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는 인종·문화·지리적 단일체.. 분단 원치 않아"

2022. 5. 19. 0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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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6·25전쟁 그리고 한국 기독교] 미국의 신탁통치 구상과 한반도의 분단 (1)
1945년 8월 10일 미국 삼부(국무부 육군부 해군부) 조정위원회가 작성한 미·소 양국의 일본군 점령을 위한 지도. 아래 사진은 1947년 5월 38선 표지판 앞에 도착한 월남 가족들 모습. 38선은 일본군 점령을 위해 만들었던 군사작전 선으로 소련에 의해 한민족을 둘로 나누는 분단선이 됐다. 미국 국립문서기록청, 뉴시스


다가오는 6월은 우리 민족 최대 비극인 6·25전쟁이 일어난 달이다. 이때만 되면 왜 우리 민족이 분단되었는가를 묻지 않을 수 없다. 이를 알기 위해서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의 한반도 정책을 살펴봐야 한다. 미국은 영국 중국과 함께 1943년 11월 카이로에서 “적당한 과정을 거쳐서 한국은 자유롭고, 독립될 것”이라고 선언했다. 미국은 대부분의 식민지가 정치적으로 미숙하므로 일정한 신탁통치 과정을 통해서 민주주의를 교육한 다음에 자유민주세계에 편입시켜야 한다고 생각했다. 미국은 한국을 신탁통치과정을 거쳐 자유민주국가로 만들려고 했다.

미국은 주변 강대국과 한반도를 공동으로 신탁통치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미국은 한반도에 대한 영토적 욕심이 없었다. 그러나 만일 한반도를 중국이 담당하면 소련이 싫어하고, 소련이 한반도를 주장하면 중국과 일본이 크게 위협을 받을 것이기 때문에 미국이 주도하고, 중국 영국 소련이 참여하는 공동신탁통치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미국은 이런 공동신탁통치가 한반도를 분할시키지 않을까 염려했다. 국무부는 “한반도는 인종적, 문화적, 지리적 단일체”이기 때문에 분할돼서는 안 되고, 각국이 일본군의 무장해제를 완성한 다음에는 “하나의 통합된 민정 행정기구”를 세워야 한다고 생각했다. 미국의 루스벨트 대통령과 소련의 스탈린은 1945년 2월 얄타회담에서 소련의 대일전 참전을 요구하면서 한반도에 대한 공동신탁통치에 합의했다.

미 국무부는 여전히 스탈린이 한반도를 분할하거나 공산화하지 않을까 염려했다. 그래서 같은 해 4월 루스벨트의 급서 이후 대통령이 된 트루먼에게 스탈린과 ‘한국의 과도 정부 선출을 위한 단 하나의 기구’ 설립을 약속하라고 요구했다. 트루먼은 1945년 5월 특사를 소련에 보내 루스벨트와 스탈린의 약속을 재확인했다. 하지만 그 내용은 분명하지 않았다.

1945년 7월 포츠담 회담에서 소련은 대일전 참전을 약속하면서 한반도의 자유와 독립을 선언한 카이로선언을 수용했다. 하지만 트루먼은 동유럽에서 스탈린이 자신의 점령 지역을 공산화한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최선의 방책은 소련의 도움이 없이 대일전을 끝내는 것으로 생각했다. 따라서 포츠담회담 중 원자폭탄 실험이 성공했다는 비밀전보를 받고 한반도의 신탁통치에 대한 구체적인 논의를 보류하고, 8월 6일과 9일 일본에 원자폭탄을 투하한 것이다. 이것을 본 소련은 8월 9일 일본에 선전포고하고 전투를 시작했다. 소련의 개입 전에 전쟁을 끝내고 한반도를 자유 세계로 만들려는 트루먼의 희망은 이뤄지지 못했다. 원자폭탄 투하와 소련의 참전을 본 일본은 즉시 항복 의사를 표시했다.

일본의 항복 의사를 통보받은 미국은 소련의 한반도 전체 점령을 막기 위해 38선 이북은 소련군이, 38선 이남은 미군이 점령할 것을 제안했고 스탈린은 이를 수용했다. 38선은 일본군 무장해제를 위한 군사작전 선이었다. 8월 16일 한반도의 분단을 염려하는 기자에게 트루먼은 소련은 포츠담에서 카이로선언에 나와 있는 한반도의 자유와 독립에 동의했기 때문에 한반도는 ‘자유국가’(a free country)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트루먼은 한반도가 공산국가가 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이후 트루먼은 자서전에서 “38선을 분단선으로 한다는 것은 한 번도 국제간 토의 사항이 되지 않았다. 스탈린이 공동신탁통치안에 찬성한 사실로 미루어 전 한반도에 걸쳐 공동관리가 시행될 것으로 우리는 기대했다”고 적었다. 트루먼은 한반도 분단만은 막으려 노력했다.

미 국무부도 군사작전 선인 38선이 한반도의 분단선이 되는 것을 염려했다. 그래서 1945년 8월 하순 “국무부는 일본군의 항복이 종료된 다음에는 ‘미국과 소련’의 민간행정업무는 통합돼야 하며, 한반도는 하나의 중앙행정구역이 돼야 한다고 믿는다”고 밝혔다. 이를 구체적으로 실천하기 위해서 주한 미군 사령관 하지에게 북한에 진주해 있는 소련 사령관 치스챠코프와 만날 것을 명령했다. 하지 사령관은 9월 8일 한반도에 진주한 다음 즉시 북한의 치스챠코프에게 연락해 하나의 중앙행정부를 만들기 위한 협상을 하자고 제안했다.

그러면 당시 소련의 대한정책은 무엇이었을까. 한반도가 일본 대소 침략의 전초기지가 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 친일세력을 제거하고 친소정부를 세우는 것이었다. 이런 소련에 미국의 38선 분할 점령 제안은 좋은 기회였다. 스탈린은 한반도 전체가 친소정부가 되는 것이 바람직하지만 그렇지 못하면 한반도 북쪽이라도 확실한 친소정부를 세우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했다. 그 결과 스탈린은 9월 20일 “북한에 부르주아 민주주의(인민민주주의) 정권을 수립하는 데 협조할 것”이라는 비밀지령을 내렸다. 소련군은 처음부터 북한에 단독으로 인민 정부를 세우고자 노력했다. 소련 측은 1945년 10월 10일 미국 측에 공문을 보내 미국 측의 제안을 거부했다.

소련은 미국이 제안한 군사작전 선을 이용해 남북을 정치 경제 문화적으로 분단시켜 버렸고, 북한에 친소정부를 세웠다. 38선을 제안한 것은 미국이지만 한반도를 실질적으로 분단시킨 것은 소련이었다.

박명수 명예교수
서울신대·현대기독교역사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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