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이 한국 대통령을 응원할 때 벌어지는 일 [김종성의 '히, 스토리']

김종성 2022. 5. 12.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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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성의 히,스토리] "윤석열 대통령 든든하게 생각한다"는 일본 총리

[김종성 기자]

  윤석열 대통령이 10일 오후 용산 대통령실 접견실에서 일본의 하야시 요시마사 외무상으로부터 기시다 총리의 취임 축하 친서를 전달받고 있다.
ⓒ 연합뉴스
 
기시다 후미오 총리가 윤석열 대통령에게 기대감을 표시했다. 대통령 취임식 축하 차 10일 방문한 하야시 요시마사 외무대신을 통해 기시다의 친서가 전달됐다.

친서에서 기시다는 "(윤 대통령이) 한일관계 개선에 강한 의욕을 보이는 것을 매우 든든하게 생각하고 있다", "한·일 간 장애물을 제거하고 전체적인 한일관계 개선으로 이어갈 수 있도록 리더십을 기대한다"라고 밝혔다. 윤석열 대통령을 '든든하게' 생각하고 '기대감'을 거는 자민당 정권과 일본 정부의 분위기를 반영하는 친서다.

외국 정부가 한국 대통령을 칭송하거나 긍정적으로 평가하면 대한민국의 국격도 높아지고 국민들의 자부심도 올라간다. 민주화 투사로 세계적 존경을 받은 김대중 대통령 때 그런 일들이 많았다.

그런데 일본 정부에서 그런 칭찬이 나올 때는 사정이 달라진다. 일본이 한국 대통령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면 우리 국민들이 마음고생을 하게 되는 일이 많았다. 일본이 특별히 기대감을 걸었던 한국 대통령이 박정희와 전두환이었다는 점이 시사하는 바는 적지 않다.

서중석 성균관대 교수와 김덕련 전 <오마이뉴스> 기자의 대담인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제7권은 자유민주당(자민당) 정권이 1961년 박정희 쿠데타와 1972년 박정희 유신체제 선포를 지지한 일을 설명하는 대목에서 "일본 자민당 정권의 극우 실세들이 이렇게 군정에 호의적인 태도를 취하는 건 나중에 유신체제에 대해 미국과 또 다르게 아주 호의적인 반응을 보이는 것과 일치한다"라고 말한다.

그런 뒤 "이들은 1979년 12·12쿠데타, 1980년 5·17 쿠데타 때 신군부 그리고 그 후 전두환 정권을 적극 지원한다"라며 "일본 극우세력이 어떤 사람들이고 왜 그렇게 했는지를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라고 덧붙인다.

한국 대통령이 아들? 

1961년 5월 16일 군사정권을 수립한 박정희는 1962년 3월 24일 대통령 권한대행이 되고 1963년 10월 15일 대선을 거쳐 12월 17일 대통령에 취임했다. 1919년 3·1 운동 이후에 수립된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계승했으므로 여전히 대한민국 정부이기는 했지만, 이승만 및 장면 정권과 확연히 대비되는 헌법상의 정치 체제를 표방했다 하여 제3공화국으로 불리는 대한민국 정부가 이날 출범했다.

이때 일본 정부를 대표해 축하 사절로 방문한 인물이 오노 반보쿠(大野伴睦) 자유민주당 부총재다. 1890년에 태어난 그는 이토 히로부미가 창당한 입헌정우회에서 정치를 시작해 중의원 의장 등을 역임한 거물급 정치인이었다.

그가 입국한 날은 취임식 전날인 12월 16일이다. 다음날 발행된 <조선일보> 기사인 '경축사절들 잇달아 입경(入京)'에 따르면, 그는 입국 직후 발표한 성명에서 제3공화국의 탄생을 축하했다. "한·일 양국 간의 우호협력관계의 긴밀화가 제3공화국의 커다란 업적의 하나로 길이 역사상에 남게 될 것이다", "한일회담에 있어서도 현저한 진전이 있었으며 제(諸) 현안 타결에 관한 입장도 점차로 접근되어 가고 있어 매우 기대된다"라고 표명했다.

'박정희가 매우 기대된다'는 오노의 성명은 입국 직후에 소개됐다. 그런데 취임식 뒤에는 훨씬 강도 높은 또 다른 발언이 알려졌다. 그가 일본을 떠나기 전에 했던 발언이다. 12월 21일 자 <경향신문> 6면 좌상단 기사는 <아사히신문> 보도를 인용해 '망발로 규탄받은 사절'이라는 제목으로 이렇게 전했다.
 
대야(大野) 씨는 박 대통령의 취임식에 일본 경축사절 대표로 향발하기 직전 일본 기자들에게 '박 대통령과는 서로 부자간이라고 자인할 만큼이나 친한 사이'라고 전제하고 '아들의 경사스런 무대를 보게 되는 것이 무엇보다 기쁘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국제적 주목을 끄는 일본 정부 대표의 한국 대통령 취임식 참석을 앞둔 시점에, 그것도 기자들이 앞에 있는 데서 한국 대통령 취임식을 '아들의 경사스런 무대'로 지칭했다. 이 발언으로 인해 그는 일대 홍역을 치렀다. 18일부터 국내 여론이 나빠졌고, 20일에는 숙소인 조선호텔 앞에서 시위가 벌어졌다.
그는 서울을 떠날 때 매우 조심스럽게 행동했다. 위 기사는 "서울로 들어갈 때는 그의 승용차에 일장기를 달고 신나게 휘날렸던 것이 갈 때에는 깃발도 달지 않았다"라고 보도했다.
  
