낮술 한 잔에 삶이 새로워진다면? 영화 '어나더 라운드'와 '사제락' [쿠킹]

정인성 2022. 5. 12. 0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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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인성의 〈영화로운 술책〉
여러분은 술에 무엇을 곁들이시나요. 맛있는 안주, 아니면 신나는 음악? 혹시 소설과 영화는 어떠세요? 재미있는 이야기와 함께 술을 마시는 시간은 색다른 몰입감을 선사해 줍니다. 술 마시는 바와 심야서점이 더해진 공간, ‘책바(Chaeg Bar)’가 탄생한 배경이기도 하죠. 책과 영화 속에 등장하는 술은 단순한 소품을 넘어 등장인물의 심리, 장면의 분위기, 상황의 메시지를 전달하곤 합니다. 책과 영화 그리고 술을 사랑하는 정인성 대표가 맛있는 술과 가슴속에 깊이 남을 명작을 함께 추천해 드립니다.

영화 '007 카지노 로얄'에서 르쉬프 역할로 등장한 매즈 미켈슨의 모습. 사진 007.com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자신만의 인생 ‘빌런’이 있다. 내가 응원하는 주인공을 괴롭히고 임무를 끝까지 방해하는 그런 나쁜 녀석들 말이다. 빌런이 극악무도할수록 영화의 긴장감은 올라간다. 보는 내내 온몸에는 땀이 맺히고, 끝난 뒤에는 ‘좋은 영화’라고 기억에 남는다. 그런 의미에서 내 인생 빌런은 영화 ‘007 카지노 로얄’의 르쉬프다. 조커나 타노스처럼 이름만 들어도 고개가 끄덕여지는 빌런은 아니다. 하지만 제임스 본드를 고문하면서 육중한 추로 그의 낭심을 강타한 인물이라고 설명하면, 눈이 번쩍! 할지도 모르겠다. 그 장면을 볼 때마다, 마치 내 고통인 것처럼 아랫배를 어루만지며 괴로워했다. 나였으면 진작에 불었을 거야, 모든 것을 말했겠지, 라고 혼잣말을 중얼거리면서.

영화 속 르쉬프는 피도 눈물도 없는 냉혈한이지만, 실제로는 피눈물을 흘리는 미스터리한 인물이기도 했다. 이 역할을 통해 덴마크 배우 매즈 미켈슨(Mads Mikkelsen)은 전 세계에 이름을 알렸다. 그런데, 내 마음속에 영원한 빌런이었던 그가 한없이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격의 없이 춤추는 영상을 보게 됐다. 그것도 각양각색의 술을 마시면서. 영화 ‘어나더 라운드’의 트레일러였다. 서둘러 영화를 보고 싶은 마음에 두근거림이 멈추질 않았다. 그날 밤, 키핑해 둔 ‘로얄 살루트(Royal Salute)’ 21년을 꺼낸 뒤 경건한 마음으로 재생 버튼을 눌렀다.

영화 '어나더 라운드'에서 술을 마시고 춤을 추는 매즈 미켈슨의 모습. 사진 엣나인필름


‘인간은 혈중 알코올 수치가 부족하다. 0.05%가 유지되면 더욱 느긋해지고, 음악적이고, 개방적이 된다.’

기막힌 가설을 던지며 영화는 시작한다. 노르웨이 정신과 의사인 핀 스코르데루(Finn Skårderud)의 주장이란다. 혹시 실존 인물인가 궁금해서 구글링했더니 위키피디아에 사진까지 존재했다. 근거 있는 가설이었다. 참고로 혈중 알코올 0.05%는 소주로 두세 잔, 맥주로는 두 캔 정도 마시면 도달하는 수치다.

니콜라이는 마흔 번째 생일을 축하하던 밤, 흥미로운 가설을 제안한다. 사진 엣나인필름


같은 고등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니콜라이, 마르틴, 페테르, 톰뮈는 일상이 지루하고 때때로 우울하다. 수업에 열정이 사라진 것은 물론이고 가족들과의 관계도 소원해졌다. 네 명이 모여 마흔 번째 생일을 축하하던 밤, 니콜라이는 가설을 던지며 실험을 함께 할 것을 동료들에게 제안한다. ‘언제나 0.05%의 혈중알코올농도를 유지할 것, 단, 저녁 여덟 시 이후엔 손대지 말 것’이란 제안이다. 여덟 시의 근거는 작가 헤밍웨이로부터 왔다. 그는 소문난 애주가였지만, 다음 날 새벽부터 글을 쓰기 위해 저녁 여덟 시 전까지만 술을 마셨다. 그렇게 그들은 매일 낮술을 마시기 시작한다. 목적은 엄연히 일과 삶의 기쁨을 위해서다.

