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릿느릿 걷던 아버지, 망명 신청 노인.. 이런 장면들에서 노벨문학상이
『낙원』 『바닷가에서』 『그후의 삶』 동시 출간
"이 시대에 문학이 필요한 이유요? 사람을 사람답게 만드는 게 문학이라고 생각합니다"
지난해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탄자니아 출신 작가 압둘라자크 구르나는 이렇게 말했다. 대표작인 『낙원』(1994)과 최신작인 『그후의 삶』(2020년) 등 그의 장편소설 세 권이 한꺼번에 번역 출간돼 이뤄진 18일 온라인 기자간담회에서다. 전쟁·기후변화 등 최근 위기 상황에 대해 그는 "모든 시대에는 저마다 위기가 있었지만 인간 사회는 그걸 저마다 대처하며 살아왔다"고 낙관하며 "그 과정에서 문학은 다른 사람의 생각과 행동방식을 이해할 수 있게 하고, 사람을 사람답게 만든다고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구르나는 1993년 미국의 토니 모리슨 이후 노벨상을 받은 첫 흑인 작가다. 아프리카 작가로는 여섯 번째였다. 『낙원』이 출간되던 해 영국 최고 권위의 부커상 후보에 오르며 일찌감치 문학성을 인정받았지만 영미권 시장에서도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지진 않았었고, 지난해 노벨문학상 발표 당시 국내에 번역되거나 원서로 소개된 작품조차 한 권도 없었다.
"'동아프리카'보다 더 넓은 영역… 역사적으로, 동시대적으로 그리고 싶다"
구르나는 1948년 아프리카 동쪽 탄자니아의 자치령 섬 잔지바르에서 태어났다. 인도계 후손으로 이슬람교를 믿는 그는 아프리카에서도 탄압받는 소수에 속했다. 잔지바르가 스페인·오만·영국의 지배를 거쳐 63년 독립하지만 한 달 만에 흑인 혁명주의자들이 주도한 '잔지바르 혁명'이 터지면서, 아랍·아시아계·혼혈 아프리카인들은 공격과 탄압의 대상이 된다. 구르나는 이때를 "공포의 시간"이라고 회상했지만, 다니던 학교가 폐쇄되고 나서야 68년 잔지바르를 떠나 학생비자로 영국으로 갔다. 식민지배 하에서 영어를 익힌 덕에 이듬해부터 영어로 소설 습작을 시작했고, 학업과 연구, 집필활동을 평생 병행했다. 82년 켄트대에서 '서아프리카 소설 비평의 척도'로 박사학위고 이듬해 영문학 및 탈식민문학 교수로 부임한 그는 2017년 퇴임한 뒤 현재는 명예교수직을 유지하고 있다.
지난해 노벨문학상 선정위원회 안데르스 올슨 위원장이 "동아프리카에서 뿌리가 뽑혀 이주하는 개인들의 삶에 대한 식민주의의 영향을 시종일관 연민을 갖고 천착했다"고 밝힐 정도로, 구르나는 자신이 떠나온 아프리카의 식민지배 시절과 사람들, 그 이후에 대해서 꾸준히 글을 써왔다. 그는 "동아프리카와 유럽 식민주의가 만나는 장면을 이야기하고 싶었다"며 "'동아프리카'로 명명하기 어려울 정도로 더 넓은 영역을 아우르는 언어, 종교, 문화 등을 더 쓰고 싶고, 역사적으로, 동시대적으로 그려내고 싶다"고 말했다.
"아이디어가 나에게 온다"는 구르나… 50년간 정체기도 없었다
50년 넘게 글을 써왔지만 “정체기가 없었거나, 혹은 왔더라도 알아채지 못했다”는 구르나는 “대부분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쳤기 때문에, 다음에 뭘 쓸지 생각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오히려 논문 쓰는 게 어려웠다”고 했다. 노벨상 이후 달라진 점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궁금해하게 된 것뿐, 글 쓰고 정원을 가꾸고 가족과 친구를 챙기는 일상은 똑같다고 말했다.
그는 “내가 주제를 마음먹는 게 아니라, 아이디어가 나에게 온다”고 말했다. '계속 맴도는 한 부분'을 곱씹다 소설이 된다고 했다.
