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졸아도 괜찮아요.. 마음 열면 '클래식' 보물상자 열릴 것"
흉부외과 전문의 유정우(52) 박사는 오페라 평론으로 국내에서 몇 손가락 안에 드는 클래식 음악 칼럼니스트다. 그가 ‘본캐’와 ‘부캐’를 오가며 활동한 것은 20년이 훌쩍 넘었다. 취미가 직업이 됐다는 의미의 ‘덕업일치’나 취미(hobby)에 사업가(preneur)를 합친 ‘하비프러너’ 같은 신조어가 나오기 훨씬 전부터다.
지난 6일에도 그는 매주 고정 출연하는 KBS 클래식FM ‘김미숙의 가정음악’ 방송을 마치고 인터뷰에 응했다. 오후에는 병원에서 진료하고 퇴근 후엔 의학전문기자 출신 홍혜걸 박사의 유튜브 채널에서 음악 이야기를 하기로 일정이 잡혀있었다. “음악 관련 일이 병원 일보다 많아져 이제는 부업을 넘어섰다”며 웃었다.
유 박사는 1990년대 PC통신 하이텔 고전음악동호회에서 음반과 공연평을 쓰다가 공연예술 전문지 ‘객석’의 칼럼니스트로 데뷔했다. 동호회 오프라인 모임에서 각자 한 작품씩 맡아 해설하다 보니 강연의 틀이 잡혔고 90년대 말부터 음악해설 강연회에 강사로 초대받았다. 전문의 자격증을 따고 2002년 서울 강북삼성병원에서 근무했지만 음악 일을 병행하기 어려워지자 2004년 개인병원으로 옮겼다.
“음악 쪽 일이 생각보다 많아지니 욕심이 생겼다. 불러주는 곳이 늘어나고 하고 싶은 일을 즐겁게 할 수 있다는 게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그는 클래식 음악을 좋아한 부모님의 영향으로 일찍 클래식을 접했다. 중학교 1학년 크리스마스 때 용돈을 모아 처음으로 산 클래식 음반의 기억이 생생하다고 했다. 거장 오보이스트 하인츠 홀리거가 연주한 바로크 시대의 오보에 협주곡집이었다. 그렇게 LP와 카세트테이프, 음악책을 사 모으면서 본격적으로 클래식을 탐구하게 됐다.
그의 클래식 덕후력이 남다른 것은 대부분의 음악팬과 달리 음악 감상에 그치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보에와 호른을 배워 학교 오케스트라에서 활동하고 성악 레슨을 받는가 하면 외국어까지 섭렵했다. 80년대에 외국 클래식 관련 정보를 얻을 수 있는 통로는 사실상 일본 책과 잡지뿐이었다. 먼저 일본어를 익혔고 오페라에 몰입하면서 가사를 이해하려고 제2외국어로 배운 독일어 외에 이탈리아어 프랑스어 러시아어를 익혔을 정도다.
그런데도 자신은 혼자 공부한 일종의 재야학자라며 평론가보다 칼럼니스트로 불렸으면 한다고 몸을 낮췄다. “호칭이 중요한 것은 아니지만 평론은 고귀한 일”이라며 “자신이 좋아하고 열망한다고 해서 평론가라는 직함이 붙을 수 있는 건 아니라고 생각한다”고 했다.
“음악학이나 작곡, 화성학을 전공한 평론가들은 일반 애호가들이 발견하지 못하는, 음표와 음표 사이 행간의 의미를 알기 때문에 곡을 분석하고 곡의 의미를 평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대중적인 음악 해설을 하는 저는 나서서 제 주장을 펴기보다 여행 가이드처럼 같이 가자고 이끄는 역할에 충실해야 한다고 본다.”
여행 가이드란 비유적으로 음악으로의 여행을 안내한다는 뜻이다. 여러 문화적 요소를 망라해 작품을 설명하는 박람강기로 정평이 난 그의 강의를 듣노라면 실제로 유럽을 여행하는 듯한 기분이 든다. 이탈리아 피렌체를 배경으로 한 푸치니의 오페라 ‘잔니 스키키’를 소개하면서 현지에서 유명한, 소 내장을 넣은 곱창버거 ‘람프레도토’ 이야기를 들려주거나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즐겨 먹었다는 장어 요리를 언급한다. 그는 그게 바로 클래식 음악을 업으로 삼게 된 클래식의 매력이라고 설명했다.
“음악 자체의 매력도 대단하지만 그 음악을 만든 사람, 그 사람을 키워낸 곳의 문화를 총체적으로 경험하고 이해하는 재미가 크다. 악보에 유럽의 문학 역사 건축 미술 종교 식문화 풍광까지 모두 녹아 있다고 할까. 내가 모르던 세계의 문을 열어주는 열쇠가 클래식 음악이고, 호기심을 끊임없이 충족시켜주는 보물상자 같다고 할 수 있다.”
