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좀 죽여달라"던 전신마비男, 12년뒤 입으로 세상 만났다

심석용 2022. 5. 15.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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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기엔 볼품없어도 소중한 물건이에요”
지난 2일 인천의 한 가정집. 휠체어에 탄 아들의 얼굴엔 미소가 가득했다. 그의 곁엔 기다란 막대들이 가지런히 놓여있었다. 50㎝가 넘는 이 막대는 튀김용 젓가락에 미술용 붓을 덧댄 그만의 그림 도구다. 손과 발을 제대로 쓰지 못하는 아들을 위해 아버지가 만들었다고 한다. 두께가 다른 붓엔 각기 다른 번호가 붙었다. 아들이 숫자를 말하면 아버지나 도우미 교사가 그에 맞는 붓을 건넨다.

이날 ‘3번 붓’을 입에 문 아들은 한참 캔버스를 바라보더니 이내 팔레트에 짜인 녹색 물감을 찍어 채색을 시작했다. 그는 “입으로 그린다는 게 어색했지만, 이젠 세상과 만나는 저만의 방식이 됐다”며 웃었다. 13년째 입으로 그림을 그리는 구필(口筆)화가 임경식(45)씨 얘기다.


불의의 사고로 접게 된 꿈


임경식씨는 휠체어에 앉아 입으로 붓을 물고 그림을 그린다. 도우미 선생님과 아버지가 그를 위해 물감을 미리 팔레트에 미리 짜두고 작업을 돕는다. 심석용 기자
경식씨는 장래희망이 화가는 아니었다고 했다. 한때 체육 교사를 꿈꿨던 그는 고교 졸업을 앞두고 작은 회사에 취업했다. 하지만 1997년 가을 불의의 사고로 모든 게 물거품이 됐다. 입대를 앞둔 지인의 송별회에 참석한 뒤 귀가하던 길이었다. 오토바이로 커브 길을 지나던 중 불법주차한 차량을 피하지 못하고 부닥쳤다. 충돌 뒤 공중으로 붕 뜬 그를 오토바이가 덮쳤다. 병원으로 옮겨져 의식을 되찾았지만, 온몸엔 감각이 없었다. 의료진은 “목뼈가 부러지면서 중추신경을 건드려 신경이 끊어졌다”는 진단을 내렸다.

처음 겪는 장애인의 삶은 녹록지 않았다고 한다. 늘어지는 중환자실 생활과 반복되는 재활에 지친 그는 “나를 죽여달라”고 소리쳤다. 퇴원해 집에 돌아와선 욕창이 2차례 생길 정도로 칩거를 고집했다. 그럴 때마다 그를 일으켜 세운 건 가족이었다. 어머니는 뇌졸중으로 편마비를 앓으면서도 매일 아들을 위해 기도했다. 어린이집 교사였던 누나는 동생을 위해 직장을 그만두고 간병인을 자처했다.

2009년 ‘동굴’을 고집하던 경식씨가 마음을 돌렸다. 어머니의 병세가 나빠지고 아버지가 생업을 내려놓으면서 더는 짐이 될 수 없단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뭘 할지 고민하던 차에 우연히 구족화가가 그린 그림이 눈에 들어왔다. 장애가 있어 입이나 발로 그림을 그리는 이들이었다. 붓을 잡아보라는 제안을 수차례 거절했던 그였지만 그 순간만큼은 화가가 되어보고 싶단 마음이 강했다고 한다.


유튜브 영상으로 시작한 화가의 길


불편한 몸으로 매번 강습을 다닐 순 없었다. 자연스레 유튜브가 그림 선생이 됐다. 입에 붓을 물고 영상을 보면서 그대로 따라 했다. 1시간 정도 붓대를 놀리면 입이 마비되고 목이 뻣뻣해졌지만, 쉽사리 붓을 놓지 않았다. 그를 위해 매번 물감과 이젤을 준비하는 아버지가 눈에 아른거려서다. 주로 유화를 그렸다. 수채화와 달리 쉽게 고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바깥세상이 그리웠던 그는 풍경을 주로 그림에 담았다.
임씨는 지난해 10월 인천 한중문화원에서 자신의 개인 전시회를 열었다. 전시회 당시 임씨(오른쪽)와 아버지가 작품을 살펴보고 있다. 사진 임씨 제공
매일 4시간씩 붓질을 하다 보니 실력이 늘었다. 그림은 생각보다 그와 잘 맞았다. 우연한 계기로 구족화가 단체전에 그림을 내걸게 되면서 본격적인 화가의 길을 걷게 됐다. 누나의 도움으로 간간이 경기도 안양의 화실을 찾으면서 눈이 뜨였다. 2014년엔 도서관에서 개인 전시회를 열어보자는 제안을 받았다. 8개월간 준비 끝에 개인전을 열고 호평과 함께 마무리했던 날. 그는 자신을 위해 그간 희생해 온 가족들 생각에 눈물을 쏟았다고 한다.
임경식씨는 최근 거북이와 금붕어를 주로 그린다. 굴레를 벗어나 자유롭고 싶은 자신의 마음을 투영했다고 한다. 심석용 기자
지난해부터 그는 거북이와 금붕어를 그리고 있다. ‘꿈을 꾸다’란 제목이 붙은 그림들이다. 그림 속 동물들은 어항이 아닌 바닷속을 힘차게 헤엄친다. ‘너의 마음을 그림에 담아보라’는 그림 선생님의 조언에 따라 자유롭고 싶은 바람을 투영했다고 한다.

임씨는 이제 대한민국 미술대전에 작품을 내보겠다는 목표를 향해 뛰고 있다. 더 많은 이들이 자신의 그림으로 용기를 얻고 따뜻해졌으면 하는 게 그의 바람이다. 그는 인터뷰 막바지에도 자신처럼 좌절했던 이들을 위한 조언을 잊지 않았다. “한때는 저도 죽고 싶었어요. 하지만 죽어도 되는 삶은 없어요. 저도 어항 속을 나오기까지 십수 년이 걸렸어요. 새로운 삶은 반드시 옵니다. 포기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심석용 기자 shim.seokyo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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