억압과 공포의 기억, 낙원에서 잠들다

김희윤 입력 2022. 5. 18. 1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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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앙드레 지드는 "한 편의 작품 속에는 작가의 몫과 독자의 몫, 그리고 신의 몫이 있다"고 했다.

PO KIM(포 킴, 한국이름 김보현)의 캔버스에 투영된 풍경에는 현실을 외면했던 신의 무심함과 이에 신음하는 작가의 공포가 녹아있다.

2014년 97세로 별세하기 이틀 전까지 붓을 놓지 않았던 작가의 생애는 자유에 대한 갈망과 디아스포라적 삶이 얽힌 색채로 작품 속에서 숨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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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 킴 '지상의 낙원을 그리다' 학고재 갤러리
뉴욕서 활약한 1세대 한인화가
고유의 추상세계 그린 23점 전시

[아시아경제 김희윤 기자] 소설가 앙드레 지드는 “한 편의 작품 속에는 작가의 몫과 독자의 몫, 그리고 신의 몫이 있다”고 했다. PO KIM(포 킴, 한국이름 김보현)의 캔버스에 투영된 풍경에는 현실을 외면했던 신의 무심함과 이에 신음하는 작가의 공포가 녹아있다.

일제강점기인 1917년 경남 창녕에서 태어난 작가는 일본에서 고학으로 미술공부를 마치고 해방 이듬해에 조국에 돌아왔다. 조선대 미술대학 설립에 참여하며 후학양성에 매진하던 작가는 여순 사건과 한국전쟁을 거치며 때로는 좌익으로, 때로는 우익으로 몰리며 이념대립으로 극심한 고초를 겪는다.

어둠 속에 구금돼 이유 모를 고문을 당하는 동안 작가는 이러다 내가 죽을 수도 있겠다는 공포에 사로잡힌다. 정전이 찾아왔지만 그의 공포는 심연에 내려앉아 사라지지 않았다. “경찰에 쫓기는 끔찍한 꿈을 자주 꿨다”는 작가는 1955년 일리노이대학 교환교수로 미국에 간 뒤 그길로 그곳에 정착해 돌아오지 않았다.

포킴의 2003년작 '발리의 기억'. 사진제공 = 학고재갤러리

미국 뉴욕에서 활동한 한인화가 포 킴의 작품 23점을 소개하는 개인전 ‘지상의 낙원을 그리다’가 서울 삼청동 학고재에서 열렸다. 작가는 뉴욕에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한 1세대 한인 화가로 이후 김환기, 김창열, 남관 등 도미한 한국 화가들과 교류하며 다양한 작품을 선보였다.

준비 없이 결정된 미국행이었기에 작가는 넥타이공장에서 패턴을 그리거나 백화점 디스플레이, 집수리 등 생계활동을 이어가며 화업을 포기하지 않았다. 1969년 조각가 실비아 월드와 결혼하며 자신의 이름을 김보현 대신 발음하기 좋은 ‘포 킴’으로 사용하면서 자신만의 창작활동에 매진했다.

“억압과 생명의 위험이라는 과거에서 자유를 갈망하고 있었던 그 당시 추상표현주의가 무엇보다도 내 심리에 가장 적합한 화풍이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던 작가는 자신의 심리상태, 그리고 인습과 전통에 반대하는 폭발적 감정 표현으로 고유의 추상세계를 완성해나갔다. 동양의 수묵화적인 붓놀림과 뉴욕의 밝은 색채가 결합된 그의 작품은 관능적인 표현기법을 구축했다.

포 킴은 1986~88년에 걸쳐 완성한 대작 '파랑새'를 자신이 근무했던 조선대학교에 기증했다. 사진제공 = 학고재갤러리

때마침 뉴욕은 세계 미술의 중심지로 급부상했고, 추상표현주의에 대한 관심도 높아졌다. 작가는 야요이 쿠사마(Yayoi Kusama), 아그네스 마틴(Agnes Martin), 로버트 인디애나(Robert Indiana) 등 뉴욕에서 활동하던 당대 작가들과 가깝게 교류하며 작품의 지평을 넓혀갔다.

그는 후기작에서 동심으로 회귀한 듯한 표현을 통해 낙원을 그려냈다. "고통스러운 그림은 그리고 싶지 않다, 내 자신이 고통을 많이 받았으니까"라는 작가의 생전 회고에는 격동의 역사 속에서 한 개인이 감내해야했던 오롯한 아픔과 죽음에의 공포가 절절히 스며있다.

포 킴의 1992년작 '일곱 개의 머리'. 사진제공 = 학고재갤러리

뉴욕에서의 왕성한 활동에도 조국은 그를 잊고 있었다. 그럼에도 작가는 2005년 아내와 뉴욕 맨해튼에 '실비아 왈드 앤 포 김 아트 갤러리'를 열고 한국 작가를 소개하는 전시를 개최했다. 자신의 작품 다수는 자신이 강단에 섰던 조선대에 기증했다. 한국에서도 예술의전당과 국립현대미술관에서 개인전을 개최하며 말년에 들어서야 그의 작품세계를 조명하기 시작했다.

2014년 97세로 별세하기 이틀 전까지 붓을 놓지 않았던 작가의 생애는 자유에 대한 갈망과 디아스포라적 삶이 얽힌 색채로 작품 속에서 숨쉬고 있다. 신은 자신의 몫을 외면했지만 작가는 창작을 포기하지 않았다. 이제 화폭에 담긴 그의 메시지를 읽는 관객의 몫만이 남았다. 전시는 6월 12일까지.

김희윤 기자 film4h@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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