운동은 '5.18 광주 알리기'였다.
다음은 고1 한 아이의 솔로 무대다. 친구들 사이에서 '피아노 신동'으로 불리는 그가 악보도 없이 프랑스의 샹송 가수 미셸 뽈라네프의 'Qui A Tue Grand'Maman(누가 할머니를 죽였나)'을 연주했다. 이 노래는 1980년대를 풍미한 민중가요 '오월의 노래'의 원곡으로 유명하다.
세 번째는 5.18 추모 주간이면 항상 겹쳐 생각나는 사람을 위한 헌사다. 5월 23일 세상을 떠난 제16대 대통령 노무현. 그를 위해 만들어진 곡은 아니지만, 누구든 이 노래만 들으면 그가 떠오른다고 했다. 김광석의 '부치지 않은 편지'. 몇 해 전 추모 행사의 주제곡이기도 했다.
늘 그래왔듯, 마지막은 '임을 위한 행진곡'을 함께 목놓아 부르는 것이다. 5.18 희생자 추모를 넘어, 명실공히 우리나라 민주화운동을 대표하는 노래다. 나아가 일본과 대만, 동남아 등 아시아 민주화운동의 현장에서도 흔히 들을 수 있을 만큼 세계인의 공감과 호응을 얻고 있다.
▲ '5.18 고사'를 푸는 데 집중하고 있는 고1 학생의 모습 |
ⓒ 서부원 |
점심시간 짧은 버스킹이 끝난 오후 자습 시간. 이제 '5.18 시험'을 치를 차례다. 내신 성적에 반영되지도 않을 뿐더러 스스로 풀고 채점해보는 이벤트성 행사지만, 아이들의 표정만큼은 자못 진지하고 비장하기까지 하다. 연신 고개를 갸웃거리거나 머리를 쥐어뜯는 모습도 보인다.
사실 시험 문제를 만든 건 한 달 전쯤이다. 한 중앙 일간지의 5.18 기획 기사용으로 출제를 의뢰받았는데, 장삼이사의 구독자를 대상으로 삼기엔 지나치게 까다롭다는 이유로 대폭 수정됐다. 열독률을 높이기 위해서는 지면 배치와 편집만큼이나 난이도 조정도 중요하다는 거다.
그렇다면, 지금 현대사를 배우고 있는 고등학생에게는 어떨까. 별도의 계기 수업을 준비하는 대신, 손보기 전 출제 원안을 그대로 아이들에게 적용해 보기로 했다. 몇 사람만 거치면 모두 유가족이라는 이곳 광주의 아이들이라면 그다지 어렵지 않게 풀어낼 수 있으리라 믿었다.
선다형과 단답형을 섞은 스물다섯 문제에 5.18 전후의 역사와 의미를 그러담으려 애썼다. 당시의 시대적 상황과 후대 역사가의 해석, 신군부의 만행과 극우 세력의 왜곡과 폄훼, 역사적 의의와 교훈까지 두루 살폈다. 5.18의 과거와 현재를 입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했다.
내심 동료 교사들도 아이들과 함께 풀어보길 바랐다. 최근 부임한 교사 중에는 90년대에 태어난 분들이 드물지 않다. 역사 전공자라면 모를까, 5.18을 바라보는 인식은 젊은 교사들과 아이들이 별반 다르지 않은 듯했다. 5.18도 6월 민주항쟁도 영화를 통해 이해하는 세대다.
"쉬운 건 쉬웠지만, 어려운 건 진짜 어려웠어요. 그래도 60점은 넘었으니 과락은 면했네요."
한 젊은 동료 교사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아이들은 어땠을까. 당장 단답형보다 선다형이 더 어려운 시험은 처음이라며 너스레를 떨었다. 한 아이는 절반도 못 맞힌 낮은 점수에도 타지의 고등학생이라면 서너 문제 맞히기도 어려웠을 거라면서 짐짓 으스대기도 했다.
5.18 다시금 떠올리는 계기 되었다는 아이들
우리 반 아이들 25명의 점수는 부러 일일이 확인해봤다. 광주의 아이들에게도 문제가 어렵긴 어려웠나 보다. 최고점이 60점으로, 대다수가 50점 아래였다. 눈에 띄는 건, <택시 운전사>나 < 1987 > 등 영화나 TV의 예능 프로그램 등에서 다뤄진 내용에 대해선 틀린 경우가 거의 없었다는 점이다.
물론, 5.18만의 문제는 아닌 듯했다. 현대사에 대한 지식이 태부족하여 인물과 사건을 묶는 것조차 힘들어했다. 당황스럽게도 전태일을 5.18과 연결 짓는가 하면, 5.18 진상규명을 외치며 숱한 대학생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던 피맺힌 민주화 과정을 아이들은 이해하지 못했다.
그저 5.18을 전두환과 신군부, 시민군, 가짜 뉴스 정도의 단어와 관련지을 수 있을 뿐이었다. 시험에 주로 등장하는 내용이라서다. 낯선 문제 풀이에 쩔쩔매는 와중에도 몇몇 아이들은 교과서에 5.18 관련 내용이 지나치게 부족하다고 지적하는가 하면, 조만간 5.18 사적지를 두루 찾아봐야겠다며 다짐하기도 했다.
급조한 어설픈 프로그램치고는 둘 다 나름 성공적이었다. 실수투성이의 버스킹에 느닷없는 지필고사가 생뚱맞게 느껴졌을 테지만, 아이들은 5.18을 다시금 떠올리는 계기가 되었다고 입을 모았다. 시험지의 맨 뒷장에 '기억하지 않는 역사는 되풀이된다'는 경구를 부러 새겨놓은 까닭이다. 43주년인 내년의 5.18 추모 행사는 분명 올해와는 다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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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 5.18고사의 정답은 아래 첨부파일을 참고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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