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정애의 시시각각] 윤 대통령의 독특했던 취임사
'민족'은 0번, 대신 '시민'은 15번
민주주의 언어..실천 의지가 관건
역대 대통령들의 취임사 골격은 엇비슷했다. 민족사는 상찬하고 대통령 자신은 새 시대를 여는 인물로 묘사하며 국정 전반에 걸쳐 수많은 약속을 했다. 전임 대통령의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나라를 만들겠다”가 한 예다.
윤석열 대통령은 달랐다. 3450자 분량 중 ‘자유’를 35차례 언급하고 '통합'은 한 번도 안 했다는 것 이상이다.
우선 청자(聽者)가 세계로 확대됐다. 민족주의·국가주의적 색채는 대단히 희석됐다. 대표적인 게 ‘민족’의 부재다. “민족주의적 감성과 집단 무의식은 한국인에게 마음의 습관”(윤평중 한신대 명예교수)이다. 윤 대통령은 이를 동원하지 않았다. 정말이다. YS(김영삼)는 “어느 동맹국도 민족보다 더 나을 수는 없다”고 말했다. 문재인 전 대통령은 취임사에선 언급하지 않았으나 평양에서 “남쪽 대통령”이라며 “우리 민족은 함께 살아야 한다”고 했다. 당시 “대통령부터 자신이 민족의 지도자인지, 대한민국 군 통수권자인지 분간을 못한다”(최진석 서강대 명예교수)는 질타가 있었다.
대신 ‘시민’이 자리했다. 원래 “민주주의는 정부와 시민이라는 개념이 상응하는 정치체제”(박상훈 국회미래연구원 초빙연구위원 등)다. 불행히도 우리는 시민을 쓸 자리에 ‘국민’을 써 왔다. 대통령들도 그래서 노무현·박근혜 전 대통령의 취임사엔 시민이 전무했다. 문 전 대통령의 경우 한 번 등장하는데 (서울)시민 뉘앙스다. “퇴근길에 시장에 들러 마주치는 시민들과 격의 없는 대화를 나누겠다”고 했다. 헌법이 국민 일색이어서 그럴 수 있다. 그러나 제헌 때부터 “국민은 국가 우월의 냄새를 풍겨 국가라 할지라도 함부로 침범할 수 없는 자유와 권리의 주체로서의 사람을 표현하기엔 반드시 적절하지 못하다”(유진오)는 시각이 있었다.
윤 대통령은 '시민'을 15차례 썼다. 시민의 부활이라고 할 만했다. 민주주의의 보편 가치인 자유, 더 나아가 인권·연대·박애까지 말했다. 역대 대통령 중 자유에 대해 기술한 건 YS 정도로 “우리의 자유는 공동체를 위한 자유여야 한다”고 했다. 윤 대통령의 자유는 더 확장됐다. 영국 정치인인 윌리엄 베버리지 식(“자유는 정부의 자의적인 권력에서 벗어나는 것 이상을 의미한다. 결핍과 누추함, 다른 사회적 악에 매이는 경제적 예속에서 벗어난다는 의미다. 굶주리는 사람은 자유롭지 못하다”)이다. 윤 대통령은 시선을 밖으로도 돌려, 세계를 연대의 대상으로 삼았다. “국내 문제와 국제 문제를 분리할 수 없다”고 했다. 한국 또는 한반도 중심의 일국주의 사고에서 벗어나려는 듯했다.
독특했다. 대통령실 사람들의 말을 종합하면 여러 의견을 축적하는 과정에서 두 가지 결론에 도달했다고 한다. 기존 취임사와 달리 국정 운영 철학과 비전을 설명하고 국민만이 아닌 세계에 보내는 메시지여야 한다고 말이다. 한 참모와는 이런 대화를 나눴다.
-세계 시민에게 말한 건 처음이다.
“우리가 이미 선진국이라고 생각하는 나라들에 우리가 어떤 길을 갈 거라고 말해준 거다. 가치를 공유한 선진 동맹국과 연대하고 협력하겠다는 의미다.”
-대체로 서구민주주의 개념이다.
“우리가 서구 수준의 정신, 이성과 합리성에 기반한 국가가 될 것이란 도전장을 내민 것이기도 하다.”
-민족을 언급하지 않은 이유는.
“민족은 헌법적 개념이 아니다. 윤 대통령이 북한을 언급한 건, 헌법에서 대통령에게 평화통일에 대한 의무를 주어서다. 대통령은 헌법이 담고 있는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 인권 이런 걸 하겠다고 한 거다.”
실제 헌법 66조 3항에 대통령의 평화적 통일을 위한 성실한 의무를 규정했다. 정치를 취재해 온 입장에선 민주주의의 언어라 반가웠다. 그러나 의문이 든다. 윤 대통령은 과연 자신이 말한 수준의 민주주의형 지도자인가. 가치관은 알겠다. 실천할 의지와 실력이 있을까. 주권자인 시민이 위임한 인사권 행사를 보면 쉽게 판단을 내리기 힘들다.
고정애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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