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리사니] 모두의 빵과 장미

조효석 2022. 5. 16. 04: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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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효석 사회부 기자


지난주 국회에 갔다. 폐지가 예고된 부처의 장관 후보자 인사청문회라는, 대한민국사에 다시 목격하기 힘들 현장을 지켜보기 위해서였다. 야당 의원들의 날 선 질문과 비아냥, 여당 의원들의 달래는 듯한 위로는 여느 정권의 여느 장관 후보자 청문회와 다를 것이 없었다. 마르고 서늘한 인상의 후보자는 여성단체 출신 의원들의 종일 이어진 질타에도 표정 변화 없이 나름 의연했다.

‘복지 전문가’라는 여권의 설명과 달리 김현숙 후보자는 ‘경제학자’로 설명하기가 더 수월하다. 대학에서 최근까지 경제학과장을 역임했고, 기업경제학·한국경제론을 가르쳤다. 박근혜정부 청와대에 있던 때도 고용정책을 맡았다. 청와대에서 나온 뒤 여성 고용과 보육, 인구정책 관련 논문을 매년 내놓았다. 보육 정책과 노동 공급의 상관관계를 다뤘고, 출산율이 어떤 요인에 의해 결정되는지를 연구했으며, 출산 정책의 효과를 분석했다.

그가 쓴 논문을 하나씩 뜯어보며, 경제학자인 그가 여성 인권 문제에 접근하는 방식이 새 대통령 시각과 다르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인구 문제야말로 한국 경제의 동력과 직결된 가장 중요한 분야고, 아이를 낳아 기르는 게 여성이니, 그럴 환경을 최대한 만들어야 한다는 접근이다. 여성가족부 장관 후보자에 경제학자인 그의 이름이 오른 건 새 부처 이름으로 거론되는 ‘인구가족부’만큼이나 정권의 지향점을 보여준다.

새 대통령은 대선 후보 시절부터 같은 시각을 공공연하게 드러냈다. “페미니즘이 악용돼 저출산을 부추긴다”는 문제의 발언이 나온 자리에서도 그랬다. 그는 여성의 경력 단절을 막아야 하는 이유로 “여성의 사회참여가 많이 이뤄지면 경제 성장에 도움이 된다”를 들었다. “국민과 국가 전체에 도움이 되는 방향”이라고 부연도 했다. 그에게 있어 여성의 일할 권리를 보장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보다 “경제성장에 도움이 되기 때문”이 먼저였다.

인권 문제를 ‘경제’로 접근하는 시각이 틀리다고만 할 수는 없다. 근대 인권의 역사는 사실 근대 자본주의 역사와 동의어다. 20세기 들어 백인 남성만으로는 공장에 필요한 일손을 감당할 수 없었기에 서구 자본가들은 싼 몸값의 유색인종을, 여성을 노동 현장에 끌어들였고, 새로 임금노동을 시작한 이들의 목소리는 점점 커졌다. 여성들이 급기야 기존에 해오던 가사노동을 임금노동과 함께 감당 못 할 지경이 되어서야 비로소 탁아소 등 보육 정책이 태동했다.

그러나 인간을 경제발전의 도구로 보는 시각이 어떤 결과를 낳는지 우리는 보아왔다. 경제적 수단이 될 수 없는 인간을 경제발전의 도구로 보는 건 인간을 온전한 인간으로 보지 않는 사회다. 이 사회에선 남들만큼 일할 수 없는 노인이, 장애인이, 아동이 멸시받고 차별받는다. 사람들은 죽을 만큼 경쟁하며 자신의 경제적 필요를 증명하는 삶에 지쳐 직장을 나온다. 아이를 낳지 않는 사회란 그렇게 인간을 경제 성장의 재료로만 보는 사회를 향한 비명이자 저항의 결과다.

우리가 인권을, 나아가 존엄을 챙겨야 하는 건 대통령과 그 주변인들이 강조해온 것처럼 ‘저성장 극복을 위해서’ 때문만이 아니다. 보다 평등하고 정의로운 사회를 추구해야 하는 건 이미 그 자체로 옳기 때문이다. 경제가 더 성장하기 위해 아이를 더 낳도록 해야 하고, 단지 같은 이유로 양극화를 해소해야 한다는 생각은 그간 걸어온 지옥길을 되걷게 할 뿐이다.

“빵과 장미를 함께 주세요, 우리는 빵을 위해 싸우지만 장미를 위해 싸우기도 합니다.” “태어날 때부터 숨이 다할 때까지, 우리 삶이 착취당하지 않기를.” 여성의 날이면 세계 각지에서 들을 수 있는 노래 ‘빵과 장미’의 구절이다. 노랫말이 말하듯 우리에게는 장미가 상징하는, 인간으로서의 권리와 존엄이 빵 못지않게 절실하다. 대통령이 그토록 걱정하는 문제의 해결책도 그 지점에 있을지 모른다.

조효석 사회부 기자 promene@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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