잔지바르에서 늙고 병든 아버지가 천천히 모스크로 걸어가는 모습을 보며 ‘잔지바르에 식민 지배가 시작되던 때, 어린이였던 아버지의 경험은 어떤 것이었을까’ 같은 궁금증에서 10년 뒤 소설 『낙원』으로 태어났다고 했다. 아프간 전쟁 당시 납치돼 영국 런던에 도착한 아프간 국내선 여객기의 수많은 승객들 전부가, 긴 수염 백발의 노인을 포함해, 다음날 망명신청을 했다는 이야기를 접하고, ‘갑자기 마주한 아무것도 모르는 나라에 망명 신청을 하는 사람들은 무슨 생각을 한 것일까?’ 하는 궁금증이 소설 『바닷가에서』로 확장됐다고 밝혔다.
백인·흑인 위주 해석 벗은 '찐 현지인' 그려내
구르나의 소설 세계는 유럽 백인의 시각으로 그려지던 '환상적인 아프리카'나 흑인의 시각으로 그려지던 다소 빤한 '수탈의 역사'와도 방향성이 다른 독특한 시야를 확보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아왔다. 작가 본인은 "20세까지 아프리카에서 살며 정체성을 확립한 뒤 영국으로 이주해, 외부에서 모국을 돌아볼 수 있게 된 덕"이라고 스스로 분석한 바 있다.
아프리카에 거주하는 다양한 사람들의 현실을 당사자의 시선에서 묘사해 내는 그는 소설에는 독일어·아랍어·스와힐리어가 수시로 나온다. 실재하는 다양성을 독자의 눈앞에 들이미는 장치다. 구르나는 "잔지바르에서 자랄 때, 길을 걷다 보면 무슬림의 모스크, 힌두교 사원, 기독교 성당, 무속 신앙의 기도원을 모두 볼 수 있었다"며 "그래서 일상적인 대화에 다양한 언어가 조각조각 등장하는 게 자연스러웠다"고 했다. 왕은철 교수는 "백인들에게서도, 흑인들에게서도 소외당하는 아프리카의 아랍인·인도인·아시아인의 현실을 환상이나 감상에 젖지 않고 그대로 묘사한다"고 평했다.
"문학은 재밌어야 한다… 시간 없으면 최신작 '그 후의 삶' 추천"
그의 책은 미국·영국·프랑스에서는 물론 인도어·타밀어(인도 남동부 언어)·러시아어·우크라이나어로도 번역 출판됐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아직 그의 모국어인 스와힐리어로는 번역되지 않았다. 『그 후의 삶』은 2019년 해리포터 20주년 개정판을 번역한 강동혁 번역가, 『바닷가에서』는 시인 황유원, 『낙원』은 왕은철 교수가 각각 번역했다.
구르나는 문학은 무엇보다 "재밌어야 한다"고 했다. "누가 내 이름을 잘못 발음하는 경우가 셀 수 없이 많은데, 그때마다 '이름이 무슨 소용이야'(『로미오와 줄리엣』의 한 구절)라고 속으로 생각한다"며 "이렇게 암호를 숨겨놓고 발견하는 재미, 뉴스나 공부가 아니기 때문에 읽는 재미가 중요하다"고 설명했다. "(한국에 출간되는) 세 권을 다 읽는다면 출간 순으로, 시간이 없다면 최신작부터 읽으라"고 추천하며 "내 책이 한국 독자들에게 울림을 줄 수 있다면 작가로서 매우 기쁠 것 같다. 다른 사람의 삶을 읽으며 내 삶에 대해 말할 게 생기는 게 문학의 힘이라고 생각한다"고 했다.
"인간은 괴물 같다"면서도… "따뜻함 잊지 않길"
그가 책을 통해 비판한 국가간 폭력과 비이성은 현대에도 계속된다. 구르나는 "영국 사회도 인도·파키스탄·시리아 등으로 대상은 바뀌지만 몇 년 주기로 외국인이나 난민에 대한 사회적인 공황 상태에 빠진다"며 "우크라이나 사태처럼 비이성적이고 불합리한 상황을 멈추지 못하고, 작은 도발에도 폭력을 행하는 걸 보면 인간은 괴물 같다"라고도 했다.
"폭력·전쟁으로 삶이 위태로울 때 친절의 의무도 생기는 것"이라며 "인간의 잔혹함, 불공정함, 부당함에 대해 이야기하는 동시에, 따뜻함, 사랑, 친절도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덧붙였다.
김정연 기자 kim.jeongyeo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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