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진하리라, 죽는 날까지".. 사후에 이룬 '작가의 꿈'

김남중 2022. 5. 12. 2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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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많은 이야기를 그 오랜 세월 어떻게 품고만 살았을까.

지난해 연말 이 글이 SNS와 커뮤니티에서 화제를 모았고 할머니는 사후에야 그토록 원하던 작가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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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후에 자신의 첫 책을 가지게 된 이순자 작가. 54세에 문학 공부를 시작한 그는 60대 노인의 취업 경험을 기록한 논픽션 ‘실버 취준생 분투기’로 지난해 매일신문 시니어문학상에 당선했지만 한 달 후 세상을 떠났다. 늦은 나이에 여러 가지 직업을 전전하면서도 창작열을 불태웠던 그의 유고들이 시집과 산문집으로 묶여 나왔다. 휴머니스트 제공


이 많은 이야기를 그 오랜 세월 어떻게 품고만 살았을까. 좋은 글은 어떻게든 세상에 알려지게 마련일까. 이순자 할머니의 유고집 두 권을 보며 든 생각이다.

이 할머니는 지난해 8월 급성 심근경색으로 세상을 떠났다. 향년 68세. 매일신문 시니어문학상 논픽션부문에 당선된 지 한 달 만이었다. 당선작인 ‘실버 취준생 분투기’는 62세에 취업 전선에 나선 본인의 경험을 기록한 것이다. 지난해 연말 이 글이 SNS와 커뮤니티에서 화제를 모았고 할머니는 사후에야 그토록 원하던 작가가 됐다.

황혼 이혼을 했고 청각장애가 있는 이 할머니는 54세에 사이버대 문예창작과에 입학해 문학 공부를 시작했다. 호구지책도 필요했기 때문에 취업도 해야 했다. 여러 가지 일을 전전했고 호스피스와 요양보호사로 오래 일했다. 세상을 떠나기 2년 전 기초생활수급자가 되면서 비로소 글쓰기에만 몰두할 수 있었다. “기초생활이 해결되었으니, 이제 쓰기만 하면 된다.… 이제 시작이다. 정진하리라, 죽는 날까지.”

그렇게 쓴 글들이 할머니의 노트북에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유가족, 함께 글을 쓰던 문우들, 고인의 스승이었던 시인 이문재 등이 출판사와 함께 유고를 추려 두 권의 책으로 묶었다. 작가 이순자의 시집과 산문집이다.

꿈이 다시 나를 찾아와 불러줄 때까지, 이순자 지음, 휴머니스트, 192쪽, 1만2000원


시집 ‘꿈이 다시 나를 찾아와 불러줄 때까지’는 어린아이부터 노인들까지 모두 읽을 수 있다. 소박하면서 애틋하고 무엇보다 아름답다. 특히 ‘사랑’이란 제목의 연작시 6편은 한 편 한 편이 다 놀랍다. 산문집 ‘예순살, 나는 또 깨꽃이 되어’도 솔직하고 따뜻하다. 작가를 세상에 알린 글 ‘실버 취준생 분투기’가 여기 수록돼 있다.

예순살, 나는 또 깨꽃이 되어, 이순자 지음, 휴머니스트, 256쪽, 1만5000원


시는 산문처럼 이야기가 가득하고, 산문은 시처럼 리드미컬하다. 무엇보다 작가는 가난하고 외롭고 늙고 아픈 사람들의 세계를 애틋하게 그려내는 데 탁월하다. 그곳은 자신이 살아온 세계이기도 하다. 문간방 살던 순진네 가족의 낮잠을 묘사한 시 ‘문간방 순진네’를 보자.

“…약주에 취한 아버지와/ 술지게미에 취한 어린 딸/ 나란히 뉘어놓고/ 찌그러진 주전자 탈탈 털어 마시고/ 딸이 먹던 술지게미 닥닥 긁어 먹고/ 아이에게 팔베개 베어주고 순진네도 잠들었다/ 아버지의 바리톤과 어머니의 알토와/ 순진의 가르릉 앓는 소리/ 단칸방에 복사꽃 향기 무장, 무장 피어나/ 빈 쌀독에 담고 싶은 정경이다”

작가는 우리가 살면서 겪는 고통과 슬픔에 의미를 부여하고,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 존엄을 지키고 더 어려운 이들을 돌보는 태도를 잃지 말라고 얘기한다. ‘아직은 누군가의 든든한 벽이고 싶다’는 글에서 독거 노인인 자신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있고 기꺼이 그들의 벽이 되려고 노력하겠다고 말한다. “보이지 않는 공간에서 우리가 서로의 등에 기대고 있는 걸 아니까. 하나가 등을 떼면 벽이 무너지니까.”

책을 읽다 보면 여러 번 뜨거운 감정을 느끼게 된다. 가족이나 과거를 건드리기 때문만은 아니다. 가난과 노년, 외로움 속에서도 순하고 따뜻한 마음을 닦아가며 정진하는 한 어른의 모습이 자꾸 보이기 때문이다.

밑줄을 치고 여러 번 다시 읽게 하는 문장들도 곳곳에서 만난다. “눈물에 눈물을 보태는 일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 그렇게 하지 않기로 했다”(‘사랑 2’) “세상을 이길 수 없을 땐/ 등뼈를 둥글게, 둥글게/ 구부리던 어머니”(‘둥근 가슴’) “내게서 떠나는 것들이/ 조용히 문지방을 넘게 하시고/ 다가오는 것들을/ 가만히 받아 안게 하소서”(‘신년의 기도’) 같은 문장들이 그렇다.

작가의 딸은 산문집 서문에 “사랑받지 못했기에 더 사랑할 줄 알았던, 가지지 못했기에 더 채워줄 줄 알았던 이 작은 이의 이야기가 누군가의 외롭고 허기진 마음을 위로하리라 믿습니다”라고 적었다.

김남중 선임기자 njkim@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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