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찬호의 시선] 국회의장이 '민주당 당의장' 뽑기인가
“내 몸에는 민주당의 피가 흐른다.” “국회의장이 돼도 민주당의 일원임을 잊지 않겠다.” “의장이 되면 윤석열 정부를 제대로 견제하겠다.”
국회의장 후보로 나온 더불어민주당 의원들의 입에서 나온 소리다. 경악을 금할 수 없다. 국회의장 경선이 민주당 당의장을 뽑는 자리인가. 국회의장은 당파를 초월해 여야를 조율하고 타협을 도출하는 중책 중 중책이다. 의장이 되는 순간 당적을 정리하고 무소속이 되는 이유다. 그런 자리의 의미와 무게를 민주당 최고참 의원들인 후보들이 철저히 짓밟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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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네 후보 중 셋이 당내 충성 경쟁
당권 장악한 이재명계 눈치보기
‘미스터 쓴소리’ 이상민만 중립
」
박근혜 정부 시절 국회를 이끈 정의화 전 국회의장은 의장의 진면목을 보여준 이로 평가된다. 경제5법·노동개혁법 등을 직권상정하라는 여당의 요청을 거부하고 여야 합의로 처리되게끔 했다. 분노한 박근혜 청와대는 “이러시면 재미없습니다”며 협박을 서슴지 않았지만 정 전 의장은 끄떡도 하지 않았다. 그는 야당이던 민주당에도 “의장의 도리를 하고 있으니 당신들도 정부에 협력할 건 협력하라”고 압박해 타협을 끌어냈다.
18일 필자와 통화한 정 전 의장은 “당시 야당이던 민주당 의원들은 틈만 나면 ‘국회의장은 중립이 생명이다. 한쪽당 편을 들면 안 된다’고 했다. 그랬던 사람들이 이제는 ‘민주당 편 확실히 들 사람을 국회의장 시키겠다’라니 기가 막히다”고 했다.
국회의장은 의회 민주주의의 최후 보루란 점에선 대통령보다도 중요한 자리다. 그 자리의 격이 문재인 정부 5년 동안 현저히 추락했다. 문 전 대통령은 20대 국회 전반기 의장을 지낸 정세균 전 의장을 문재인 행정부 2인자인 국무총리에 앉혀 국회의장의 위신 실추에 앞장섰다. 정의화 전 의장은 “당시 정세균에 전화해 ‘앞서 국회의장을 한 사람으로 하는 얘기인데, 삼권분립의 상징인 의장이 대통령 밑 총리로 들어가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고 했더니 ‘고사하고 있습니다’고 답하길래 ‘다행입니다’하고 끊었는데 엿새 뒤 총리직을 맡더라. 허탈했다”고 회고했다.
정세균 의장 다음 국회 수장이 된 문희상(전)·박병석 의장도 결정적 고비마다 여당인 민주당에 끌려다녀 국회의장의 위상을 계속 떨어뜨렸다. 문 전 의장은 민주당이 제1야당인 자유한국당(국민의힘 전신)을 배제한 채 군소정당들과만 밀어붙인 ‘4+1’ 선거법 개정안을 통과시켜줬다. 정의화 전 의장은 “문 의장이 민주당에 ‘여야 합의안 갖고 와야 상정하겠다’고 버텼다면 제1야당이 빠진 선거법 개정이란 최악의 사태를 막을 수 있었을 것”이라고 했다. 그는 “박병석 현 의장도 ‘검수완박’ 입법 과정에서 의장의 책무를 저버렸다”고 비판했다. 여야 동수(3대3)로 구성된 안건조정위원회를 민주당이 ‘탈당’ 꼼수로 4대2로 만들고, 회기 쪼개기로 야당의 필리버스터를 강제종료시킨 데 제동을 걸어야 할 소임을 방기해 국회의장 흑역사에 일조했다는 것이다.
그 박 의장도 29일 2년 임기를 마치고, 민주당 의원 가운데 후임 의장이 선출된다. 5선 김진표·이상민·조정식 의원과 4선 우상호 의원이 4파전을 벌이고 있는데 이상민 의원 외에 전원이 국회의장의 중립 의무를 팽개치고 ‘대 윤석열 정부 투쟁’을 슬로건으로 내세우고 있다. 막장도 이런 막장이 없다. 후보들이 민주당을 장악한 ‘이재명 세력’의 눈치를 보는 데 급급한 탓이란 게 중론이다. 167석 중 70~90명으로 추산되는 친명(이재명)계 의원들의 표가 승부를 가를 터인 데다 10만 명 넘게 입당했다는 ‘개딸’(2030 이재명 지지 여성) 등 친명 강성 당원들의 입김을 의식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란 거다. 이재명 대선 캠프에서 본부장급 중책을 맡았던 우상호·조정식 의원이 친명계의 지원 속에 선두로 떠오른 이유다.
반면 당내 최다선이자 최고령(75세) 의원으로 예전 같으면 무난히 국회의장이 됐을 김진표 의원은 2018년 8·25 전당대회 당시 여배우 스캔들 등을 이유로 이재명 경기지사의 탈당을 촉구한 과거 때문에 친명들의 공격을 받으며 고전하고 있다. 민주당 내에선 “‘이재명 세력’이 비대위 구성과 지방선거 공천에 이어 국회의장 선출까지 좌지우지한다”는 한숨이 나오지만, 친명 당원들이 두려워선지 대놓고 반발하는 목소리는 없다.
국회의장을 한다면서 국회 아닌 민주당에 충성하겠다는 궤변을 거리낌 없이 쏟아내는 후보들 가운데 이상민 의원만 바른 목소리를 내고 있다. 그는 “의장이 되면 특정 정파에 좌우되지 않고 여야의 견제와 균형이 작동되게 하겠다”고 선언했다. 선수를 합치면 19선에 달하는 4명 후보 가운데 이 의원 한 명이나마 국회의장의 덕목에 부합하는 행보를 하는 걸 위안 삼아야 하나. 참담하기 그지없다.
강찬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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