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의 힘'이 오늘의 독일 만들었다

김남중 2022. 5. 12. 20: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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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길] 독일은 왜 잘하는가
존 캠프너 지음, 박세연 옮김, 열린책들, 456쪽, 2만3000원
2019년 12월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왼쪽)가 나치의 유대인 학살이 자행된 폴란드의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 강제수용소를 찾아 ‘죽음의 벽’ 앞에서 묵념하고 있다. 독일 현직 총리가 이 곳을 찾은 것은 세 번째였다. 당시 방문 연설에서 메르켈은 “그 범죄를 기억하는 것은 절대 끝나지 않을 의무”이며 “이러한 책임을 인식하는 것은 우리 국가의 정체성의 일부”라고 말했다. 열린책들 제공


“독일은 국가주의와 반계몽주의, 그리고 두려움의 시대에 유럽 최고의 희망이다.”

이 책의 제목은 ‘독일은 왜 잘하는가’이고 부제는 ‘성숙하고 부강한 나라의 비밀’이다. 어쩌면 ‘영국은 왜 못하는가’라는 부제를 붙이고 싶지 않았을까 싶다. 전후 75년간 독일이 이룬 성공을 분석하면서 과거의 영예를 잃어버린 영국의 실패를 자꾸 환기하기 때문이다.


저자 존 캠프너(60)는 영국의 저널리스트 출신 국제문제 평론가다. 독일어를 공부하고 20대부터 동독과 서독을 오가며 특파원으로 활동했다. 2020년 영국, 2021년 독일에서 출간된 이 책은 두 나라에서 모두 이례적으로 받아들였다. 전쟁범죄를 기억하며 좀처럼 자기 나라를 칭찬하지 않는 독일인들은 독일이 거의 모든 측면에서 세계의 모범이라는 평가에 당혹스러워했고, “우리는 그들을 두 번이나 물리쳤다”며 독일인을 조롱하는 데 익숙한 영국에선 유명 언론인이 독일을 극찬한 것에 놀랐다.

“오늘날의 독일은 세상이 봐왔던 최고의 독일이다.” 책은 2019년 미국 정치평론가 조지 윌이 쓴 문장을 인용하며 시작한다. 하지만 이 책의 목적은 지금의 독일이 세계 최고임을 입증하는 게 아니다. 왜 세계 최고가 될 수 있었는지 분석하는 것이다. 저자는 이를 위해 다른 어떤 나라도 할 수 없었던, 독일만이 가능했던 몇 가지 선택을 깊게 조명한다.

우선 독일의 과거사 정리를 들 수 있다. 독일인들은 나치즘에 대한 속죄 의식을 DNA처럼 간직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실제로 독일인들이 대학살을 비롯한 끔찍한 만행의 진실을 있는 그대로 대면하기까지는 전쟁 후 20년의 세월이 걸렸다.” 전쟁이 끝난 후 전범과 부역자 처벌은 미진했고, 나치 정권의 고위 간부와 중간 관리자 다수가 복직했다. 1960년대에 들어서도 독일에서 전쟁 범죄에 대한 연구나 출판은 제대로 이뤄지지 못했다.

여기에 젊은 세대가 맞섰다. 독일 젊은이들은 68년 시위를 계기로 부모 세대의 역사와 관련한 대답을 요구했다. 더 이상 침묵과 반쪽짜리 진실, 거짓말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70년 폴란드를 방문한 빌리 브란트 서독 총리의 무릎 꿇기 사과, 79년 독일에서 방영된 미국 NBC 미니시리즈 ‘홀로코스트’, 그리고 “5월 8일은 자유의 날이었습니다. 그날은 잔인함으로부터, 국가 사회주의 전제 정치로부터 우리 모두를 해방시켰습니다”라고 한 리하르트 폰 바이츠제커 대통령의 85년 나치 항복 40주년 기념 연설이 독일을 바꿨다.

독일은 숨기지 않고 고백함으로써 과거를 극복하는, 다른 전범 국가들과 다른 방식을 찾아냈다. 잊지 않고 기억함으로써 단단한 민주주의로 나아가는 길을 찾아냈다. 이런 방향은 여러 논란을 거치면서도 지금까지 굳건하게 이어지고 있다.

