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소문 포럼] 대통령 잔혹사의 교훈

김형구 2022. 5. 17. 0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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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구 정치에디터

대통령을 국민이 직접 뽑는 ‘87 체제’ 이후 역대 대통령들은 취임 초에 국민과의 거리를 좁히는 데 공을 들였다. 노태우 전 대통령은 대통령 중 처음으로 자신을 ‘저’라 칭했고, 김영삼 전 대통령은 청와대 점심 메뉴로 칼국수를 들었으며, 김대중 전 대통령은 권위주의 유물로 들리는 ‘각하’ 대신 ‘대통령님’으로 자신을 부르라 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초등학생들을 위해 차에서 내려 사인을 해줬고, 이명박 전 대통령은 ‘대통령님~’으로 시작하는 청와대 보고서에서 ‘님’ 자를 빼도록 했다. 박근혜 전 대통령은 대통령 홀로 상석에 앉는 형태의 부처별 업무보고 관례를 깼고, 문재인 전 대통령은 구내식당에서 줄을 서 식판에 손수 음식을 담았다. 다들 탈권위, 애민의 리더십으로 국정을 이끌고자 했던 초심에서 그랬을 것이다.

윤석열 정부 출범 일주일 만에 정권교체를 실감케 하는 장면이 여러 곳에서 목격된다. 윤석열 대통령 부부는 취임식장을 찾은 전직 대통령에게 허리를 굽혀 예를 표했고, 대통령실을 옮긴 용산 청사 인근 경로당과 어린이집에 들러 ‘전입 신고’를 했다. 대통령 출근길에 영부인이 반려동물과 함께 배웅하는 모습도, 대통령실 청사 로비에서 대통령이 취재진과 즉석 문답을 주고받는 모습도 ‘청와대 시대’에선 못 봤던 일들이다.

「 역대 대통령, 취임 초 ‘탈권위’ 노력
하지만 똑같은 잘못에 실패 반복
윤 대통령, 포용·통합의 정치 펴길

윤석열 대통령이 취임 이튿 날인 11일 용산 대통령실에서 열린 수석비서관회의를 주재하며 참모들과 대화하고 있다. [사진 대통령실]

참모들도 모르게 나선 대통령 부부의 휴일 나들이와 백화점 구두 쇼핑도 화제다. 취임 이튿날 대통령실 수석비서관회의에서 “구두 밑창이 닳도록 일해야 한다”고 독려했던 윤 대통령이 참모진과 내각에 던지는 무언의 메시지일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든다.

조금씩 선명해지는 윤 대통령의 국정 스타일은 실천·실력·실용이라는 세 가지 코드로 요약되는 듯하다. 한번 맺은 약속은 고집스럽다는 비판에도 꼭 ‘실천’에 옮기려는 모습이었다. 안보 공백, 관저 리모델링에 드는 시간과 비용 등 숱한 논란에도 “청와대를 국민에게 돌려드리겠다”는 약속은 어찌 됐든 지킨 셈이 됐다. 대선 유세 때 “꼭 다시 오겠다”던 재래시장 등 현장을 실제 취임 후 찾아가기도 했다. 지방선거 개입 논란을 자초하면서도 벌인 ‘약속과 민생’ 행보였다.

윤 대통령의 인선 원칙은 ‘실력’ 제일주의로 모아진다. “실력 있는 사람들을 뽑아 국민을 제대로 모시겠다”는 기조에 따라 성별 할당, 지역 안배 등 인위적 탕평은 후순위가 됐다.

업무 방식은 ‘실용’ 기치를 앞세운다. 원형 테이블에 빙 둘러앉아 진행된 참모 회의에서 윤 대통령은 “복장도 자유롭게 하고, 하고 싶은 이야기도 하라”며 프리 스타일을 외쳤다.

이렇게 달라진 풍경 속에서도 새 정부 출범 때면 으레 겪었던 충돌과 혼란 또한 없지 않았다. 대통령 집무실 이전 과정 등에서 빚어진 신·구 권력 다툼은 노무현 정부와 이명박 정부의 정권 이양기 갈등을 보는 듯 아슬아슬했다. 무엇보다 새 정부에서 회자된 ‘서육남’(서울대·60대·남성) 인사는 과거 이명박 정부의 ‘고소영’(고려대·소망교회·영남), 박근혜 정부의 ‘성시경’(성균관대·고시·경기고), 문재인 정부의 ‘캠코더’(캠프·코드·더불어민주당) 인사 논란과 다르지 않았다. 대통령실 요직에 초등학교·고등학교·대학교 동문들을 기용해 정실 인사 논란을 부른 것도 그렇다. 대통령실의 돈줄과 살림 등을 관장하는 비서관·부속실 등 문고리 권력을 검찰 출신으로 채워 ‘대검 출장소’ 논란을 낳았다. 공무원 간첩 위조 사건으로, 과거 성 비위로 정직 또는 경고를 받은 인사들이 서초동 인연으로 대통령실에 발탁되니 공정과 상식이라는 국정 운영 기조가 무색해졌다.

대선 당시 윤석열 후보를 도왔다가 결별한 김종인 전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은 2020년 회고록 『영원한 권력은 없다』를 집필한 이유로 ‘반복되는 역사의 기시감’을 들었다. 호기롭게 출범했다가 똑같은 잘못으로 허망하게 무너지는 것을 반복해 온 과거 정권을 돌아보며 노정객은 책에서 깊은 한탄을 했다.

되풀이되는 불행의 고리를 끊기 위해 그가 제시한 해법은 상대편을 껴안는 포용, 결국 통합의 정치다. 독일 황제 빌헬름 1세가 완고하고 신념이 강해 황제 말도 잘 듣지 않는 비스마르크 총리를 오랫동안 중용함으로써 통일 독일제국의 기틀을 다진 사례를 제시하면서다.

윤석열 정부의 5년 뒤는 어떤 모습일까. 김 전 위원장이 안타까워했던 과거의 전철을 밟지 않으려면 통합에 걸림돌이 될 밀어붙이기식 불통 인사는 피해야 한다. 16일 국회 시정연설에서 야당 상징색에 가까운 하늘색 넥타이를 매고 약속했던 협치의 초심은 끝까지 새기면서 말이다.

김형구 정치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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