 한일회담을 막후에서 성공시킨 오노 반보쿠 일본 자민당 부총재. 사진은 오노가 1962년 12월 대규모 방한단을 이끌고 방한했을 때 박정희 의장을 만나는 장면. 왼쪽부터 박의장, 최영택 주일대표부 참사관, 오노 부총재.
73세의 노련한 정치가인 그가 상당히 위축돼 있었다는 점은 공항 상황에서도 나타났다. 위 보도에 따르면, 초췌하고 불안한 낯빛으로 공항에 나타난 그는 귀빈실도 거치지 않고 곧바로 대합실로 직행했으며, "부자지간 표현은 어떻게 된 일입니까?"라는 기자들의 질문에 "표현의 차이라고!"라는 답변만 되풀이했다. "그의 방한은 이번이 마지막이 될 것이라는 것이 대야 씨를 떠나 보낸 뒤의 공항 중론이었다"라는 말로 기사는 끝난다.

오노 부총재는 일본 정부 대표 자격을 가진 상태에서 박정희와의 부자 관계를 운운하며 기대감을 표시했다. '박정희는 내 아들이라서 기대된다'라고 말했다. 중의원 의장까지 지낸 인물이 자신이 일본 정부를 대표하고 있다는 사실도 의식하지 못한 채 그런 말을 했을 리는 없으므로, 그의 발언은 자민당과 일본 정부의 분위기를 반영하는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일본 정부 입장에서 볼 때 그 같은 기대감은 상당 부분 충족됐다. 박정희는 국민의 반대를 무릅쓰고 한일기본조약 및 부속 협정 체결을 강행했고, 일본을 우위에 두는 수직적 경제 분업 체계를 세웠다.

하지만 장기적으로 보면 박정희는 일본을 불리하게 만들었다. 3·1 운동 이후 최대 반일 운동인 한일협정 반대 투쟁이 그의 취임 얼마 뒤에 일어났다. 오노 망언으로 반일 기운이 고조된 1964년 1월 그는 한·일 국교정상화를 조속히 실현하겠다고 선언했고, 3월 24일 약 8만 명의 국민이 한일회담 반대 시위를 했다. 6·3 운동 혹은 6·3 사태 등으로 불리는 역사적인 반일·반(反) 박정희 투쟁이 일어난 것이다.

그가 촉발한 반일 감정은 한일관계를 불안하게 함은 물론이고, 한·일 양국을 앞세워 북한·중국·러시아를 견제하려는 미국의 동아시아 정책까지 불안하게 만들었다. 그때 더욱 공고해진 우리 국민의 분노가 그 후로도 식지 않고 지금의 위안부·강제징용 소송으로까지 이어지면서 일본의 국제적 위상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끼치고 있다. 박정희가 일본에 이익만 준 것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오노 부총재는 한일관계를 위한 박정희의 역할이 '제3공화국의 커다란 업적의 하나로 길이 역사상에 남게 될 것'이라고 칭송했다. 하지만 지금까지 길이 남고 있는 것은 한국 내 반일 감정뿐이다. 한국에서 확산되는 '일본 전범국가' 이미지로 인해 일본이 1990년대 초반부터 추진해 온 안보리 상임이사국 진출이 아직까지 실현되지 못하는 측면도 크다. 오노 부총재와 일본 집권층이 사람을 잘못 봤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핵심은 사과와 배상

한일관계를 복원하자는 목소리는 5·16 이전에도 있었다. 대일 강경 기조를 천명한 이승만 정권 때도 야당인 민주당과 여당인 자유당 일각에서 국교 정상화를 추진하자는 목소리가 나왔다. 4·19 직후의 허정 과도정부나 장면 내각 때도 마찬가지였다.

이때는 정치 지도자들이 '한일관계를 복원하자'고 주장해도 국민이 별다른 거부감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러나 박정희 때는 제2의 3·1 운동에 비견될 만한 반일 시위가 나라를 뒤흔들었다. 박정희 정권이 총과 탱크를 앞세워 민주주의를 억압하는 상황에서도, 국민은 두려움 없이 박정희의 한일관계 복원 정책에 반기를 들었다.

국민이 박정희의 대일 정책을 유독 강렬히 반대한 이유 중 하나는 한일 관계를 다루는 그의 방식 때문이었다. 그는 공식 사과와 배상 없이 식민 지배 문제를 봉합해버리려 했다. 약간의 경제 지원을 받는 조건으로 35년의 한(恨)을 대충 싸매버리려 했다. 그 때문에 한일 관계를 도리어 악화시켜 놓고 말았다. 그 후유증이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오노 때처럼 지금의 기시다 내각도 '든든하다', '기대된다' 등의 표현을 써가며 윤석열 정부를 응원하고 있다. 기시다 내각이 바라는 것은 사과·배상 없이 한일 관계를 복원하는 것이다. 판결이 이미 확정된 위안부·강제징용 재판도 없었던 일로 해주기를 바라고 있다. 아베 신조가 상왕인 기시다 내각이 윤석열 정부에 바라는 것은 5·16 이후에 일본 집권층이 박 정권에 바란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하지만 사과·배상 없이 한일 관계를 복원하려는 시도가 윤석열 정부에서 나온다면, 1964년의 반일 운동이 재현될 가능성이 저절로 높아지게 된다. 그래서 윤석열 정부가 기시다 내각을 만족시킬 방법은 현실적으로 별로 없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도 '든든하고 기대된다'는 표현이 나오는 것은 일본 집권층이 이번에도 사람을 잘못 본 게 아닌가 하는 느낌을 줄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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