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친코의 '선자'는 우리 곁에서 살 수 있을까

이준 입력 2022. 5. 19. 1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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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여성단체연합 이슈리포트 젠더 잇:다 5월호]

여성연합은 성평등 사회를 위한 활동 속에서 젠더 이슈를 발굴하고 더 많은 사람들에게 소개하기 위해 이슈리포트 '젠더 잇:다'를 발간하고 있습니다. 현장에서 뛰고 있는 활동가들의 치열한 고민이 담긴 이슈리포트 '젠더 잇:다'는 젠더 이슈는 우리 주변에 언제나 존재했고, 그 이슈를 발굴하여 함께 활동하는 사람들과 연결하고 연대한다는 의미입니다. 이 글은 이슈리포트 '젠더 잇:다' 2022년 5월호에 실린 글입니다. <기자말>

[이준]

김하일이라는 시인이 있다. 현대의 구분으로는 시인이지만 일본의 전통적 문학 형태인 단가(短歌)를 짓기 때문에 가인(歌人)이라 불린다. 별칭 같은 아름다운 표현이지만 그가 시를 읊게 된 과정은 아름답지 않았다.

1926년 조선에서 태어난 그는 열셋의 나이에 아버지를 따라 일본으로 건너갔으나 2년 뒤 한센병이 발병해 도쿄의 요양소에 강제 수용되었다(김하일에 대해 확인 가능한 가장 최근의 정보. 1946년 군마현의 요양원으로 옮겨가 평생을 살았다. "二重の差別と闘う金夏日さん 朝鮮学校の教科書に"(이중 차별과 싸우는 김하일 씨 조선학교 교과서에), 2017.8.18., <아사히신문디지털>).

한센병으로 시력을 잃고 손발이 마비되고 피부가 괴사되어 그나마 감각이 남아 있던 혀로 점자를 배우고 시를 지었던 것이다. 침으로 젖은 종이가 혀에서 난 피로 젖을 때까지 점자를 익힌 김하일의 단가 중 한 수를 옮긴다.

指紋押す指の無ければ外国人登録証にわが指紋なし
지문 찍을 손가락이 없어 외국인등록증에 내 지문이 없다
 
 김하일 시인의 수필집 『点字と共に 점자와 함께』
ⓒ 한국여성단체연합
단순히 한센병으로 지문이 없어진 것을 자조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보이지만 여기에는 그가 받았던 뿌리깊은 상흔이 고스란히 나타난다. 1947년 외국인등록령으로 시작된 주기적 지문 날인과 외국인등록증 휴대는 오랫동안 재일조선인들을 괴롭혀온 대표적인 감시·통제수단이자 차별을 위한 낙인이었기 때문이다.

전후 식민지 출신으로 '외국인'이 된 김하일은 한센병 환자이자 재일조선인이라는 중첩된 차별의 대상이었다. 제도적으로 일본의 복지정책에서 밀려났고 요양원에서는 같은 병을 앓는 일본인 환자들마저 그를 차별했다. 격리 정책은 계속되고 조선에 돌아갈 여건도 마련되지 않은 상황에서 일본 정부는 일본인 환자들에게만 연금과 위로금을 지급하고 한반도 출신자에 대한 보상은 회피했다("감당할 수 없어도 감당해야 하는 진실의 무게", 2019.8.30., <경향신문>).

혀끝의 아픔보다 고통스러웠을 그의 이방인로서의 삶을 들여다보며 지금의 우리 사회와 어쩐지 닮은 부분을 발견한다. 사회구성원으로서 포용되지 못하고 기본권마저 보장받지 못한 채 차별받는 삶. 우리 주변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이주의 삶이다. 다만, 주객은 전도되어 있다.

잘못된 시작, 주어지지 않는 권리

'반만년의 역사를 가진 단일민족'에 대한 자긍심을 주입받던 한국사회가 이주민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된 것은 2000년대 이후였다. 1990년대 중반 이주노동자가 급증했지만 이들은 잠시 한국에서 돈을 벌고 돌아갈 저임금 노동력에 불과했고, 2000년대 들어 결혼이민자 수가 폭발적으로 늘어나면서 이들을 제도적으로, 사회문화적으로 한국사회에 편입시키기 위한 다양한 시도가 이루어졌다. '다문화'라는 단어가 유행처럼 번졌고, 2008년 다문화가족지원법이 제정되었다. 잘못 끼워진 단추였다.

한국에서 다문화는 곧 다문화가족을 의미했고 결혼으로 한국에 온 외국인 여성을 한국사회에 동화시키며 출산과 양육을 위한 역할을 부여하는 것이 정책의 최우선 목표였다. 이들에 대한 지원은 분명 필요한 것이었지만 그 어디에도 각기 다른 이주민과 이주의 형태에 대한 정책, 문화적 다양성의 확대, 사회구성원의 역할 등에 대한 고민은 없었다. 제도적으로 지원받는 이주민과 그렇지 못하고 배제되는 이주민의 차이가 더욱 명확해졌고 이는 분명 서로 다른 문화에 대한 존중과 문화적 차이에 대한 관용을 중시하는 다문화주의와는 거리가 멀었다.

