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리 널뛰자 금융사 채권 평가손 눈덩이..증권사 순익 반토막, 보험사는 RBC '뚝뚝'

배준희 2022. 5. 11. 2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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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권 금리 급등으로 금융사 재무건전성에 경고등이 켜졌다. 금융사의 실질적인 현금창출능력이 훼손된 것은 아니지만 가파른 금리 상승과 이에 따른 각종 재무지표 악화는 금융 조달 비용 상승 등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지적이다.

▶NH투자, 순이익 60%↓

▷채권 운용 초비상

금융투자업계에 따르면 최근 10년물 미국채 금리는 장중 3%를 웃돌았다. 채권 시장의 대표적인 벤치마크인 10년물 금리가 3%를 넘어선 것은 2018년 이후 처음이다. 한국 채권 시장에서도 긴장감이 감돈다. 지난 5월 1일 한국 국채 10년물 역시 3.4% 가까이 오르는 등 금리 불안이 지속되고 있다.

금리 급등이 금융사 채권 평가손실 우려로 이어지는 메커니즘을 이해하려면 두 가지 개념을 먼저 파악해야 한다.

첫째, 기본적인 채권의 속성이다. 채권은 만기와 이자(쿠폰)가 정해져 있는 금융 상품이다. 모든 금융 상품은 미래 현금흐름을 적절한 할인율로 할인해 현재 가치로 환산해 평가한다. 채권은 분자인 현금흐름이 고정돼 있는 반면, 분모인 시장금리는 자꾸 변한다. 이런 이유로 채권 가격과 금리는 서로 반대로 움직인다. 금리가 하락하면(분모 크기 감소) 채권 가격이 오르고 금리가 오르면(분모 크기 증가) 채권 가격이 하락하는 것이다.

두 번째 개념은 듀레이션이다. 듀레이션은 ‘평균적인 투자 만기 기간’ 정도의 개념으로, 주식의 변동성을 뜻하는 베타와 비슷하다. 이 때문에 금리가 뛰면 듀레이션이 긴 장기 채권의 가격이 단기 채권보다 더 빨리 하락해 평가손실이 커진다.

국내 금융사는 수년간 이어졌던 금리 인하 국면에서 채권 포트폴리오를 대부분 장기 채권 중심으로 조정했던 터다. 금리가 오를 때 채권 평가손실이 커지는 것과 정반대 논리로, 금리가 가파르게 하락할 때 듀레이션이 긴 장기 채권 가격이 탄력적으로 상승하기 때문이다. 지금은 상황이 180도 변했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침공 등 예상 못한 돌발 변수가 속출하면서 금리 상승 속도가 가팔랐다.

이미 주요 금융사의 채권 평가손실은 눈덩이처럼 커지고 있다. NH투자증권은 지난 1분기 순이익이 1023억원으로 1년 전보다 60% 급감했다. KB증권의 1분기 순이익은 1159억원으로 1년 전 대비 반 토막 났다. 신한금융투자와 하나금융투자의 1분기 순이익은 1년 전보다 각각 38%, 13% 줄었다. 이재우 한국신용평가 수석연구원은 “50bp(1bp=0.01%포인트)의 장단기 시장금리 상승이 일어난다고 가정할 경우 증권사들의 채권 평가손실 예상 규모는 약 9000억원으로 추산된다”고 분석했다.

▶보험사, 채권계정 재분류 ‘꼼수’

▷농협생명 RBC 비공개 눈총

가장 긴장하고 있는 금융사는 보험사다. 업종 특성상 대부분 만기 10년 이상 장기 채권에 자산이 집중돼 있다. 당장 지급여력(RBC) 비율이 뚝뚝 떨어지고 있다. 보험사는 채권의 회계계정 재분류를 RBC 관리용으로 안일하게 활용하다 역풍에 시달리는 중이다.

보험사가 보유한 채권은 대부분 매도가능자산이나 만기보유금융자산으로 분류한다. 현행 회계 기준에 따르면, 매도가능자산은 공정 가치(Fair Value)로, 만기보유금융자산은 취득 당시 원가(Historical Cost)로 회계장부에 기록한다. 매도가능자산은 당장 시가로 내다 팔 자산은 아니지만 언제든 내다 팔 수 있는 자산으로 보고 금리 변동에 따른 평가손익을 자산에 반영하도록 돼 있다. 만기보유금융자산은 해당 자산을 보유 기간 중간에 손익을 확정할 목적으로 내다 팔지 않고 만기까지 보유할 계획이라는 의미로, 취득 원가로 회계장부에 기록한 뒤 이를 기간별로 상각하도록 돼 있다.

