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민우의 시시각각]'윤석열 취임사'에 담길 말

최민우 2022. 5. 10. 0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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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려한 취임사는 말빚만 남겨
'법치'로 대통령에 오른 윤석열
자신도 예외 아님을 천명해야
최민우 정치에디터

역대로 인상적인 대통령 취임사는 흔치 않았다. 시대정신을 반영한다고 하나 대개 국민 통합이나 국가 발전을 앞세우기에 '공자님 말씀'의 틀에서 벗어나기 어려웠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반칙과 특권이 용납되는 시대는 끝나야 한다. 정의가 패배하고 기회주의자가 득세하는 굴절된 풍토는 청산돼야 한다"는 대목이 두고두고 회자됐던 것도 취임사의 보편성과는 궤를 달리한 측면이 있어서였다.

윤석열 대통령의 국민의힘 대선후보 시절 모습. [국회사진기자단]

뻔한 취임사 중 그래도 명문(名文)을 꼽자면 이제는 전직 대통령이 된 5년 전 문재인 대통령이었을 듯싶다. 대통령 탄핵이라는 초유의 상황이었기에 국민 누구나 마음 한쪽에 불안감을 갖고 있던 때였다. 그런 격변기에 문 전 대통령은 대선 다음 날 간촐한 취임식을 하면서 진솔하게 협치와 소통, 탈권위를 설파했다. "퇴근길 시장에 들르는 친구 같은 대통령"을 자처했다. 특히 "기회는 평등하고, 과정은 공정하며, 결과는 정의로울 것"은 백미였다. 해외 지도자처럼 우리도 'A4 종이를 그대로 읊지 않고, 말과 글이 되는' 대통령을 갖게 될 것이란 기대에 부풀었다. 그를 지지하지 않았지만, 취임사에 감명받았다는 이들이 대다수였다.

하지만 선명한 기억 탓이었을까. 역설적으로 문 전 대통령만큼 취임사로 공격받은 대통령도 없었다. 솔직히 5년 전 취임사 중 "권력기관은 정치로부터 완전히 독립시키겠다" "잘못한 일은 잘못했다고 말씀드리겠다. 거짓으로 불리한 여론을 덮지 않겠다" "야당은 국정운영의 동반자다. 대화를 정례화하고 수시로 만나겠다" 등은 지금 들으면 민망할 만큼 말과 행동이 정반대였다. 최근엔 "준비를 마치는 대로 지금의 청와대에서 나와 광화문 대통령 시대를 열겠다" "광화문 시대 대통령이 되어 국민과 가까운 곳에 있겠다"고 말한 대목이 새삼 주목받고 있다. '광화문 대통령'을 취임사에서 두 번이나 강조했으니 이를 어긴 것을 면구스러워할 법하지만 문 전 대통령은 천연덕스럽게 "공약에 얽매이지 않고 잘했다"고 말했다. 외려 새 대통령의 용산 이전을 두고 "마땅치 않다"고 역정을 냈다. 이러니 "문재인 취임사 중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나라' 빼고는 몽땅 거짓말"이라고 하지 않겠나.

2017년 5월 10일 당시 문재인 대통령은 국회 본청 로텐더홀에서 취임식을 가졌다. [중앙포토]


오늘 윤석열 대통령이 새로 취임한다. 5년 만에 정권교체이니 새 정부의 비전을 보여줄 취임사에 공을 들이는 모양새다. 16명의 취임사 준비위원이 초안을 마련했고, 여러 차례 보완작업을 거쳐 마지막엔 대통령이 직접 작성한다고 한다. 하지만 5년 전 경우에서 봤듯, 화려한 취임사는 '말빚'만 남길 가능성이 크다.

그간 윤 대통령은 1년 남짓한 정치 여정 중 공식 연설이나 TV 토론에서 강렬한 인상을 주지 못했다. 대신 어퍼컷 세리머니가 화제였다. 오히려 빛나는 '윤석열 어록'은 검찰총장 시절이었다. 2020년 가을 국감장에서 "검찰총장은 법무부 장관 부하가 아니다" "선택적 의심 아닌가"라며 민주당의 맹폭에 홀로 맞서 싸웠다. 준비된 원고가 아닌 육화된 언어, 그 자체였다.

2020년 10월 당시 윤석열 검찰총장이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법제사법위원회의 대검찰청에 대한 국정감사에서 의원 질의에 답변하고 있다. 뉴스1


'윤석열 취임사'에 기대하는 것도 이 같은 초심이다. 이미 대다수 국민은 지난 10년간 '검사 윤석열'이 '대통령 윤석열'로 되는 과정을 지켜봐 왔다. 좌우 진영을 가리지 않고 엄정한 칼끝을 겨누다 혹독하게 탄압받았던 것 말이다. 그건 박근혜·문재인 정부에서 자행돼 온 자의적 통치에 맞서 '법의 지배(rule of law)'를 지키려 한 과정이었다. 법치주의란 단지 '시민'에 대한 준법 요구가 아니라 국가의 권력 행사에 대한 족쇄임을 인식하게 해주는 과정이었다. 하여 대통령 윤석열은 오늘 이렇게 선언해야 한다. "살아 있는 권력과 맞서 싸웠던 저의 검찰 인생이 윤석열 개인의 스토리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법치 확립이라는 ‘공적 자산’이 될 때 대한민국은 한걸음 더 전진하게 될 것입니다. 헌법과 법률 위에 군림하던 '군왕 대통령 시대'는 이제 끝나야 합니다. 법에 예외는 없습니다. 잘못을 했다면 제게도 칼을 겨누십시오."

최민우 정치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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