샤워하다 새벽 세 시, 이걸 어쩌면 좋나요 [사춘기와갱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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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기자 그룹 '사춘기와 갱년기'는 요즘 사춘기 아이들의 마음을 들여다보는 갱년기 부모들의 사는 이야기입니다. <편집자말>
[은주연 기자]
그렇게나 서로 으르렁거리던 두 딸이 요즘 달라졌다. 자매의 끝도 없는 싸움에 진짜로 나의 새우등이 터질 때쯤, 새 학기가 시작되었고 서로 바쁜 아이들은 이제 얼굴 보기가 힘들어졌다. 그래서 그런지 만나면 그렇게 반가워 할 수가 없다.
두 아이가 조우하는 시간은 오후 10시 30분경. 다들 학원에서 돌아오는 시간이다. 그리고 곧 시작되는 야식 타임. 재잘재잘 조잘조잘 무슨 이야기가 그리 끝도 없는지. 밤이라는 시간적인 특성도 있는데 우리 집 분위기는 뭐랄까, 그냥 초저녁이다. 또래도 아닌데... 흠... 고등학생과 초등학생의 수다는 끝이 없다. 사이좋은 자매를 보는 일이야 즐겁지만 문제는 그렇게 눈 깜짝할 사이에 자정이 가까운 시간이 된다는 것이다.
▲ 늘 느릿느릿한 첫째는 샤워를 하러 들어가면 한 시간이 넘게 나오지를 않는다. |
ⓒ envato elements |
자매들의 사이가 좋아진 것을 볼 때 엄마 입장에서 흐뭇한 것은 사실이다. 코로나 원격수업 시절, 나에게 돌밥돌밥보다 힘든 것이 자매의 쌈박질(?)이었으니까. 그러니 우리 집이 전쟁터가 아닌 화합의 장이 된 것만으로도 감사해야 마땅하거늘, 이제는 또 다른 걱정이 발목을 잡는다. 바로 쏜살같이 지나가는 시간 걱정이다.
'둘이 사이 좋은 건 좋은데 그래도 그렇지. 아무리 반가워도 적당히 선을 지켜야 하는 것 아닌가. 시간이 지금 몇 신데...'
내가 바라는 이상적인 시나리오는 이거다. 아이들이 집에 돌아온다, 반갑게 인사한다, 간단한 야식을 하며 이야기를 한다, 바로 씻고 나와서 내일 학교 갈 준비를 하고 잠이 든다. 이렇게 후다닥 할 일을 끝내고 잠 드는 시간이 아무리 늦어도 밤 12시가 되는 것이 내 바람이지만 현실은 이와는 영 딴판이다.
오히려 자정 이후, 이제부터가 본격적인 시작이다. 첫째에게 잘 자라 인사를 하고 잠자리에 들지만 뭔가 뒷맛이 개운치가 않다. '설마 피곤한데, 빨리 씻고 자겠지' 하는 마음으로 애써 불안감을 잠재우지만 다음날 아침 아이의 피곤한 얼굴을 마주할 때면 의심스럽다. 늦게 잔 건가?
그러던 어느 날, 때는 새벽 2시 30분. 아이 방에서 머리 말리는 드라이 소리가 요란했다. 결국 정리하고 다음 날 학교 갈 준비를 마치고 잠자리에 드는 시간은 새벽 3시(이거 대체 실화인가). 늘 느릿느릿한 첫째는 샤워를 하러 들어가면 한 시간이 넘게 나오지를 않는다. 그래도 그렇지. 설마 이렇게 피곤한데도 그럴 줄은 몰랐다. 아마도 물을 틀어놓고 따뜻한 물멍을 하는 시간이 좋은 것 같긴 한데, 그럼 잠은 언제 자는 거니 대체.
가끔 보면 아이들에게는 내일보다는 오늘이, 미래보다는 현재가 중요한 것 같다. 물론 현재를 산다는 것은 너무나 바람직한 일이긴 하지만, 살아온 날들이 오랜 내 입장에서는 시간이 아깝다. 매일 하는 생각이 '저 시간에 잠을 자지, 매일 피곤하다면서', '차라리 저 시간에 운동을 하지' 같은 것들이다.
