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네디가 한국에서 부활한 '반지성'(反知性) 취임사 [정기수 칼럼]

데스크 2022. 5. 13. 0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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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럼회와 대결'보다 더 큰 것 던진 윤석열식 문제의식
통합, 협치, 공정 가치 뛰어넘는 자유와 반지성주의 호소
문재인 정권 5년 내내 확대재생산 양극화, 편가르기 비판
'청문회 코미디, 다수결 독재가 곧 정치적 반지성'이란 시각
윤석열 대통령이 10일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 앞 잔디마당에서 열린 제20대 대통령 취임식에서 취임사를 하고 있다. ⓒ국회사진취재단

윤석열의 취임사는 어려웠다.


미국 35대 대통령 존 F. 케네디(Kennedy)가 61년 만에 한국에서 다시 사자후(獅子吼)를 토했고, 미국 경제학자 밀튼 프리드먼(Milton Friedman)이 작고한 지 16년 만에 다시 ‘선택할 자유’(Free to Choose, 윤석열이 가장 감명 깊게 읽은 책)를 강연했다. 그의 취임사를 접하기 전까지 자유(自由)라는 그 쉬운 단어가 이토록 심오한, 파생적 의미를 가지고 있었는지 미처 몰랐던 사람들이 대부분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자유를 사랑하는 세계 시민 여러분, 저는 이 나라를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 체제를 기반으로 국민이 진정한 주인인 나라로 재건하고, 국제사회에서 책임과 역할을 다하는 나라로 만들어야 하는 시대적 소명을 갖고 오늘 이 자리에 섰습니다.”

35번 등장한 ‘자유’보다 더 어려운 용어가 있었다. ‘반지성(反知性)주의’, 대통령 윤석열이 다시 쓰다시피 하고 줄였다는 취임사의 핵심 개념이었다.

“한편, 이러한 문제들을 해결해야 하는 정치는 이른바 민주주의의 위기로 인해 제 기능을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가장 큰 원인으로 지목되는 것이 바로 반지성주의입니다. 견해가 다른 사람들이 서로의 입장을 조정하고 타협하기 위해서는 과학과 진실이 전제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민주주의를 지탱하는 합리주의와 지성주의입니다.”

자유와 반지성주의는 그가 유세나 토론회에서 별로 쓰지 않았던 말들이다. 그 사이 사고의 방향과 깊이가 달라진 것인가? 아니다. 그는 선거 과정에서는 하기 어려웠던 말로 대한민국과 세계를 향해 ‘윤석열 철학’을 주창(主唱)한 것이었다.


‘세계 시민들’이란 호칭이 중요하다. 자유만 많이 말한 게 아니고 이 호칭도 7번 썼다. 그는 이제 달라져야 할 한국의 국격을 생각하며 ‘세계 시민들’을 불렀다. 윤석열식 문제의식이고 각오다. 한 대통령실 관계자가 이렇게 주석(註釋)을 달아줬다.

“경제 규모가 커졌다고 반드시 선진국이 아니다. 자유와 인권 확대에 있어서도 대한민국이 국제 사회에서 책임을 다하겠다고 세계 시민에게 얘기한 것이다.”

그는 이 말을 쓰며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 기후 변화 위기 등을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려면 돈이 필요하고, 경제 성장이 긴요하다. ‘도약과 빠른 성장, 오로지 과학과 기술, 그리고 혁신’ 강조가 그래서 이어졌다.


윤석열에 쓴 소리를 하는 보수우파 인사나 그를 비난하는 야당 비대위원장 입에서 혹평(酷評)이 나왔다. 재야 민주화 운동가 출신의 반박 친이계 좌장 이재오(77)가 한 방송에서 말한 ‘솔직한’ 소감이다.


“취임사를 밑줄 쳐 가면서 3번 읽었는데, 논문 같았다. 이론 중심이어서 실천적 과제가 부족했다.”


구시대 정치인들에겐 그 실천 여부와 관계없이 구체적인(화려한) 어젠다 나열(羅列)이 취임사의 거의 전부다. 이재오는 그것이 없었다는 지적을 하고 있다.


