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정무의 그림세상] 모네의 수련, 도전의 완성
모네는 인상파의 개척자이자 마지막 증언자이다. 인상파라는 용어 자체가 그가 1872년에 그린 ‘인상, 일출’에서 왔다. 모네는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실험을 멈추지 않았다. 86세까지 장수한 그가 생을 다하는 순간까지 열중한 작품은 수련 연작이다.
수련은 밤이 되면 꽃잎을 오므렸다가 낮이 되면 꽃을 피우기에 ‘잠자는 연꽃(睡蓮)’이라고 불린다. 모네는 1889년 파리박람회에서 이 꽃을 처음 보고 수려한 자태와 그것이 발산하는 은은한 향기에 매료돼 자기 집 연못을 수련으로 가득 채운다. 그리고 이 꽃을 주제로 연속적으로 그려나간다. 해바라기가 반 고흐의 꽃이라면, 수련은 모네의 꽃이다. 그만큼 수련은 모네의 삶을 웅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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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상파의 시작과 마지막
수련 연작에 몰두한 모네
노년의 고통 예술로 승화
고결한 꽃망울로 피어나
」
지금 모네의 수련을 가까운 거리에서 만날 수 있다. 고 이건희 삼성 회장의 기증 1주년 기념전이 열리는 국립중앙박물관에서다. 국내 공공박물관에 소장된 최초의 인상파 대작이기에 기증 당시에도 화제가 됐다.
전시된 그림에서 모네는 물 위에 어린 그림자를 그려내고 있다. 자세히 보면 그림의 왼쪽은 구름이고, 오른쪽은 나무 그늘이 차지하고 있다. 모네는 수련 연작마다 이름을 붙여 개별화시켰는데, 이런 관점에서 보면 이 작품은 ‘수련-구름’, 또는 ‘수련-나무그늘’로 불려야 할 것 같다. 그림 오른쪽 아래 자리한 여섯 송이 꽃망울로 미루어 보면 수련이 막 발화하는 6월의 풍경 같아 ‘수련-6월’이라는 이름도 생각해 볼만하다.
아직은 가설 단계로 조심스럽지만, 이 그림은 모네가 프랑스 정부에 기증한 ‘수련 대장식화’ 중 1전시실에 있는 ‘수련-구름’의 좌측 부분과 거의 일치하는 구도를 보여준다. 두 그림을 나란히 놓고 보면 구름과 나무그늘이 만나는 선의 흐름이 일치한다.
물론 차이점도 있다. 프랑스 파리 오랑주리 미술관에 소장된 그림은 강한 빛에 의해 명암대조가 강조됐지만, 국립중앙박물관에 전시 중인 수련은 빛이 부드럽게 화면을 감싸면서 세부가 더 강조돼 있다. 구도로 보면 거의 쌍둥이 그림 같은데, 이 같은 주장이 학계에 받아들여진다면 지금 우리가 보는 모네는 파리 오랑주리의 예처럼 ‘수련-구름’으로 불러야 할 것이다.
모네에게 수련의 의미를 짚어본다면 크게 두 가지를 들 수 있다. 첫 번째는 모네 개인의 전기적 의미이고, 둘째는 그것이 이뤄낸 미술사적 의미이다. 노년의 모네는 엄청난 시련을 연속해서 맞이한다. 1908년부터 시력을 상실하고, 1911년에는 그를 돌봐주던 부인 알리스가 죽는다. 급기야 그가 의지하던 큰아들마저 1914년에 잃고, 곧이어 터진 1차 세계대전으로 그는 절망과 공포의 시간을 보낸다.
모네는 1908년부터 위기의 늪에 빠지면서 근 10년간 별다른 성과를 내지 못한다. 어쩌면 허무하게 생을 마감할 수도 있던 절망의 순간에 그를 다시 화가로 일으켜 세운 것이 바로 이 수련 연작이다. 그는 수련 그림을 대규모 연작 벽화로 그려 작품세계를 완결 짓고, 그것을 불멸의 명작으로 국가에 헌정하겠다는 집념으로 다시 붓을 잡는다.
모네가 1918년부터 생을 다하는 1926년까지 혼신을 다해 그려낸 그림 중 한 점이 바로 지금 국립중앙박물관에 나와 있다. 그가 이른 나이에 그린 ‘인상-일출’과 비교해보면, 인상파의 마지막 단계를 목격할 수 있다. 수련에서는 인상파 초기의 흐릿한 형태마저도 사라지고 빛과 색채가 더 대담하게 화면을 채우고 있다. 인상파는 대기변화의 시각적 관찰로 시작하지만 모네는 그것의 최종 목적지에서는 심리적 재현으로 대상을 재탄생시키고 있다. 그래서 이 그림은 수련이 있는 연못의 잔물결을 상상하면서 봐도 좋고, 그저 모네의 손길로 빗어낸 물감과 붓 터치의 향연으로 생각하면서 감상해봐도 좋다.
결과적으로 모네의 수련은 인상파의 최종 단계이자 현대미술의 시작을 보여주는데, 아마도 20세기 현대미술을 대표하는 미국 추상표현주의의 색면 추상화와 나란히 전시해 놔도 그 전위성이 조금도 뒤처져 보이지 않을 것이다. 어쩌면 모네는 보다 긴 삶을 산 덕분에 동료 인상파 화가인 반 고흐나 쇠라가 완성하지 못한 인상파의 최종 단계를 구현할 수 있었다. 물론 그것은 진흙 속에서 맑은 꽃을 피워내는 수련같이 고통스러운 삶을 배경으로 하지만 그 결과는 수련의 꽃망울처럼 고결하다.
이런 모네의 수련 한 점이 지금 우리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머지않은 미래에 이 그림이 상설전으로 자리 잡아 언제든 우리에게 현대미술의 깊은 맛을 느끼게 해줬으면 좋겠다는 바람이다.
양정무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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