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위대한 알코올중독자'<5>] 주취 살인

데스크 2022. 5. 18. 1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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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주> 우리나라는 음주공화국이라 할 만큼 음주에 관대한 사회입니다. 반면, 술로 인한 폐해는 매우 심각합니다. 주취자의 강력범죄가 증가하고 알코올중독자가 양산됩니다. 평화로운 가정과 사회가 풍비박산나기도 합니다. 술 때문에 고통 받는 개인과 가정, 나아가 사회의 치유를 위해 국가의 음주·금주정책이 절실하게 요청됩니다. 술은 야누스의 얼굴을 가졌습니다. 항상 경계해야 하는 마음으로 이 소설을 들려드립니다.


제5화 주취 살인


변동원이 분노의 추격전을 벌이느라 터질 것 같았던 심장을 간신히 추스르며 거실 바닥에 나뒹구는 양주병을 들고 나발을 불었다. 입안에 양주가 콸콸 쏟아져 들어가자 혀뿌리가 얼얼하더니 곧이어 식도를 타고 짜릿한 알코올 기운이 뱃속으로 들어왔다. 변동원은 등산화를 신은 발로 냉장고를 차서 문을 열고 소주 두 병을 챙겨 배낭 안에 쑤셔 넣었다. 집을 나선 변동원은 어두운 골목길을 따라 주택가 뒷산으로 오르는 길을 찾아 묵묵히 걸었다. 제법 먼 산길을 걸어서 숨은 가빴지만 머릿속이 맑아지고 마음이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이 모든 게 술 때문에 벌어진 일이라고, 술이 아니었으면 이런 어처구니없는 일은 절대로 없었을 거라고 변동원은 생각했다. 물론 자신이 법 없이도 살 수 있을 만큼 착한 인간이 아니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이렇게까지 막나가는 인생은 결코 아니었다. 끓어오르는 혈기와 바람기를 주체하지 못해 여성편력을 일삼거나 여성들을 너무 사랑한 나머지 이런저런 폭력을 행사하기는 했지만 오늘처럼 살인을 저지를 정도로 대책 없는 인간은 아니었다.


신예지에 대한 감정만 해도 그랬다. 이 세상 어떤 미친놈이 어느 날 갑자기 사랑하는 여자가 떠나겠다고 선언한다 해서 ‘그래, 잘 가’ 한단 말인가. 사랑하기 때문에 보내줄 수 없는 거야 인지상정이고, 그래서 보고 싶은 마음에 하루에도 수십 번씩 전화를 해대는 것은 사람이라면 응당 그럴 수 있는 일이었다. 그런데 신예지가 아예 전화를 ‘생까’버리니 변동원은 사람으로서 어떻게 이럴 수 있나 싶어 분노가 치밀어 오른 것이었다.


어떤 이는 말하기를, 헤어지자는 여성을 붙잡아두고 보내주지 않거나 여성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건 사랑해서가 아니라 잡아놓은 물고기로 취급하기 때문이며, 또한 살을 맞대고 산 세월이 얼만데 어쩌고저쩌고 하는 건 그 세월에 쌓인 애증 같은 정리를 의미하는 게 아니라 마치 정복자로서 여성 위에 군림하려는 심리일 뿐이라는 것이었다. 이에 대해 변동원은 ‘그건 네 생각일 뿐’이라고 일축하고는 자신은 결코 여성을 소유물로 취급한 적이 없고 시종일관 하나의 인격체로 대했다고 목에 핏대를 올리며 말했다.


여성에 대한 생각이 그릇되고 여성을 바라보는 관점이 삐뚤어졌다한들 변동원이 여자 때문에 살인까지 할 정도는 아니었다. 그 놈의 술만 아니었으면 말이다. 무릇 술은, 슬픔에 젖은 사람은 더 깊은 슬픔에 잠기게 하고 분노에 젖은 사람은 더욱 강렬한 분노에 떨리게 하며 심약한 사람에게는 용맹함을 넘어서는 만용을 안겨주고 평소 생각이 진중한 사람은 한없이 단순하게 만들어주는 희한한 물질이었다. 그래서 예로부터 사람들은 술을 일컬어 신비의 물이자 묘약이라 했고 심지어 마약이라고까지 했었다.


