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정부 51번 과제.. 노동자 생명 가불하시렵니까 [소셜 코리아]

김명희 2022. 5. 10. 15: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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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셜 코리아] 주 4일제 실험하는 시대 역행하는 노동시간 연장

한국의 공론장은 다이내믹합니다. 매체도 많고, 의제도 다양하며 논의가 이뤄지는 속도도 빠릅니다. 하지만 많은 논의가 대안 모색 없이 종결됩니다. 소셜 코리아는 이런 상황을 바꿔 '대안 담론'을 주류화하고자 합니다. 구체적으로는 ▲근거에 기반한 문제 지적과 분석 ▲문제를 다루는 현 정책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을 거쳐 ▲실현 가능한 정의로운 대안을 제시하고자 합니다. 소셜 코리아는 재단법인 공공상생연대기금이 상생과 연대의 담론을 확산하고자 학계, 시민사회, 노동계를 비롯해 각계각층의 시민들과 함께 만들어가는 열린 플랫폼입니다. 기사에 대한 의견 또는 기고 제안은 social.corea@gmail.com으로 보내주시기 바랍니다. <기자말>

[김명희]

 
 안철수 제20대 대통령직인수위원회 위원장이 3일 오전 서울 종로구 통의동 인수위원회 공동기자회견장에서 국정과제를 발표하고 있다.
ⓒ 인수위사진기자단
 
대통령직 인수위원회는 지난주 새 정부 출범을 앞두고 110대 국정과제를 발표했다. 51번 과제 '노사협력을 통한 상생의 노동시장 구축'에는 근로시간 제도에 대한 노사 선택권을 확대한다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현재 최대 3개월로 제한하고 있는 선택적 근로시간제의 정산 기간을 확대하고, 스타트업이나 전문직에서 근로시간 규제를 완화하며, 근로시간 저축계좌제를 통해 연장 근로시간의 총량을 관리하겠다는 것이다.

총량 혹은 평균만 기준을 맞춘다면, 노동자가 자발적으로 더 많은 시간 일할 수 있도록 '선택권'을 보장해주겠다는 인심 좋은 정책이다. 더 오래 일하고 싶은데 규제 때문에 눈물을 훔치며 퇴근할 수밖에 없었던 노동자, 연차 개수가 부족해 해외 장기 휴가는 엄두를 못 내던 노동자라면 환영할 만한 소식이다. "일주일에 120시간이라도 바짝 일하고 이후에 마음껏 쉴 수 있"게 되었으니 말이다.

노동시간 당겨 쓰는 건 수명 당겨 쓰는 것

하지만 어쩌나, 애석하게도 인간은 기계가 아니다. 장시간 노동, 야근, 과로가 우리 몸에 남기는 상흔들은 똑같은 분량을 푹 쉰다고 해서 장부 정리하듯 상쇄되지 않는다. 미래의 노동시간을 당겨 쓴다는 것은 수명을 당겨 쓰는 것이나 다름없다.

사실 장시간 노동, 불규칙한 노동시간이 건강에 부정적 영향을 미친다는 연구는 너무 많아서 일일이 소개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 과로사의 주된 사인인 심혈관 질환뿐 아니라, 우울증과 불안, 수면장애, 소화기 질환, 대사 이상은 물론 안전사고에 이르기까지, 건강에 끼치는 영향은 광범위하다.

장시간 노동은 오랫동안 '누적'되는 것만이 문제가 아니다. 국내 연구에 의하면, 바로 직전 일주일 동안 노동시간이 10시간 늘어나면 그렇지 않은 기간에 비해 뇌졸중 위험이 약 45% 증가했다.

또한 다른 연구에 따르면 노동시간이 길어질수록 우울과 불안 증상 같은 정신건강 악화가 뚜렷해지는데, 여기에 노동시간의 불규칙성까지 더해지면 문제가 가중된다. 똑같이 주간 31~40시간 근무를 하더라도, 매일 같은 시간 동안 일하는 것에 비해 들쭉날쭉 노동시간이 변하는 경우 우울 증상이 2.5배 이상 증가한다. 노동시간이 41~52시간, 52시간 이상으로 늘어나면 그 위험은 2.7배, 5배 높아진다.
 
 기계는 과열되면 멈추지만 인간은 카페인을 털어 넣고 쪽잠을 청하면서 어떻게든 일을 한다.
ⓒ 셔터스톡
 
이런 면에서 장시간 노동에 대한 규제는 고속도로의 과속 '구간 단속'과 비슷하다. 구간 단속이 적용되는 구간의 거리는 대개 수 km에 불과하다. 더 긴 거리에 적용해서 운전자의 유연한 대응을 촉진하면 안 될까? 실컷 과속을 한 다음에 휴게소에 들러 밥도 먹고 커피도 마시면서 푹 쉬고 나오면, 속도 위반은 피하면서 속도를 즐기고 그만큼 휴식 시간까지 확보할 수 있으니 일석이조 아닌가?

하지만 현실에서는 이렇게 하지 않는다. 과속이라는 위험 행동에 대한 억지력을 확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선택적 근로시간의 정산 기간을 늘린다는 것은 구간 단속의 구간 길이를 늘리는 것과 다름없다. 위반은 피하면서 과로라는 위험 행동을 고스란히 유지시켜 준다는 점에서 말이다.

기계는 과열로 멈추지만

우려스러운 것은 과연 업무가 한가해졌을 때 노동 시간을 대폭 줄이고, 저축해둔 초과 근로 시간을 인출하여 장기간 휴가를 훌쩍 떠날 수 있냐는 것이다. 초과근무 시간을 저축까지 할 만큼 빠듯하게 돌아가는 일터에서 말이다. 시간은행의 잔고가 쑥쑥 늘어나도, 이는 그림의 떡이 될 가능성이 크다.

앞서 인간은 기계가 아니라고 했다. 기계만큼 튼튼하지 못하다는 뜻으로 이야기했지만, 기계라고 해서 쉼 없이 무한 가동해도 되는 것은 아니다. 헤어드라이어나 전열기는 과열이 되면 저절로 전원이 차단되고, 충분히 냉각되기까지는 아무리 해도 작동하지 않는다. 하지만 인간은 '과열' 상황에서도 카페인을 털어 넣고 쪽잠을 청하면서 어떻게든 일을 한다. 그러다 병에 걸리고 사고가 나지만.

아무리 세련된 단어로 포장한다 한들, 근로 시간 규제 완화의 본질은 노동시간 연장과 노동강도 강화일 뿐이다. 세계 곳곳에서 주 4일제, 주 35시간 노동을 실험하고 있는 마당에, 이런 방식의 생산성 증대를 추구한다면 너무 '후지다'고 말할 수밖에.  
 
 김명희는 <소셜 코리아> 운영위원. 예방의학 전문의로서 노동건강연대 운영위원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 김명희
 

* 필자 소개: 이 글을 쓴 김명희는 <소셜 코리아> 운영위원이자, 예방의학 전문의로서 노동건강연대 운영위원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관심 영역은 건강불평등, 노동자 건강권, 보건의료의 공공성이다. 한국건강형평성학회 학회장을 역임했으며, <사회역학> <노동자건강의 정치경제학> <예방의학의 전략> <과로자살> 등의 번역서와 <보건의료 사유화: 불편한 진실> <한국의 건강불평등> <몸은 사회를 기록한다> <당신이 숭배하든 혐오하든> 등의 책을 펴낸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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