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중권 칼럼] 5·18 단상
엊그제 같은데 그날로부터 벌써 42년이 흘렀다. 젊은 시절 광주는 우리의 영혼이었다. 우리 윗세대가 평생 한국전쟁의 기억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면, 우리 세대는 광주학살의 기억을 평생 잊지 못할 트라우마로 안고 살아왔다. 우리가 젊은 시절에 기성세대의 6·25 얘기를 지겨워했듯이 지금의 젊은 세대에게는 우리가 늘어놓는 5·18 얘기를 지겨워할지 모르겠다.
우리가 6·25 얘기를 지겨워했다고 자유를 지키다가 순국한 이들의 희생을 무시한 것은 아니었다. 그저 그들의 희생을 기득권 유지에 써먹는 군사정권의 행태를 미워했던 것뿐. 5·18 얘기를 지겨워하는 젊은이들도 다르지 않을 게다. 그들도 민주열사들의 희생을 우습게 보는 게 아니라 그분들의 희생을 제 기득권 유지에 활용하는 586세대의 행태가 싫은 것뿐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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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수 대통령도 민주화 직선제 선출
5·18, 이념 넘어 모두의 정치 자산
누구도 폄훼하거나 사유화 말아야
여당 전원 참석이 통합의 출발 되길
」
윤석열 대통령이 국민의힘 의원들에게 전원 5·18 기념식에 참석해 달라고 요청했고, 이준석 대표는 5·18을 헌법 전문에 집어넣기로 한 윤 대통령의 공약이 유효함을 재확인했다. 귀한 일이다. 5·18 기념식장에서 ‘임을 위한 행진곡’ 제창을 금지하고, 의원들이 이상한 행사를 열어 5·18을 폄훼하는 해괴한 망언이나 늘어놓던 것이 불과 몇 해 전의 일이다.
보수의 이름으로 5·18을 폄훼하는 것은 이해하기 힘든 일이다. 보수당에서 배출한 대통령들도 모두 민주화운동의 산물인 직선제 개헌을 통해 선출되지 않았던가. 5·18이 없었으면 우리는 아직도 군부독재 아래서 체육관 선거를 하고 있을게다. 군사쿠데타의 두 주역을 감옥으로 보내고, 5·18 기념묘지를 성역화한 것도 실은 보수의 김영삼 정권의 업적이었다.
5·18은 보수와 진보의 장벽을 넘어 우리 모두의 정치적 자산이어야 한다. 그런데 불행히도 그동안 한 진영에서는 그것을 마치 자기들만의 것인 양 사유화하고, 다른 진영에서는 그것을 아예 남의 것으로 여겨 폄훼하려 드는 경향이 있었다. 보수당 의원들 전원이 참석하는 이번 기념식을 계기로 5·18이 우리 모두의 공동의 기억으로 자리잡았으면 좋겠다.
사실 5·18을 욕되게 하는 것은 폄훼하는 이들만이 아니다. 그것을 자신들의 전유물로 여겨 배타적인 태도를 보이는 이들이 있다. 이번 대선 과정에서 가장 가슴이 아팠던 장면은 윤석열 후보가 5·18묘역을 방문하려다 몇몇 시민단체들의 항의로 발길을 돌리는 모습이었다. 누구든 참배를 하겠다면 환영할 할 일. 누가 그들에게 타인의 참배를 막을 권리를 주었단 말인가.
망월동 묘역 앞에는 참배객들이 밟고 지나가도록 바닥에 ‘전두환 기념비’가 깔려 있는 것으로 안다. 전두환이 광주학살의 주범이고, 그가 생전에 그 일에 대해 반성도 사과하지도 않은 것을 생각하면, 이 또한 마땅하고 당연한 일이라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런 감정적 대응이 과연 민주를 위해 산화하신 분들의 정신을 기리는 격조 있는 방식인지 모르겠다.
대선 레이스 중에 이재명 후보는 그 비석을 짓밟으며 ‘윤석열은 못 밟았겠지?’라고 말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는 에도 시대의 ‘에부미(絵踏み)’ 전통을 연상시킨다. 그 시절 일본에서는 예수나 성모의 상이 그려진 그림을 바닥에 깔아놓고 사람들에게 밟고 지나가도록 강요했다고 한다. 그림을 차마 밟지 못하는 자들은 ‘키리시탄’(크리스찬)이라는 것이다.
나 역시 개인적으로는 전두환을 증오하지만 그의 기념비를 발로 밟고 지나가라는 요청에는 선뜻 응하지 않을 것 같다. 그 이유는 미학적인 것이다. 즉, 그에 대한 증오를 표현하는 그 방식이 너무 봉건적이라 느끼기 때문이다. 이게 어디 나 혼자만의 느낌이겠는가. 하지만 그것을 밟으라고 요구하는 이들은 나 같은 사람을 너무나 간단하게 전두환 추종자로 여길 것이다.
에부미는 눈에 보이지 않는 내면의 ‘양심’을 눈에 보이는 외적인 행동으로 끄집어내는 폭력적 장치였다. 당시 이재명 후보는 “윤석열 후보도 왔었나요?”라고 물은 뒤 “왔어도 존경하는 분이니 못 밟았겠네”라고 말한 것으로 안다. 한 마디로 비석을 밟는 외적인 행동을 내면의 ‘존경심’의 징표로 사용하겠다는 얘기. 과연 이런 것을 민주적 관행이라 부를 수 있을까?
양심의 자유는 민주주의의 토대이며, 동시에 우리 헌법의 정신이기도 하다. 그곳에 묻힌 열사들은 바로 그 가치를 위해 군부독재와 목숨을 바쳐 싸웠던 분들이다. 그런 분들을 그런 식으로 기리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그분들이 지키고자 했던 그 가치를 배반하는 일로 보인다. 이보다 그분들의 희생을 더 완벽히 모독할 수는 없을 것이다.
통합의 상징이어야 할 5·18을 배제의 도구로 사용하는 것이야말로 5·18 정신을 심각하게 훼손하는 것이 아닐까? 5·18은 이념의 차이를 넘어 민주주의적 기본질서에 동의하는 모든 이들의 공통의 자산. 진보든 보수든 우리 모두는 바로 그 자산 위에서 정치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5·18은 폄훼되어서도 모욕당해서도 안 된다. 올해의 기념식이 그 통합의 출발이 되기를 바란다.
진중권 전 동양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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