이주노동자도, 한국인과 결혼하지 않은 이주 여성도 밖으로 밀려났다. 지원 대상이 된 결혼이주 여성 역시 보편적 복지체계 하에 마땅히 누려야 할 시민적 권리 대신 '다문화가족'이기 때문에 받는 특별법의 '혜택'을 받는 존재로 자리매김했다. 결국 다문화가족은 복지서비스의 수혜자이자 '우리'의 조력이 필요한 존재인 동시에 공공연한 경멸의 대상이 된 것이다("우리는 모두 이주민이다", 2012.4.25., <한겨레21>). 그렇게 잘못 이식된 다문화의 기치 아래 대한민국은 이주에 대한 선택적 차별이 만연한 나라가 되었다.

전 세계 유례없는 성공적 방역이라는 찬사가 이어진 팬데믹 상황에서 대부분의 이주민들은 재난지원금을 지원받지 못했다. 내국인과 결혼한 결혼이주민과 영주권을 취득한 이주민만이 지급대상이 되어 200만 이주민 중 약 170만 명이 배제되었다("또 재난지원금 배제된 이주민·난민…인권위 판단도 오락가락", 2021.9.12., <뉴스1>). 사각지대에 놓인 미등록 이주노동자까지 갈 것도 없이 한국에서 고용되어 법에 따라 세금을 내고 있던 이주노동자들마저 질병이라는 전 세계적인 재난 속에서 구성원으로서의 최소한의 인정도 받지 못했던 셈이다.

한국에서 노동을 하다가 코로나로 인해 벌이가 끊긴 이들, 한국에 자리 잡고 장사 터전을 마련했지만 코로나의 여파로 내국인 자영업자들과 동일한 피해를 입은 이들이 오로지 한국인이 아니라는 이유로 차별받았고 인터넷 상에는 내국인에게도 충분치 않은 지원금을 외국인들이 받아간다는 혐오에 기반한 가짜뉴스가 만연했다. 이주노동자들에게 의무적으로 코로나 검사를 받게 했던 행정명령 역시 잊지 말아야 할 대한민국의 과오다. 전전긍긍하며 선별진료소 앞에 늘어선 이들에게 지방정부가 붙인 '딱지'는 질병과 전혀 상관없는 외국인 혐오를 부르기에 충분했다.

작년 12월 헌법재판소는 이주노동자들과 국내 시민사회단체들이 사용자의 일방적인 노동시간 변경, 연장노동수당 미지급, 기숙사비 추가 공제, 무면허 건설기계 조종 강요, 협박성 발언, 보호장구 미지급 등 빈번한 노동법 위반과 잘못된 행태에도 사업장 변경이 불가능한 현재의 외국인고용법이 기본권을 침해한다며 헌법소원을 청구한 사건을 기각·각하했다. 직업선택의 자유 중에서도 제한되었을 때 침해의 정도가 가장 큰 직장선택의 자유가 이주노동자들에게는 주어지지 않았다고 선언한 셈이다.

헌재는 "헌법상 '근로의 권리'에는 열악한 노동 환경을 갖춘 사업장을 이탈하거나 이직해 개인이 스스로 노동 환경을 개선하는 방법을 보장하는 것은 포함되지 않는다"며 "사업장 변경을 제한하고 현재의 일터에서 계속 일하도록 강제한다고 해서 신체의 자유를 제한하는 것도 아니"라는 놀라운 입장을 보였다.

또한 "외국인 근로자가 근로계약을 해지하거나 갱신을 거절하고 자유롭게 사업장 변경을 신청할 수 있도록 한다면 사용자로서는 인력의 안정적 확보와 원활한 사업장 운영에 큰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다"("외국인근로자 사업장 변경 제한, 직장 선택권 침해 아냐", 2022.1.4., <법률저널>)며 지극히 사용자의 입장을 대변하는 의견을 덧붙였다.

이러한 논지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사용자와 노동자 간의 힘의 불균형을 전제로, 노동자를 보호함으로써 계약자유의 원칙을 실질적으로 관철함을 목적으로 하는 노동법의 원리와 정면으로 배치된다("직장선택의 자유 제한, 이주노동자만 다른 기준 적용", 2022.1.19., <매일노동뉴스>).

이주노동자가 위협받는 건 노동권만이 아니다. 정부 방침에 따라 2019년 7월부터 한국에 들어와 6개월 이상 거주하는 외국인은 직장가입자나 피부양자가 아니면 의무적으로 지역가입자로 건강보험에 가입해야 하는데, 대부분 이주노동자 신분으로 소득수준이 낮음에도 당국의 기준에 따라 평균보험료 또는 그 이상이 일률적으로 부과된다. 그럼에도 이들의 피부양자 등록은 내국인보다 제한적이다.

