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단심'에서 빠진 사림파의 진짜 힘 [김종성의 사극으로 역사읽기]

김종성 2022. 5. 18. 1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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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성의 사극으로 역사읽기] KBS2 <붉은 단심>

[김종성 기자]

 KBS2 <붉은 단심>의 한 장면.
ⓒ KBS2
 
KBS <붉은 단심>을 포함해 16세기 초중반을 다루는 사극들에서 흔히 생략되는 것이 있다. 연산군·중종·인종·명종이 재위했던 이 시대의 여론을 주도한 집단이 역사적으로 '신종 집단'이었다는 점이 거의 모든 사극에서 조명되지 않고 있다. 이들의 존재를 제대로 다루지 않고 중앙 정치인들의 권모술수만으로 이 시대 정치가 운영된 듯이 묘사하는 드라마들이 상당수다.

이 시대는 재야와 야권에 포진한 사림파(유림파)가 훈구파로 불리는 구세력에 맞서 권력투쟁을 벌이던 시기다. 이 투쟁은 1567년 선조 임금의 즉위와 함께 사림파의 승리가 확정되면서 종결됐다.

연산군의 아버지인 성종 때부터 중앙 정계에 본격 등장한 사림파는 1516년부터 1519년까지 4개년 동안 조광조를 앞세워 일시적으로 정권을 유지했다. 조광조 실각 뒤에 오랜 시련을 겪으며 투쟁하던 이들은 1567년 집권을 계기로 훈구파를 역사무대에서 추방했다. 이때부터 1910년 일제 강점까지는 이들과 그 후예들이 나라를 이끌어간 기간이다.

사림파와 그 계승자들이 몰락한 뒤에 이 땅을 지배한 일본제국주의는 직전 지배층인 사림파를 나약한 선비 집단으로 매도했다. 탁상공론 식의 당쟁이나 벌이고 실생활과 무관한 고루한 일에나 신경을 쓰는 쓸데없는 선비들로 폄하했다.

사림파도 조선 후기에 가서는 크게 타락했고 무엇보다 일제에 나라를 빼앗겼으니, 이들이 비판을 받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당쟁이나 벌이는 고루한 집단으로 매도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이들의 토론 문화가 당쟁으로 폄하되고 이들의 철학적 통찰력이 고루함으로 저평가된 측면이 많기 때문이다.

무시할 수 없는 사실은, 처음 등장할 때는 이들이 건전한 세력이었다는 점이다. 그것이 그들의 집권을 가능케 해주었다.

사림파의 이색적인 특질
 
 KBS2 <붉은 단심>의 한 장면.
ⓒ KBS2
 
이들은 대체로 중소 규모 토지를 보유한 지주계급이었다. 이들 모두가 지주였던 것은 물론 아니다. 하지만 대체로 그랬다. 어머니나 아버지가 지주가 아니면 자기 문중이 지주인 사람들이었다. 부모가 지주가 아닐지라도 문중이 지주 가문이면 가문 어른들의 후원을 받아 과거시험을 준비하거나 성리학을 연구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이들은 지주계급의 이익을 대변할 수밖에 없었다는 점에서는 이전 시대 지배층과 다를 바 없었다. 하지만, 이색적인 특질이 있었다. 이들은 외형상, 유교 철학자인 성리학자들로 비쳐졌다. 지주계급보다는 철학자의 외관을 더 많이 드러냈다는 점에서 역사적으로 새로운 집단이었다.

이들이 철학자들로 비쳐질 수밖에 없었던 것은 이들이 연구하는 성리학이 종전의 유교·유학과 달리 철학적 색깔을 농후하게 띠었기 때문이다. 맹자나 공자 같은 초기 유학자들이 정치학자나 윤리학자에 가까웠다면, 이들은 석가모니의 특성까지 겸비한 철학자에 가까웠다.

유교에 철학을 가미해 신유학을 발달시킨 송나라 유학자들의 상당수는 불교를 연구한 경험이 있었다. <주자문집>에 따르면 성리학의 대가인 주자는 15세부터 24세까지 불교 연구에 전념했었다. 당대의 저명한 유학자들인 주렴계·장횡거·왕안석·정명도·정이천·육상산 등도 불교 전문가들이었다.

맹자나 공자보다는 석가모니가 철학적으로 더 깊었기 때문에, 유학자들이 철학적 사유를 갖추려면 불교를 연구하는 수밖에 없었다. 유교가 불교의 힘을 빌려 성리학을 발달시킬 수밖에 없었던 것은 그 때문이다.

