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심 기아 3억명, 구호 막막..우크라戰에 식량 통제불능상태"

박형수 2022. 5. 15. 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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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윤선희 유엔 세계식량계획 한국사무소장

“올해 극심한 기아가 3억2300만 명입니다. 지난해 1억9300만 명에서 갑자기 70% 폭증했어요. 어떻게 구호활동을 해야할지 막막한 상황입니다.”

윤선희 유엔세계식량계획 한국사무소장이 우크라이나 전쟁이 촉발한 글로벌 식량 위기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김현동 기자

지난 11일 서울대 우정글로벌사회공헌센터에 위치한 유엔 세계식량계획(WFP) 한국사무소에서 만난 윤선희(47) 소장은 심각한 얼굴로 “이전에 없었던 최악의 상황”이라는 말을 반복했다.

기아의 갑작스런 증가에 직접적 원인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과 전쟁의 장기화다. 그간 기후변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으로 식량 위기에 이미 빨간불이 들어왔는데, 전쟁이 터지면서 통제 불능 상태가 됐다는 것이다. 실제로 개전 한달 만인 지난 3월, 밀 선물가격(미 시카고상품거래소 기준)은 전년 대비 t당 73.9% 뛰며 사상 최고치를 기록했다. 옥수수는 t당 36.6%, 대두는 18.4% 올라 모두 역대 최고치에 육박했다. 세계은행은 식량 가격이 1%포인트 오를 때마다 1000만 명이 빈곤에 빠진다고 경고한 바 있다.

이 와중에 최근 인도네시아 등 23개국은 ‘식량 보호주의’로 전환하고 식량 수출을 통제하며 문빗장을 걸어 잠궜다. 윤 소장은 “우리는 코로나19 사태가 가르쳐 준 교훈을 잊어선 안된다”며 “불행을 외면한다고 해서, 나만 예외가 되지 않는다. 지금은 도움의 손길을 내밀 때”라고 강조했다.

2020년 노벨평화상을 수상한 WFP는 분쟁과 재난, 기후위기를 겪고 있는 지역에 식량을 지원하고 교육 등 자립 프로그램을 제공해 빈곤에서 벗어나게 하는 세계 최대 규모의 인도적 지원 기관이다. 매년 81개국에 식량을 지원하고 있다. 다음은 윤 소장과의 일문일답.

Q : 기아 상황이 얼마나 심각한가.
A : “3억2300만 명이라는 숫자는 WFP 출범(1964년) 이래 최고 수치다. 기후변화·코로나19로 꾸준히 증가하던 기아 숫자가 전쟁으로 갑자기 수직상승했다. 이들에게 공급할 식량 구입비로 올해 220억 달러(약 28조3900억 원)가 필요한 상황이다. 지난해는 148억 달러(약 19조 원)였다. 문제는 내년 상황이 더 심각해질 거란 사실이다. 세계 주요 곡물 수출국인 우크라이나가 아예 파종조차 못했다. 내년에는 수출 물량은커녕 자국민이 먹을 곡물도 수확할 수 없을 가능성이 크다.”

Q : WFP가 기아를 감당 못할 상황이 올 수 있단 얘긴가.
A : “감당 못할 순간은 이미 왔다. WFP에서 20년째 근무 중인데, 이 정도 스케일의 구호는 경험한 적이 없다.(※윤 소장은 1999~2002년 맥킨지 한국지사에서 일하다 2003년부터 WFP에서 근무하고 있다.) 평화 없인 식량 안보가 없단 사실을 새삼 절감하고 있다. 전쟁이 더 길어지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상상조차 힘들다.”

Q : 서방은 전쟁이 장기화될 것으로 예상한다.
A : “전쟁 이전, 우크라이나와 러시아는 WFP의 대표적인 식량 구매처였다. 러시아는 22위 공여국(구호 식량과 자금을 후원하는 나라)이었다. 개전 이후 우크라이나 사람들은 국내 실향민(770만 명), 해외 난민(570만 명)이 됐다. WFP 입장에선 두 나라의 식량 공급이 끊긴 것뿐 아니라, 우크라이나는 수원국(원조 대상국)이 됐으니, 몇 배의 타격을 입은 셈이다.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곡물에 의존도가 높은 중동·아프리카에서는 벌써 많은 사람들이 생사 갈림길에 놓였다. 전쟁이 더 길어지면 많은 사람이 굶어 죽는 상황을 피할 수 없다. WFP는 그걸 보면서도 식량을 구할 수 없어서 원조 대상을 줄여야 할 수도 있다. 이런 비극을 막아야 한다.”