영화 '어나더 라운드'에서 매즈 미켈슨은 무기력한 삶을 살고 있는 역사 선생, 마르틴을 역을 맡았다. 사진 엣나인필름


매즈 미켈슨이 연기한 마르틴은 역사 선생이다. 아내와 아이들에게는 외면받고, 학생들에게는 수업 내용을 지적받는 무기력한 삶을 살고 있다. 그는 실험에 참여하며 수업 시작 직전에 보드카 ‘스미노프 레드’를 몰래 마신다. 보드카는 무향‧무색‧무취의 증류주다. 음주 사실을 숨기기에 이만한 술도 없으리라. 그리고 그는 수업에서 명강의를 펼친다. 감탄한 학생들은 박수를 보냈다. 마르틴만이 아니라 니콜라이와 페테르, 톰뮈까지, 모두의 삶에 활력이 생긴다. 0.05%는 기적의 수치였다. 이카루스가 태양을 향해 멈추지 않고 날아가듯, 그들 역시 더 높은 도수를 향해 간다. 마음먹고 숙소까지 잡은 날, 니콜라이는 동료들에게 한 칵테일을 소개한다. 그 이름은 바로 ‘사제락’. 보는 순간 놀랐다. 이 영화…, 정말 제대로인데?

사제락(Sazerac)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칵테일 중 하나로 알려졌다. 얼마나 오래됐냐 하면 1860년대에 있었던 미국 남북전쟁 이전에 만들어졌다고 한다. 들어가는 재료는 브랜디, 압생트, 페이쇼드 비터 그리고 설탕이다. 필록세라(포도 재배에 치명적인 타격을 주는 진딧물)로 인해 유럽의 와인 생산량이 줄어든 이후로는 브랜디 대신 라이 위스키(호밀을 주원료로 만든 아메리칸위스키)를 병행해서 사용하기 시작했다.

사제락은 소위 인스타그래머블한 외양은 아니지만, 향과 맛은 매우 훌륭하다. 개인적으로 레몬 필과 압생트 그리고 라이 위스키의 융화된 향을 좋아한다. 사진 정인성


사제락의 핵심은 ‘페이쇼드 비터’다. 비터는 식물성 물질로 쓴맛을 내는 알코올 에센스다. 칵테일의 풍미를 극대화하는 역할을 하는데, 비빔밥에 넣는 참기름과 비슷하다고도 볼 수 있겠다. 사제락에 쓰인 페이쇼드 비터는 미묘한 단맛과 향긋한 꽃향이 나는데, 앙투안 페이쇼드라는 약재상이 1830년대에 개발했다고 알려져 있다. 그가 브랜디에 페이쇼드 비터를 넣어 만든 게 바로 사제락이다. 덕분에 페이쇼드 비터는 사제락의 대체 불가능한 재료가 됐다.

영화에서 니콜라이는 사제락을 소개하며 레시피까지 상세히 알려준다. 이런 상냥한 영화가 다 있을까. 그의 레시피는 다음과 같다. 믹싱 글라스(고등학교 과학 시간에 사용했던 비커를 떠올리면 된다)와 올드 패션드 글라스를 준비한다. 글라스 안쪽 면에 압생트를 골고루 묻히고 믹싱 글라스에 버번위스키 50㎖와 압생트 10㎖ 그리고 페이쇼드 비터 1대시(약 1㎖)를 따른 뒤 각설탕 하나를 함께 넣어 으깬다. 믹싱 글라스 안의 용액을 커다란 얼음과 함께 차가워질 때까지 젓는다. 용액이 차가워지면 얼음이 채워진 올드 패션드 글라스에 따르고, 오렌지 껍질을 사용해 향을 낸다. 압생트와 오렌지의 향이 절묘하게 더해져 달콤하고 쌉싸름한 맛의 사제락이 완성된다.

글라스 내부에 압생트를 묻히는 디테일을 보고 놀랐다. 토마스 빈터베르 감독은 분명 사제락을 즐겨 마셨을 것 같다. 하지만 영화 속 레시피는 바텐더들이 만드는 방법과는 조금 다르다. 버번위스키를 사용하는 경우는 드물며, 오렌지보다는 레몬으로 향을 낸다. 무엇보다도 사제락은 고유의 맛을 즐기기 위해 얼음 없이 마시는 것을 추천한다. 얼음이 녹으면서 점차 맛있어지는 칵테일이 있지만, 사제락은 반대에 가깝다. 잘 만들어진 사제락은 눈물이 글썽여질 정도로 맛있다. 단, 30도가 넘으니 술 잘 마시는 분들에게만 추천한다.

삶의 새로운 변화를 위해 흥미로운 가설을 검증하는 니콜라이, 마르틴, 페테르, 톰뮈. 사진 엣나인필름


그런데, 감독은 수많은 칵테일 중에 왜 사제락을 넣었을까. 앞서 말했다시피 사제락은 세계 최초의 칵테일 중 하나로 꼽힌다. 그야말로 ‘시작’이란 의미가 있는 칵테일이다. 영화 속 네 명의 남자는 본격적인 실험을 앞두고 있다. 삶의 새로운 변화를 위한 실험이다. 술에 관심 있는 니콜라이는 자신들에게 어울리는 칵테일로 자연스레 사제락을 떠올렸을 것이다. 그들의 실험은 과연 어떻게 끝났을까? 영화 ‘어나더 라운드’는 2021년 미국 아카데미시상식에서 국제장편영화상을 수상했다. 작품성은 인정받았으니, 집 어딘가에 보관해둔 술과 함께 영화를 볼 때가 됐다. 책바에서 이어폰 끼고 영화를 보면서 사제락을 함께 곁들이는 것도 추천한다.

정인성 책바 대표, 작가 cooki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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