유 박사의 강의가 인기 있는 또 다른 이유는 클래식계 특유의 엄숙주의와 거리가 멀기 때문이다. 공연장에서 졸다 깨는 것을 부끄러워할 필요 없다며 푯값이 아까워서라도 절대 졸아서는 안 될 부분을 콕 찍어 알려주곤 한다. 클래식만 고집하는 게 아니라 재즈와 팝, 가요까지 폭넓게 듣기 때문에 바흐의 ‘G선상의 아리아’를 활용한 걸그룹 레드벨벳의 최근 곡 ‘필 마이 리듬’(Feel My Rhythm)을 강의 소재로 삼기도 한다.
“입문자에게 클래식 음악을 어려워하지 말라고 얘기하고 싶지는 않다. 클래식이 어려운 음악인 건 사실이니까. 다만 어렵다고 해서 못 들을 이유는 없다. ‘베토벤 교향곡 5번 C단조 작품번호 67 운명’이라는 긴 이름을 몰라도 도입부의 ‘딴딴딴딴’처럼 꽂히는 부분이 있으면 그 부분만 즐겨도 된다. 잘 모른다고 주눅 들거나 잘 알아야 한다는 강박을 가질 필요 없다. 클래식도 BTS 노래와 똑같은 엔터테인먼트다. 음악을 들으려는 열린 마음만 있다면 클래식에서도 자기 취향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최근 세계 시장에서 K팝과 영화, 드라마가 각광받으며 K컬처를 말하지만 클래식 연주자들은 그보다 먼저 세계 무대에서 약진하고 있었다. 세계 3대 콩쿠르 중 하나인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의 중계를 맡은 벨기에 공영방송의 음악 전문 프로듀서가 국제 콩쿠르를 휩쓰는 한국인들에 대한 두 편의 다큐멘터리를 만들었는데, 제목이 각각 ‘한국 음악의 비밀’과 ‘K클래식 세대’였을 정도다. 유 박사 역시 한국이 클래식 음악을 즐기는 인구가 절대적으로 많지 않은데도 뛰어난 음악가를 대거 배출했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단적인 예로 일본의 클래식 애호가가 우리의 10배는 될 텐데, 일본 출신의 스타 음악가가 우리보다 많다고 할 수 없다. 일본 클래식 관계자들은 국제적으로 활동하는 성악가가 드문 것을 아쉬워한다. 일본 기업들이 1960년대부터 바이로이트 페스티벌(바그너의 오페라만 공연하며 잘츠부르크 음악제와 함께 유럽의 양대 클래식 축제로 꼽힌다)을 후원하면서 일본 성악가를 주연으로 세우려 노력했지만 여의치 않았다. 반면 한국은 베이스 연광철을 필두로 많은 성악가가 무대에 섰다. 외국 오페라 공연에 동양인이 등장하면 십중팔구 한국인이다. 한국이 음악교육열이 높기 때문이라고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설명이 안 된다. 한국인이 음악에 뛰어난 재능을 가진 것은 분명한 것 같다.”
①비발디 바이올린 협주곡 사계 중 ‘봄’
비발디의 사계는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클래식 음악에서 항상 수위를 차지하는 곡이다. 사계 중 봄의 1악장은 보티첼리의 명화 ‘봄’을 연상시키는 화사함을 담아 음표로 표현할 수 있는 봄의 생동감의 극치를 느끼게 해준다.
②멘델스존 ‘무언가’ 작품62 중 제6곡 ‘봄노래’
무언가란 가사 없는 노래라는 뜻으로 콧노래로 흥얼거릴 수 있을 정도로 단순한 낭만적 선율의 피아노 독주곡이다. 멘델스존은 모두 49곡의 무언가를 썼는데 제6집의 마지막 곡인 봄노래가 가장 유명하다. 봄노래란 제목은 멘델스존이 아니라 후대사람이 붙인 별명이다. 듣는 순간 봄의 생명력이 느껴지는 이 곡에 봄노래만큼 잘 어울리는 이름은 없으리라.
③요한 슈트라우스 2세 왈츠 ‘봄의 소리’
왈츠의 왕 요한 슈트라우스 2세가 1882년에 작곡한 소프라노 독창과 오케스트라 협연을 위한 왈츠다. 무도회를 위한 곡이 아니라 연주회용으로 작곡됐기 때문에 긴 서주 없이 소용돌이치는 봄바람을 상징하는 듯한 왈츠 리듬으로 바로 돌입한다. 이어 지저귀는 새소리가 묘사되는 등 다채로운 봄의 정경이 그려진다.
권혜숙 인터뷰 전문기자 hskwo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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