세계 밀 수출 순위. 그래픽=김영옥 기자 yesok@joongang.co.kr


중동과 아프리카는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곡물 의존도가 50% 이상이다. 레바논·시리아·리비아 등은 밀 수입량의 80%를 우크라이나에 의존한다. 이들 나라는 개전 이후 굶주림의 공포에 떨고 있다. 터키는 전체 밀 소비량의 60%를 러시아에 의존해왔다. 지난 3월 터키의 식량 물가는 70% 올랐다.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에서 전체 밀 수입량의 80%를 의존하는 이집트도 비상이 걸렸다.

Q : 가뜩이나 어려운 상황에 각국의 식량 보호주의 움직임까지 겹쳤다.
A : “식량이 부족해지니, 일부 국가에서 자국민을 위한다며 수출을 통제하는 것을 이해 못하는 건 아니다. 하지만 국제기구에서 일하면서 깨달은 게 있다. 자국민만을 위한 정책이 실제로 자국민을 보호하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코로나19 사태가 대표적이다. 선진국이 백신과 마스크를 움켜쥐고 있었지만, 결국 백신을 맞지 못한 나라에서 나온 변이 바이러스로 공격받지 않았나. 식량 위기도 마찬가지다. 가진 자가 움켜쥘수록 모든 상황은 나빠진다.”

Q : 식량 위기 해결을 위해 당장 필요한 조치가 있다면.
A : “지금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에서 곡물 선적이 보류되면서 약 1400만t의 밀과 옥수수 1600만t이 동결됐다. 특히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의 흑해 항구를 봉쇄하면서 이곳 컨테이너 박스에 쌓인 곡물조차 실어오지 못하고 있다. 당장 우크라이나 항구에 묶여있는 식량부터 수출할 수 있게 길을 터줘야 한다. 이게 가장 시급하다. 또 러시아는 서방 제재를 받고 있지만, 인도적 차원에서 식량을 제공하길 바란다. WFP는 정치적 기관이 아니고 중립적인 조직이다. 러시아는 우리와 함께 식량 공여 및 수출에 대해 논의해야 한다. 궁극적으로는 빠른 종전, 그리고 평화가 답이다.”

윤선희 유엔세계식량계획 한국사무소장이 "코로나19 사태가 가르쳐준 교훈을 잊지 말아야 한다"며 "식량 위기 해결은 남의 일이 아닌 모두의 일"이라고 설명했다. 김현동 기자


우크라이나는 수출량의 90%를 흑해 항구에 선적 후 이송해왔다. 개전 이후 러시아군은 흑해항을 봉쇄해 곡물 소송로를 차단했다. FAO에 따르면 우크라이나에 묶여있는 곡물이 2500만t에 이른다. 데이비드 비즐리 WFP 사무총장은 11일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에게 흑해 항구 개방을 촉구했다. 비즐리 총장은 “항구 봉쇄로 전세계 수백만명이 굶주림에 죽게 될 것”이라며 “이를 한번이라도 생각한다면, 당장 항구를 열어야 한다”고 말했다.

Q : 한국은 WFP에 의미있는 공여국인가.
A : “한국은 공적개발원조(ODA) 규모는 크지만 국내총생산(GDP) 대비 개인 기부와 기업후원은 많지 않다. 한국은 WFP에 매우 특별한 나라다. WFP는 1964~84년 20년간 한국에서 원조활동을 했다. 그 짧은 기간에 한국은 수원국에서 상위 15위의 공여국이 됐다. 데이비드 비즐리 사무총장은 한국을 ‘눈부신 모범사례(shining example)’라고 부르며 자랑스러워한다. 한 세대도 지나지 않아 빈곤에서 완전히 벗어난 한국과 같은 사례는 세계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다. 동시에 한국에 대한 고민도 있다. 어떻게 그 짧은 기간에 빈곤의 기억을 깡그리 잊어버릴 수 있는가다. 아일랜드는 150년 전의 대기근 시기를 아직도 기억하고 있는 것과 대조된다. 한국인들이 빈곤한 나라에 좀더 관심을 갖고 도움의 손길을 내밀었으면 한다.”

박형수 기자 hspark97@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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