신유학 이전의 유학자들은 신독(愼獨)의 독(獨)을 '남은 모르고 나만 아는 상태'로 이해했다. <중용>의 "군자는 홀로 있을 때를 삼간다(君子愼其獨也)"라는 문장을 근거로 하는 신독을 그렇게 해석했다.

그러나 주자의 제자인 성리학자 진식(陳埴)은 '남도 모르고 나도 모르는 상태'로 '독'을 이해했다. 일종의 무의식이나 잠재의식 상태로 봤던 것이다. 이처럼 진식 같은 성리학자들은 무의식 상태에서 수행하는 것을 신독으로 이해했다. 인도 대승불교 분파인 유식학파는 무의식 영역을 아뢰야식(阿賴耶識)으로 명명했다. 이런 불교철학 개념이 신유학자들의 사유에 나타났던 것이다.

욕망은 감추고 철학적 방법으로 공격

오늘날 대한민국을 경제적으로 지배하는 대규모 부동산 소유자들은 욕망을 노골적으로 표현한다. 이들은 '종부세를 인하하라', '경제를 망치려는 건가', '우리를 압박하면 세입자들이 힘들어질 것이다(우리가 받는 압박을 세입자들에게 전가시킬 것이다)' 등등의 목소리를 내기까지 한다. 너무 저차원적인 목소리를 내기 때문에 다(多)부동산 소유자들은 사회적 존경을 받지 못한다.

그에 비해 사림파들은 지주계급으로서 물질적 이익을 추구하면서도 욕망을 최대한 감췄다. 이들은 '도(道)에 대한 억압의 수준을 인하하라', '천리를 망치려는 건가'. '우리를 압박하면 도(道)가 힘들어질 것이다'라는 식으로 욕망을 순화시켜 정치적 목소리를 발산했다.

또 상대 진영을 공격할 때도 도(道)의 개념을 운운하며 철학적 방법으로 공격했다. 정치적 공격을 가할 때도 구체적인 정치적 쟁점을 언급하기보다는 상대방의 근원적 문제점을 비판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 세상에 철학적·근원적 문제가 없는 사람은 단 하나도 없으므로, 그런 식으로 공격하면 상대편은 문제 있는 사람들로 비쳐질 수밖에 없었다. 이런 식의 정치투쟁을 벌이는 선비들이 중소 규모의 부동산까지 보유하고 있어 함부로 대하기도 힘들었으니, 이들을 상대했던 구세력이 얼마나 난감했을지 짐작할 수 있다.
 
 KBS2 <붉은 단심>의 한 장면.
ⓒ KBS2
 
이런 유형의 여론 주도층이 15세기 후반부터 현저해졌다. 지방과 중앙 곳곳에서 이들의 여론이 공론(公論)이라는 이름으로 형성됐고 이것이 조정의 국정 운영에 영향을 미쳤다. 그래서 <붉은 단심>의 시대적 배경인 16세기는 이들을 빼놓고는 정치 현상을 논하기 힘든 시대였다.

지방의 경우에는 수령 자문기관인 유향소, 과거시험 소과 급제자인 생원과 진사들이 모이는 사마소(司馬所), 일종의 공립학교인 서원 등을 매개로 사림파의 여론이 형성됐다. 한양의 경우에는, 성리학적 소양이 깊은 관료들이 배치되는 사헌부·사간원·홍문관 삼사가 사림파 여론을 반영해 임금에게 전달했다. 미래의 관료집단인 성균관 유생들 역시 그런 여론의 형성과 전달에 관여했다.

그렇기 때문에 16세기 초중반의 권력자들은 사림파가 가하는 압력을 의식하고 그에 대처하지 않을 수 없었다. 더군다나 <붉은 단심>의 박계원(장혁 분)처럼 임금까지 억누르면서 권력을 행사하는 정치인들은 더욱 더 그래야 했다.

이 시대는 <붉은 단심>의 박계원처럼 임금과 한양 관료들을 카리스마로 억누르는 방법만으로 권력을 유지할 수 있는 시절이 아니었다. 경제적으로 가장 풍요한 전라·경상·충청·경기 지역 사림파들과의 역학관계나 그들의 여론에 대처하지 못하면 최고 권력을 유지하기 힘든 시대였다. <붉은 단심>의 박계원은 지나치게 단순한 방식으로 정권을 유지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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