변동원은 오늘도 어김없이 오전부터 신예지에게 전화를 해댔으나 신예지는 오늘도 어김없이 전화를 받지 않았다. 변동원은 서서히 달아오르는 신경질을 삭이려 점심식사 시간에 반주 몇 잔을 곁들였다. 반주는 서서히 음주로 변주되었고 추적추적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비와 술은 서로 상승작용을 일으켰다. 변동원은 오후 업무를 전폐하고 내처 술을 마셨다. 술을 마시면서 신예지에게 전화를 걸었고, 전화를 받지 않으면 분노게이지가 한 칸씩 상승해가는 악순환이 되풀이되었다. 취기가 오를수록 변동원은 자신을 무시하는 신예지에 대한 분노가 임계점에 다다른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변동원은 회사를 조퇴하고 집으로 갔다. 등산복 차림에 하이킹 배낭을 메고 창이 좁은 검정색 모자를 눌러쓰고 보니 마치 영화 실미도에 나오는 설경구와 흡사했다. 변동원은 날이 잘 선 등산용 칼을 면도하듯 뺨에 몇 번 문지르고는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취중이었지만 거사를 앞둔 변동원의 두뇌는 빠르게 회전했다. 직접 차를 몰고 가는 건 음주운전 단속에 걸릴 위험이 있으니 피한다. 택시를 타고 가서 큰 대로변에 내려 CCTV를 피해 신예지의 집까지 걸어간다.


변동원은 이미 몇 번이나 신예지의 집을 찾아갔기에 지형지물을 완벽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당시에도 거사할 생각을 안 해본 건 아니지만 술이 부족해서인지 도무지 용기가 나지 않았었다. 하지만 오늘은 비와 술과 분노가 잘 배합되어 서로 밀어주고 당겨주면서 시너지 효과를 엄청 불러일으켰다. 한 마디로 사고치기 딱 좋은, 머리가 단순해지기 그지없는 날이었다.


비와 함께 어둠이 내리자 골목이 한결 을씨년스러워졌다. 변동원은 골목 끝에서 우산을 쓰고 신예지의 집을 예의주시하며 틈틈이 주머니에서 소주 팩을 꺼내 마셨다. 거의 한 시간을 기다렸을까. 소주 두 팩을 마시고 났더니 이윽고 신예지의 어머니가 퇴근해 와서는 우산을 쓴 채 대문 열쇠를 찾느라 잠시 머뭇거렸다.


“조용히 문 열어!”


변동원이 재빠르게 다가가 신예지의 어머니 목에 칼을 들이대고 위협했다. 신예지 어머니는 뒤돌아보려고 고개를 돌리다가 목덜미에 닿는 차가운 금속성 물질에 그만 얼어붙고 말았다.


“집에 누구 있어?”


“아들이 있어요.”


대문 안으로 들어서서 변동원이 문을 잠그고 묻자 신예지 어머니가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녀는, 실제로 대학을 졸업하고도 백수로 빈둥빈둥하는 아들이 집에 있어서 사실대로 말한 측면도 있지만 그것보다는 집에 아들이 있다고 하면 등 뒤의 칼 든 남자가 범행을 포기할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을 갖고 답한 것이었다.


그러나 변동원은 아랑곳하지 않고 아들이 있는 곳으로 가자며 신예지 어머니의 목에 칼금을 그었다. 신예지 어머니는 섬뜩하도록 차가운 느낌에 피가 나는 줄도 모르고 오금을 저렸다. 변동원은 제자리에 멈춰선 채 걸음을 떼지 못하는 신예지 어머니의 눈앞에 핏빛이 선명한 칼을 들이밀었다. 신예지 어머니가 나무토막처럼 굳은 다리를 힘겹게 옮겨 아들의 방문을 열었다. 만취해서 새벽녘에야 집에 들어온 아들은 침대 위에 드러누워 코를 골고 있었다.


신예지의 어머니는 평소 애물단지처럼 여겨 상종도 않던 아들이지만 이 순간만은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아들이 일어나기만 한다면 칼 든 남자에게서 자신을 구해줄 것만 같아 죽을힘을 다해 고함을 질렀다. 하지만 마음만 앞설 뿐이었는지 아니면 얼어붙은 마음 때문이었는지 분명 소리를 질렀는데 소리가 나오지 않는 기현상이 벌어졌다. 다만 목구멍에서 바람이 빠지는 소리가 픽, 하고 났을 뿐이었다. 신예지 어머니는 식도 쪽을 칼에 베여 피를 뿜으며 앞으로 고꾸라졌다. 그리고 변동원의 칼은 지체하지 않고 정확하게 아들의 심장에 가서 푹 꽂혔다.


“여보, 나 왔어.”


신예지의 아버지는 그로부터 30분쯤 지나 퇴근해 돌아왔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며 피곤에 지친 늙은 가장의 목소리가 거실에 울려 퍼졌다. 변동원은 공장 작업복 차림의 늙은 가장이 안전화를 벗어 신발장에 넣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천천히 현관 쪽으로 다가갔다. 늙은 가장은 피곤에 젖은 기색이었으나 김이 모락모락 나는 밥과 국을 마주할 생각에 잠시 따뜻한 눈빛을 보였다. 정말이지 법 없이도 살 수 있을 만큼 선한 눈빛이었다. 늙은 가장은 낯선 불청객을 보자 너무 놀란 나머지 입을 벌린 채 미동도 하지 못했고 변동원의 칼은 연습용 샌드백을 찌르듯 무방비 상태의 늙은 가장을 무참하게 난도질했다.


박태갑 소설가 greatop@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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