민주당 20대 여성 비대위원장 박지현은 취임식장에서 윤석열 바로 뒤에 앉았다. 아마 이날 가장 생각이 많았던 참석자는 그녀와 전 대통령 문재인이었을 것이다. 그녀는 “지성이 가장 결핍된 윤 대통령이 반지성주의를 언급했다”고 비꼬았다.


“비판 세력을 반지성주의로 공격하려는 의도다. 구조적 성차별 부정, 여성가족부 폐지, 외국인 건강보험 취소 등이 바로 반지성주의다. 또 1호 서명은 민주당이 극구 반대하는 한덕수 총리 후보자 임명 동의안이었다. 선전포고다.”


반지성주의(Anti-Intellectualism)는 원래 지성과 지식인을 적대시하는 태도와 불신으로서 교육, 철학, 과학 등 정통 학문과 예술을 쓸데없고 경멸스럽다고 보는 경향을 말한다. 정치에서는 합리적 이견을 허용치 않는 맹목적 집단주의, 극단적 진영 논리, ‘떼거리즘’, ‘패거리즘’ 정도가 될 것이다.


그러므로 대깨문, 대깨명 의원들, 즉 이번에 검수완박 법안을 주도한 처럼회 소속 초선들이 대표적인 반지성 정치인들이다. 최강욱, 김남국, 민형배, 이수진……. 법무부 장관 후보자 한동훈 인사청문회에서 이들이 보인, 논리와 증거는 없고 무지와 억지, 궤변과 ‘술주정’ 고성만 난무한 코미디 작태가 바로 반지성주의다.


부친 윤기중 연세대 명예교수가 서울대 법대 입학 기념으로 사줘 윤석열이 애독한 책의 저자 프리드먼은 정부의 두 가지 기본적 기능으로 외부 적으로부터의 국가 보호와 동료 시민들(Fellow Citizens)로부터의 시민들 보호를 들었다. 시민들을 공격하는 이 동료 시민들이 곧 반지성 정치인들과 극렬 지지자들이다.


하지만 윤석열이 처럼회나 다수결 독재 같은 걸 겨냥해 취임사를 쓰지는 않았다고 봐야 대한민국의 체면과 국격이 선다. 그는 ‘세계 시민들’을 향해 자유와 지성, 합리 옹호를 호소하며 우리도 그 책임을 다하겠다고 다짐했다.


이런 ‘스케일’을 위해 통합이니 협치니 공정이니 하는, 하루에도 몇 번씩 방송과 신문 지상에 나오는 말들은 생략했다. 케네디의 1961년 취임 연설 중 가장 유명한 대목을 다시 읽어보면 윤석열의 의중이 읽힌다.


“My fellow citizens of the world: ask not what America will do for you, but what together we can do for the freedom of man.”


“나의 동지 세계 시민 여러분: 미국이 여러분을 위해 무엇을 해 줄 것인가를 묻지 말고, 우리들이 서로 힘을 합해 인간의 자유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가를 물으십시오.”


윤석열은 케네디의 이런 요구(의무 부담) 화법 대신 ‘연대’라는 단어를 골랐다.


‘세계 시민 여러분, 자유민주주의는 평화를 만들어내고, 평화는 자유를 지켜줍니다. 그리고 평화는 자유와 인권의 가치를 존중하는 국제사회와의 연대에 의해 보장됩니다. 일시적으로 전쟁을 회피하는 취약한 평화가 아니라 자유와 번영을 꽃피우는 지속 가능한 평화를 추구해야 합니다.’


문재인 시대에 정치적 양극화는 극심해졌다. 실패하고 떠나는 대통령 지지율이 들어오는 새 대통령 지지율보다 더 높다. 정상이 아니다. 나라가 반으로 쫙 갈라졌다. 취임사에서 내놓았던 통합, 소통, 공정, 중립, 소탈 같은 ‘거룩한’ 약속들은 거의 다 이행되지 않았고, 확실하게 이뤄낸 건 이것 하나뿐이었다.

“지금 제 가슴은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나라를 만들겠다는 열정으로 뜨겁습니다.”

글/정기수 자유기고가(ksjung7245@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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