89년 베를린 장벽 붕괴와 90년 독일 통일 역시 필연이나 운명이 아니었다. 선택이었다. 통독 이후 독일의 안정과 번영 역시 예정된 게 아니었다. 통일 과정이 평화적으로 흘러가지 않을 수 있었고 나라를 파산으로 몰아갈 수도 있었다. 저자는 옛 동독 지역을 둘러보며 아직 해결되지 못한 지역 불평등과 주민들의 소외감을 전한다. 동서 갈등은 지금도 뜨거운 문제다. 그러면서도 “어떤 다른 나라가 그렇게 적은 충격으로 가엾은 동포를 과감히 끌어안을 수 있었을까”라고 묻는다.

독일은 지난 30년간 동독 지역 재건 사업에 2조 유로(약 2700조원)를 쏟아부었다. 독일 납세자는 2021년까지 동독 지역 재건을 위해 소득세 외에 5.5%를 추가로 납부했다. “대체 어느 나라가 졸리(Soli)라고 하는 연대세를 도입한단 말인가.” 저자의 찬탄이 이어진다.

또 하나 경이로운 장면이 있다. 2015년 독일이 시리아 난민 100만명 수용을 결정한 일이다. 그 규모는 전체 유럽이 받아들인 시리아 난민의 절반이 넘는 것이었다. 16세 이상 독일 인구의 절반 이상이 다양한 방식으로 난민을 지원하는 데 참여했다. 저자는 “그것은 독일이 보여준 최고의 모습이었다”고 평가했다. 그는 “어떤 다른 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절박한 처지에 놓인 100만명이 넘는 난민을 받아들일 수 있었을까”라며 “어느 나라도 관용의 차원에서 독일을 따라잡지 못했다”고 덧붙였다.

난민에게 국경을 열기로 한 메르켈 총리의 결정에 대해 한 역사가는 “그것은 독일의 전쟁범죄에 대한 거대한 도전적 배상이었다”는 해석을 내놓았다. 메르켈은 2019년 “그 범죄를 기억하는 것은 절대 끝나지 않을 의무”라며 “이러한 책임을 인식하는 것은 우리 국가의 정체성의 일부이자 계몽되고 자유로운 사회로서 우리 자신을 이해하는 일”이라고 연설했다.

독일 경제 역시 ‘기적’이라는 단어로밖에 설명하기 어렵다. 나라를 폐허로 만든 전쟁이 끝나고 20년이 지난 68년 서독의 경제 규모가 영국을 앞질렀다. 2008년 경제위기 극복이나 최근의 코로나19 극복에서도 독일 경제는 경쟁력을 입증했다.

저자는 독일 경제의 강점으로 중소기업과 ‘사회적 시장’에 주목한다. 특히 자유시장경제에 집중하면서도 생산된 부의 공정한 재분배를 추구하는 독일의 사회적 시장경제는 서구의 시장경제와 구분되는 특징이다. 저자는 “독일은 오래전부터 경제성장과 사회적 포용을 동시에 추구했다”며 “독일은 규제받지 않는 자유시장과 대처(영국 마거릿 대처 전 총리) 정책의 과잉에 의존하지 않고서 부를 창출했다”고 전했다.

세계적인 혁신기업가들은 성취를 내세우지만 독일 기업가들은 공동체에 대한 책임에 더 큰 가치를 부여한다. 독일 경제는 혁신에 느리다거나 원칙에 집착한다는 비판을 받곤 한다. 그러나 위기에서 매번 저력을 발휘했다. 저자는 독일을 ‘숙고적인 사회’라고 정의한 영국 건축가 데이비드 치퍼필드의 말을 전한다. “우리는 성공 중심의 문화입니다. 반면 독일에서는 그 의미에 대한 논의가 활발하게 이뤄지고 있습니다.”

책은 독일이 과거사를 극복한 과정, 통일을 이룬 과정, 이민을 받아들인 과정, 기업을 운영하는 방식, 이웃과 공동체를 대하는 태도 등을 살펴보며 어떻게 강하고 매력적인 국가로 만들어지는지 보여준다. 독일의 한계와 현재 직면한 골치 아픈 문제들도 다룬다.

저자는 오늘의 독일을 만든 가장 중요한 요인으로 ‘기억의 힘’을 꼽는다. 1945년 독일은 새로 시작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에겐 전쟁과 홀로코스트, 분열로 점철된 자신의 역사로부터 얻을 수 있는 긍정적인 준거점이 거의 없었다. 도전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선 숙고하고 또 숙고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국가가 역사의 교훈을 배우지 못할 때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자신들이 가는 길에 대해 경계심을 유지하며 실수하지 않으려 했고, 어떤 경우에도 공동체와 사회의 결속을 우선했다.

독일은 그렇게 속죄와 안정을 거쳐 다른 나라는 따라오기 힘든 성숙함의 단계에 도달했다.

김남중 선임기자 njkim@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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