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정의 시선]"핵은 핵이고, 생명은 살려야"

김수정 2022. 5. 16. 0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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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 코로나, 90년대 재앙 재연되나


태영호 "북 주민에 기댈 곳 알려야"


보수정부의 전향적 조치 효과 커

김수정 논설위원

역사에 남을 에피소드라 생각했나 보다. 지난해 2월 러시아 외교부가 동영상 하나를 공식 계정에 올렸다. 이른바 러시아 외교관 가족 평양 탈출기. 북한이 코로나19로 국경을 봉쇄한 뒤 함북 나선까지 34시간 이동한 이들이 아이와 짐을 실은 궤도 수레를 밀며 두만강 철길 1㎞를 넘는 모습이다. 그해 여름, 남은 각국 외교관과 국제기구 요원은 생필품 부족 등에 대부분 평양을 떠났고, 이후 외부에 비친 북한의 모습은 미사일 발사와 화려한 열병식 등이 다였다.
북한이 국제사회의 백신 지원을 거부한 채 주민 2500만 명을 2년 넘게 가둔 '밀봉 방역'의 이음새가 결국엔 뜯어졌다. 팬데믹 대처 의료보건 역량을 나타내는 글로벌보건안보지수(GHS index 2021)는 195개국 중 193위. 1990년대 최소 수십만이 아사(餓死)한 재앙의 21세기판이 될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북한 노동당 기관지 노동신문은 2일 ″김정은 동지께서 5월1일 조선인민혁명군 창건 90돌 경축 열병식을 성과적으로 보장하는 데 기여한 평양시 안의 대학생, 근로청년들과 기념사진을 찍었다″고 보도했다. 수만 명이 모인 열병식과 이후 사진촬영 등이 4월 말 5월 초 북한 코로나 확산의 기폭제가 됐다는 분석이 나온다 [평양 노동신문=뉴스1]

북한은 12일부터 발열 환자 폭증을 긴박하게 공개했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비축해놓은 예비의료품을 동원하라"고 했다. 14일엔 '건국 이래 대동란'이라며 "가정(김정은 자신의) 상비약품을 기부하겠다"고도 했다. "발열 환자는 버드나무 잎을 우려서 하루 세 번 마시라" 같은 조언, 계도 사항이 매체를 통해 쏟아진다.
폐쇄적 신정(神政) 독재 체제 유지를 위한 비상식적 정책이 만든 참극이다. 백신 없는 방역 뒤 인권 침해는 말할 나위 없다. 김정일 시대에도, 김정은 시대에도 고통은 북한 주민의 몫. 집권 10년 우상화와 핵무력 완성을 위해 김정은은 국가 자원을 쏟아부었다. 지난달 행사엔 수만 명이 동원됐다. 열병식에 왔다 농번기 일손을 돕기 위해 전국 각지로 흩어진 청년들을 다시 불러 김정은과 1200명씩 나눠 사진을 찍고는 '온 나라를 진감시킨'(노동신문) 행사라고 선전했다. 김정은 지시로 병원에 입원해 있는 청년들도 데려왔노라고 자랑했다. 북한 코로나 재앙의 책임? 시작부터 끝, 김정은이다.
윤석열 대통령은 13일 북한을 돕겠다고 했다. 정부는 곧 대북 통지문을 보낼 계획이다. '코로나 발생' 발표를 한 날에도 미사일을 쏘고 7차 핵실험을 준비하며 핵사용 위협도 대놓고 하는 북한이기에 정부의 적극 지원 의지를 불편하게 바라보는 민심도 있다.
2016년 주영국 공사로 있다 망명한 태영호 국회의원은 "핵은 핵이고, 이 순간 인간의 생명이 중요한 것 아니냐"고 했다. '고난의 행군' 시기인 1996년 주덴마크 3등 서기관으로 '식량공작활동'에 나서 100만 달러어치 지원을 받곤 북한 인민들이 좋아할 모습을 떠올리며 눈물을 흘렸다(『3층서기실의 암호』)는 그다. 30년 지나도 변치 않는 상황이 마음 아프다고 했다. 그에게 물었다.

-북한 상황이 어떤 것 같나.
"정말 심각하니 공개한 거다. 식량 위기도 90년대 초 시작됐지만, 외부에 알린 건 95년이다. 막 굶어 죽으니까. 김정은이 예비의약품을 언급했는데, 전쟁비축 약품 얘기다. 주민들에겐 동요하지 말라고, 국제 사회엔 전쟁창고까지 연다고 소리 지르는 거다. 대북 비핵화 협상 등에선 상호주의를 엄격히 하고, 인도적 분야엔 적용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96년 유럽서 식량 외교를 했는데.
"덴마크, 스웨덴을 상대로 했다. 그들은 '자연재해도 없고, 전쟁 상태도 아니다. 정부가 무기 만드는데 돈을 안 쓰면 인민들이 굶는 일은 없다’고 비난하면서도 식량을 지원했다. 희생자는 무고한 주민이라서다. 한국도 북한에 직접 주기보다 국제기구에 맡기고 북한이 자존심 안 상하고 수용할 수 있도록 지원했으면 한다. 일정 시간 지나면 북한 주민들도 남에서 온 거라고 다 안다. 길게는 평양 당국이 서울의 예산에 의존하게 하는 길이다."
-상황 악화 시 김정은 체제가 흔들릴까.

”수십만이 죽어도 동요는 없었다. 북한군의 총구는 항상 주민을 향해 있다. 극단의 공포정치다. 사회 혼란이 일어나긴 몹시 어렵다. 핵·미사일 개발도 계속할 거다. 아사자가 속출해도 중단 안 했다.“
북한의 '백신 제로 밀봉 방역'에 대한 국제사회 우려는 현실이 됐다. 김정은 체제의 미래, 한반도 정세가 어찌 될지 알 수 없다. 한국과 미국, 북한 모두의 시험대다.

"북한이 우리 제안을 안 받아도, 설사 핵실험을 해도 지원 의사를 밝히고, 언제라도 지원 가능한 준비를 해두는 게 중요하다. 북한 주민들이 최악의 상황에서 기댈 동포가 있다고 믿게 하는 것, 이게 한국이 평화통일로 이끄는 길이라고 생각한다." 태 의원의 얘기다. 그렇다. 세월이 흐른 뒤 이런 질문도 상상할 수 있겠다. "우리가 역병으로 죽어갈 때 당신들은 보고만 있었나요." 21일 윤석열 대통령은 바이든 미 대통령을 만난다. 핵문제를 넘어 포괄적인 대북 정책을 의제로 다룰 모양이다. 보수 정부의 전향적 드라이브는 국민의 지지를 받기도, 좋은 결과를 내기도 더 쉽다.

김수정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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