일부 보험사는 보유 채권 상당수를 만기 보유에서 매도 가능으로 계정을 분류하는 ‘꼼수’를 부렸다가 사달이 났다. 코로나19 사태 초기 금리가 제로 수준으로 곤두박질치자 기존 채권자산의 분류 계정을 매도가능자산으로 바꾼 것이다. 이렇게 되면, 회계상으로는 보험사의 자산이 확 좋아진 것 같은 ‘착시효과’가 빚어진다. 코로나 사태로 금리가 뚝 떨어졌으므로 회계상 채권 평가이익이 잔뜩 쌓여 보험사 자산에 반영되고 이는 자본 확충 효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이렇게 회계상 ‘화장발’ 자본을 확충해 RBC 비율을 개선했던 상당수 보험사는 비상이 걸렸다. 초저금리에 다소 안일하게 베팅했던 채권계정 재분류의 부메랑이 고스란히 돌아오고 있어서다.

올 1분기 실적을 공시한 보험사의 RBC 비율은 지난해 4분기보다 많게는 60%포인트 이상 낮아졌다. KB금융지주 계열 푸르덴셜생명의 올 1분기 말 RBC 비율은 281%로, 전분기 말보다 62%포인트 하락했다. 같은 기간 신한라이프의 RBC 비율은 285%에서 255%로 30%포인트 떨어졌고 하나생명도 200%에서 171%로 29%포인트 하락했다. KB손해보험은 179%에서 162%로, KB생명은 187%에서 161%로 악화하면서 두 회사는 금융당국의 권고 수준인 ‘150% 이상’에 근접했다. 금융당국은 RBC 비율이 100% 아래로 떨어지면 보험사에 경영개선 권고 등의 조치를 내린다.

특히 농협금융 계열 두 보험사가 도마에 올랐다. 농협생명과 농협손보는 이번 1분기 실적 공시를 하면서 이례적으로 RBC를 비공개로 했다. 농협생명은 2020년 3분기 RBC 비율을 높이려 보유 채권 대부분을 만기보유증권에서 매도가능증권으로 재분류했다가 지난해까지 RBC 비율이 곤두박질쳤는데 1분기에 수치가 더 떨어져 비공개로 한 것 아니냐는 뒷말을 낳았다. 농협생명의 RBC 비율은 2020년 287%에서 2021년 211%로 1년 만에 76%포인트 하락했다.

문제는 시장금리가 오르는 속도가 워낙 가팔라 이를 금융사의 자체 운용 역량으로 대응하기가 녹록지 않다는 사실이다. 박혜진 대신증권 애널리스트는 “4월 금리 변동성이 더 커졌고 NH투자증권의 1분기 실적 발표에서 채권 운용 관련 대규모 손실이 발생한 것으로 나타났다”며 “증권사들을 다 합칠 경우 2조원대의 손실 발생 가능성이 있다”고 우려했다.

보험사의 경우 뾰족한 해법이 없는 상황이다. 보험사 손익 관리의 키포인트는 부채 듀레이션에 자산 듀레이션을 최대한 맞추는 것이다. 결국 보험 가입자에게 때맞춰 보험금을 돌려주려면 자산-부채 듀레이션을 최대한 일치시켜야 하고 적기에 현금화가 가능한 매도가능자산을 일정 비율 갖고 있어야 한다. RBC 비율을 다시 끌어올리려고 이전처럼 매도가능자산의 계정을 만기보유자산으로 바꿨다간 훗날 또 다른 역풍이 불어닥칠 수 있다.

이런 이유로, RBC 제도 자체를 손봐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보험업계에서는 시장금리가 널뛰기 할 때면 보유 채권계정 재분류를 RBC 관리용으로 악용한다는 지적이 줄곧 제기됐다. 보험연구원에 따르면 2011년 이후 10년간 생보사 24곳 중 13곳이, 장기손해보험을 판매하는 손보사 15곳 중 6곳이 채권 재분류로 RBC 비율을 관리했다. 이런 방식은 보험사의 본질적인 재무건전성을 저해한다는 분석이다. 미국·유럽에 기반을 둔 메트라이프생명(지난해 말 기준 RBC 비율 224%), 라이나생명(349%) 등은 해외 본사의 가이드라인을 따른 덕분에 상대적으로 RBC 비율이 높다.

금융당국은 채권 금리 급등으로 예상되는 금융 리스크를 검토 중이다. 최근 금융감독원은 보험사 최고경영자(CEO)들을 만나 건전성 대책 마련을 논의했다. 보험사들은 RBC 비율이 일시적으로 100%를 밑돌더라도 시정 조치를 유예해줄 것을 당국에 건의했다. 일부 증권사들은 채권 시장 패닉을 막기 위해 채권 시장 안정펀드 등 금융당국의 제도적인 보완을 요구하고 있다. 노건엽 보험연구원 연구위원은 “채권 재분류는 현행 RBC 제도하에서 유용할 수 있지만 이익의 내부 유보, 조건부 자본증권 발행 등 근본적인 자본 확충 노력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배준희 기자]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2158호 (2022.05.11~2022.05.17일자)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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