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공개] 5.18광주 목격한 미국인이 눈물로 쓴 '한글 수기'

소중한 2022. 5. 10. 19: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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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봉사단' 데이비드 돌린저, 1981년 작성.. 5월 21일, 계엄군 헬기 사격 내용 담겨

[소중한 기자]

 
 5.18민주화운동을 목격한 미국인 데이비드 돌린저가 1982년 초 워싱턴DC의 한인교회에서 연설을 하기 위해 1981년 8월(혹은 9월) 직접 한국어로 쓴 수기.
ⓒ 데이비드 돌린저
"오늘 저녁 여러분께 말하고 싶습니다. 글을 쓰면서 눈물이 앞을 가려 이 연설을 준비하기 무척 힘들었습니다."

1982년 초 워싱턴DC의 어느 한인교회. 한 미국인 청년이 그곳에 모인 많은 이들에게 1980년 5월 광주에서 벌어진 일을 한국어로 증언하기 시작했다. 청년의 이름은 데이비드 돌린저(David Dolinger). 대학 졸업 후 '평화봉사단(Peace Corps)' 자격으로 한국땅을 밟았던 그는 5.18민주화운동 당시 광주에 머물며 참상을 생생히 목격했다.

지금도 '광주사태'로 부르는 이들이 있을 만큼 당시로선 금기였던 5.18을, 그것도 사건을 직접 목격한 외국인이 한국어로 증언을 한 건 매우 이례적인 일이다. <오마이뉴스>는 돌린저가 당시 연설을 위해 직접 한국어로 작성한 연설문 수기를 입수했다. 

오는 12일 <나의 이름은 임대운>(호하스)이란 제목의 회고록 발간을 앞두고 있는 돌린저는 이 수기를 전하며 "1981년 8월 혹은 9월에 쓴 것이다. (이 수기를 토대로) 연설을 하긴 했지만 감정이 북받쳐 올라 마무리는 다른 사람이 하게 됐다"고 떠올렸다. 그러면서 "연설을 위해 이 수기를 쓰며 정말 힘들었다. 5.18은 나의 마음에 큰 상처를 남겼다"며 "우리는 계속 5.18과 관련된 개인의 진실을 기록해야 한다"라고 강조했다.

12쪽 분량의 이 수기는 5.18 이후 1년 여 만에 쓰여졌다는 점에서 기록물로서 큰 가치를 지닌다. 특히 수기에는 돌린저가 광주의 참상을 목격하며 느꼈던 감정뿐만 아니라 헬기사격 등 구체적 사건, 광주시민들과의 세세한 대화 내용까지 꼼꼼히 적혀 있다.

[광주에 간 이유] "자유 위한 꿈이 산산이..."
 
 맨 오른쪽이 이 수기의 주인공인 데이비드 돌린저. 사진은 5.18민주화운동 당시 독일 기자 위르겐 힌츠페터와 평화봉사단 단원들이 인터뷰를 준비하고 있는 모습이다. 왼쪽에 카메라를 든 인물이 위르겐 힌츠페터이고 오른편 4명(차례대로 주디스 챔벌레인, 팀 원버그, 폴 코트라이트, 데이비드 돌린저)이 평화봉사단 단원들이다.
ⓒ 위르겐 힌츠페터, 드림팩트 엔터테인먼트
 
돌린저는 "평화봉사단 일원으로 1978년 4월 처음 한국에 도착"했다. "전라남도 영암으로 보내졌"던 그는 "친한 친구들의 대부분은 대학생들이었고 그들을 통해 한국의 정치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우리가 '서울의봄'으로 부르는 1980년 봄의 감정을 수기에 꼼꼼히 기록했다.

"더욱 자유를 가져오길 꿈꿨고 기도했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꿈과 기도가 산산이 부서졌습니다."

돌린저는 5월 17일 동료 평화봉사단원의 결혼식에 참석했다. 그리고 영암으로 돌아오는 길에 버스 환승을 위해 5월 18일 광주에 도착했다.

"나는 데모의 와중에 도착했는데 계엄군이 광주시민을 무차별하게 공격했을 때였습니다. 계엄군이 가게로 사람들을 쫓아가 노인, 어린애, 남자, 여자 할 것 없이 무차별하게 때렸습니다. 사람들은 기절하거나 거의 기절할 정도로 맞은 후에 금남로 한가운데로 옮겨졌고 강제로 트럭에 던져진 후 끌려갔습니다. 수 시간 동안 진행된 것 같습니다."

[광주의 참상] "헬리콥터가 금남로에 있는 군중에 총을 쏘며..."  
 5.18민주화운동을 목격한 미국인 데이비드 돌린저가 1982년 초 워싱턴DC의 한인교회에서 연설을 하기 위해 1981년 8월(혹은 9월) 직접 한국어로 쓴 수기.
ⓒ 데이비드 돌린저
5월 18일 금남로에서 처음 계엄군의 폭압을 목격한 돌린저는 영암으로 돌아와 석가탄신일인 5월 21일 아침까지 광주의 소식을 접하지 못했다. 광주의 참상을 잊지 못했던 그는 친구들과 걸어서 광주로 이동했고 당일 헬기사격을 목격했다.

"내가 (광주에) 도착했을 때 헬리콥터가 금남로에서 떨어져 있는 길에 모여 있는 군중들에게 총을 쏘며 시내를 날고 있었습니다. 내가 (헬기사격에 대한) 결과를 본 곳은 다음날(5월 22일) 아침 광주의 병원이었습니다. 부상자는 상처가 어깨나 가슴에서 시작돼 등 아래쪽으로 나 있었습니다."