내국인 지역가입자는 직계존비속, 형제자매, 배우자, 배우자의 직계존속 등 누구나 세대원으로 인정받을 수 있지만 이주민은 배우자와 미성년 자녀만이 세대원으로 인정된다. 체납에 대한 제재도 과도하다. 이주민 지역가입자는 다음달치 보험료를 전달 25일까지 미리 납부해야 하고, 한번이라도 내지 못하면 미납분을 채워넣을 때까지 보험적용을 받을 수 없다. 완납해도 보험 급여를 소급해 받을 수 없다("보호받지 못하는 몸-혐오정치가 내세운 '이주민 무임승차론'", 2022.4.1., <경향신문>).

이러한 현실에도 불구하고 지난 1월 윤석열 당시 국민의힘 대선후보는 '국민이 잘 차려놓은 밥상에 숟가락만 얹는 외국인 건강보험 문제를 해결하겠다'며 경악스러운 수준의 혐오정치를 앞세우고 있었다. 심지어 특정 국가 출신 외국인을 명확히 언급하며 21세기의 한국정치에 인종차별을 끌어들였다.

외국인 건강보험 재정이 재정수지 흑자 5715억 원에 2017년부터 4년간 누적흑자 1조4095억 원이라거나, 건강보험료를 내더라도 원하는 대로 치료를 받는 상황 자체가 안 되는 이들이 훨씬 많다는 점은 무시하면 그만인 것이다. 그들이 세금을 내고 노동을 하며 일정 부분 사회에 기여하는 구성원이라는 점은 차치하더라도, 국적이 다르다는 이유로 '건강'을 돌볼 권리에 차별을 두는 정치와 제도는 일종의 퇴행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우리의 이주, 우리 안의 이주

국가인권위원회가 발표한 '2020년 차별에 대한 국민인식조사'에 따르면 조사대상자의 69.3%가 코로나19가 확산되는 상황에서 차별이나 혐오의 대상이 된 사람/집단이 있다고 답했다. 1, 2순위를 차지한 '종교인'과 '특정지역 출신'은 실제 팬데믹과 맞물려 사회 전체의 이슈가 되었던 집단이기에 예외로 한다면 3위가 '외국인․이주민'이라는 점은 역시 눈여겨볼만 하다.

또한 응답자 중 무려 90.8%가 그 누구도 차별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는 인식에 동의하고 있었고, 향후 차별로 인한 사회적 갈등이 심화될 것이라는 전망에 72.4%가 동의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차별의 사회적 영향에 대한 분명한 인식에도 불구하고 출신 국가, 문화적 배경, 종족, 민족, 이주의 원인과 목적 등 다양한 요소가 한 데 뒤엉킨 외국인과 이주민에 대한 차별은 여전히 우리 사회 곳곳에서 나타나고, 제도는 이를 완화하기는커녕 방관하거나 때로는 부채질하는 모양새다.

유엔인종차별철폐위원회(CERD)는 2019년 대한민국의 통합정기보고서 심의에 따른 최종 견해를 발표하면서 한국사회에 인종차별이 우려할 만한 수준임에도 인종차별철폐를 위한 법제도적 기반이 부재함에 깊은 유감을 표하기도 했다.

<파친코>의 성공으로 '코리언 디아스포라'에 대한 관심이 높다. 일본으로, 러시아로, 미국으로, 남아메리카로 흩어진 그들이 얼마나 고되고 치열한 과정을 거쳐 삶을 일구고 때로는 그 사회의 중심에 서기도 했는지, 다난한 역사 속 '우리 민족'의 이주의 경험에 대해 공감하고 안타까워하며 때론 자랑스러워한다.

그러나 베트남의 선자가, 우즈베키스탄의 김하일이 우리 곁에 있다는 점을 상기한다면 코리언 디아스포라와 다를 바 없는 그들의 투쟁이 눈에 보일 것이다.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전염병의 재난 속에서 선주민과 동일한 조건 하에 물품을 구하지도 지원금을 받지도 못하는 선자가 있을 것이고, 세금을 내고 자신의 세금이 어떻게 사용될지 결정하는 과정에 참여할 권리를 가진 것만으로도 사회를 불공정하게 만드는 위험한 세력으로 지탄받는 김하일이 있을 것이다.

물론 이를 보고 <파친코> 속 선자를 비롯한 수많은 재일한국인들은 고개를 갸웃할 테다. 우리가 평생을 갖고 싶어 했던, 그래서 일본 정부와 줄기차게 싸워왔던 기본적인 참정권이 보장된다는 것만으로 조국에서는 혐오의 대상이 된다니 말이다.

*참고문헌
김귀분(2019). 재일한국인 한센병환자·회복자의 인생과 역사. 횡단인문학, 4, 27-50.
전경옥(2016). 여성이주노동자 권리 관련 국제규범과 한국의 여성이주노동자 인권정책. 다문화사회연구, 9(1), 65-96.
국가인권위원회(2020). 2020년 차별에 대한 국민인식조사 보고서.
국가인권위원회(2020). 한국사회의 인종차별 실태와 인종차별철폐를 위한 법제화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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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이 글의 글쓴이는 이준 한국여성단체연합 활동가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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