▲ 시간이라는 강박관념에 쫓기듯 살다 보면 내가 삶을 사는 건지, 일상을 해치우는 건지 모를 때가 있다. |
ⓒ envato elements |
나는 정말 시간이 아깝다. 나도 십대일 적에는 시간 아까운 줄 모르고 살았지만, 지금은 한정된 시간이 아쉽다. 원래 40대의 나이가 하고 싶은 일이 점점 많아지는 나이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하고 싶은 일, 해야 될 일이 하나둘 늘어가는 나는 늘 시간이 없다. 책도 읽어야 하고, 글도 써야 하고, 운동도 해야 하고, 밥, 빨래, 청소 등 집안일도 해야 하는 나는 늘 바쁘다.
아마도 그건 내 시간이 모두 내 것이 아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식구들 뒤치다꺼리와 집안일을 하고 남은 자투리 시간을 이리저리 배분해 써야 하기 때문에 늘 시간이 없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니 내 입장에서 보면 24시간을 온통 통째로 쓰는 아이들을 보면 안타까운 거다. 이 귀한 시간을 왜 이렇게 써.... 가끔은, 저렇게 흘려보낼 시간 있으면 나를 주지... 싶은 마음도 든다(부러운 건가?).
이러니 점점 내 성격 또한 급해지고 종종거려지는 것 같다. 시간이라는 강박관념에 쫓기듯 살다 보면 내가 삶을 사는 건지, 일상을 해치우는 건지 모를 때가 있다. 그럴 땐 느긋한 딸들이 부럽기도 하다. 나는 내일 어떤 일이 생길지 모르니, '내일 할 일을 오늘 미리 해두자'라는 주의로 살고 있는 반면, 아이들은 '내일 할 일은 절대로 오늘 미리 하지 않는다'라는 것을 철칙 삼아 살고 있달까.
그런데 '시간을 좀 아껴 쓰자'라고 말하면 아이들은 나름대로 할 말이 많다. 아마도 자기들 딴에는 이제 막 학교에서(혹은 학원에서) 집으로 왔으니 좀 여유 있게 시간을 보내고 싶은데, 빨리 자라고 하는 엄마가 야속할지도.
어릴 때를 떠올려보면 나도 그랬다. 시간이 아깝지 않았기에 마음 편히 놀 수도 있었고, 이것저것 시도해 보는 자유도, 실패해 볼 여유도 있었지 싶다. 시간을 아까워하는 것도 어쩌면 나이를 먹어야 가능한 일인지도.
계획하는 사피엔스가 되는 것도 나이가 들어야 가능한 일이라면, 아이의 무계획성도 꾹 참고 바라봐 주는 것이 시간 아까운 줄 아는 40대 엄마의 도리일지도 모르겠다. 어찌 정답이 있으랴. 조금 여유로운 시선으로 보아줄 수밖에. 아이들에게 현재는 미루고 싶지 않은 즐거움, 놓치고 싶지 않은 재미일지도 모를 일이니까.
어쩌겠어, #가보자고 #오히려좋아
요즘 트렌디한 용어 중에 지금의 상황을 오히려 좋게 받아들이고 새로운 방법을 찾아보자는 의미로 '#가보자고' '#오히려좋아'가 있다고 한다. 말 그대로 일이 생각대로 안 풀릴 때 우울해하거나 좌절하지 말고 지금의 좋지 않은 상황을 오히려 좋게 받아들이고 새로운 방법을 찾아보자는 의미라고 한다.
그런 의미에서 아이들의 '시간 흘려보내기'. 그거 일단, 가보는 거다. 늦은 밤까지 웃고 떠들며 보내는 시간, 물멍하며 빠져드는 사색이 어떠한 좋은 결과를 가져올지 아직은 알 수 없지만 말이다.
오늘도 여전히 자매는 사이가 좋다. 식탁에서 야식을 먹던 아이들이 오늘은 아예 그릇째 들고 방에 들어갔다. 둘째의 PPT 숙제를 도와준다는데, 시간은 벌써 오후 11시 40분(이제는 초저녁처럼 느껴진다).
째깍째깍 시간은 무심히 12시를 향해 가고 엄마의 한숨은 깊어가는데, 무엇을 만드는지 까르르 깔깔 하하 호호 소리가 끊이지 않는다. 마음을 비운 채로 들으니 두 아이의 웃음소리에, 내내 귀가 즐겁다. 그러면 된 거지. #나쁘지 않지. #오히려 좋... 은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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