계엄군의 헬기사격 여부는 긴 시간 동안 수많은 증거와 증언이 나왔는데, 일부에선 이를 여전히 논란의 대상으로 취급하고 있다. 심지어 2020년 전두환씨의 고 조비오 신부 사자명예훼손 재판에서 '1980년 5월 21, 27일 헬기사격이 있었다'는 법원의 판단이 내려졌음에도 신군부 세력은 이를 인정하지 않고 있다.

때문에 5.18 1년 후 작성된 이 수기에 매우 구체적인 묘사와 함께 날짜까지 일치한 헬기사격 진술이 담겨 있다는 점은 매우 의미가 깊다.

뿐만 아니라 돌린저는 광주시내와 병원을 오가며 목격한 참상을 꼼꼼히 기록했다.

"나는 외국 리포트에 광주가 자유를 얻기 위해 대가를 치렀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그날(5월 22일) 아침 병원을 방문했습니다. 병원은 부상자로 넘쳐흘렀습니다. 검은 베레(공수부대)는 텀블링(Tumbling) 총알, 즉 들어가는 데는 작은 구멍을 내지만 몸 안에서 큰 파괴를 일으키는 총알을 사용했습니다."

"총검으로 찢겨진 사람과 매우 심하게 맞아서 알아볼 수 없는 사람을 봤을 때, 그들에게 얼마나 고통스런 죽음이 가해졌는지 알 수 있었습니다. 광주시민들이 맞은 죽음의 종류들입니다."

[광주 사람들] '다시 만나지 못한' 어느 퇴역 군인과 칼에 찔린 친구
 
 평화봉사단 소속이었던 데이비드 돌린저가 518민주화운동 당시 찍은 사진. 이 사진은 5.18 직후 미국의 잡지 <Covert Action>에 실리기도 했다.
ⓒ 데이비드 돌린저 제공
 
돌린저의 수기엔 여러 광주 사람들이 등장한다. 그는 광주 사람들의 목소리를 구체적으로 전달하려 노력했고, 뿐만 아니라 직접 소통한 소회를 생생히 눌러 썼다.

돌린저가 묘사한 광주 사람들의 모습은 42년 전 일어난 '사건'인 5.18을 좀 더 가까운 '일상'으로 만든다. 그의 수기엔 희망과 절망, 기쁨과 분노의 감정이 복합적으로 담겨 있다.

"(5월 18일) 시내를 걷는 동안 우리는 한 괴로워하는 여인을 만났습니다. 이 여인은 아들이 어디에 있는지, 이러한 일이 왜 일어났는지 알려고 했습니다. 거의 동시에 한 나이든 신사가 '사람들이 자유와 민주를 원한다는 것을 정부에 보여주기 위해 시민들이 항의한다'고 우리들에게 말했습니다."

"(계엄군이 잠시 물러난) 수요일(5월 21일)은 희망의 기운으로 끝났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도시와 운명을 좌우했고 우리는 하나였습니다. 학생, 교수, 일하는 사람 모두가 하나였습니다. 우리는 광주의 시민이었고 우리는 광주였습니다."

어느 퇴역 군인, 그리고 칼에 찔려버린 광주시민 '친구'와 나눴던 대화는 감동을 자아낼 뿐만 아니라 기록물로서도 소중한 가치를 지닌다. 이들과의 만남은 매번 "그를 다시 만나지 못했다"란 문장으로 마무리된다.

"그날(5월 24일) 저녁 나는 한 퇴역 군인을 만났습니다. 그는 40대 중반이었으며 생애 대부분을 군인으로 지냈습니다. 우리는 잠시 동안 이야기했으며 생달걀을 먹었습니다. 그는 그의 가족, 아들, 딸에 대해 이야기했고 왜 그가 시민들을 돕는지 이야기했습니다. 그는 정부가 광주의 시민을 죽일 권리가 없다는 것을 이야기했고, 그가 전에 알지 못했던 기본 인권과 자유를 자녀들이 어떻게 갖기를 원하는지 이야기했습니다. 나는 그날 저녁 이후 다시 그를 보지 못했습니다."

"(5월 25일) 도청 앞에 있던 사람이 말하길 누군가 등 뒤에서 칼에 찔렸다는 것입니다. (이를 목격한) 그 사람이 말하길 나의 친한 (광주시민) 친구라는 것입니다. 쏟아지는 빗속에서 나는 전남대학병원으로 뛰어가서 응급실에 있는 그를 발견했습니다. 심하진 않았지만 (그는) 먹지도 자지도 않았기 때문에 상처는 그에게 더 심한 영향을 줬습니다. 그의 형이 그를 오후에 집으로 데려갔습니다. 나는 다시 그를 보지 못했는데, (헤어질 때) 그는 군사들이 다시 돌아올 때 싸우다 죽을 것이라고 맹세했습니다."

"(5월 27일 계엄군의 전남도청 진압 후) 우리는 밖에 나가 시내를 돌아봤습니다. 15명의 죽은 사람이 쓰러져 거리에 누워 있었습니다. 죽은 사람 중 내가 잘 아는 네 사람을 셀 수 있었고, 그들은 친구들이었습니다. (이외에도) 군인들이 돌아온 후 얼마나 많은 친구들이 사라졌는지 모릅니다."

아래 기사를 통해 돌린저의 1981년 수기 전문을 확인할 수 있다. 

[최초공개- 전문입수] 5.18 목격한 미국인이 한글로 쓴 '광주의 열흘' 
 
 영암에서 평화봉사단으로 근무했던 데이비드 돌린저는 1980년 5.18민주화운동 당시 광주에서의 참상을 목격했다.
ⓒ 데이비드 돌린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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