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호의 한반도평화워치] 한국은 북핵 당사자, 그 해결 과정에 직접 관여해야
대혼란 시대의 대북정책
중화의 권위주의 위계질서를 재현하려는 중국의 도전과 자유주의 국제 질서를 유지하려는 미국의 응전이 거침없이 밀려오는 파고와 같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은 무정형의 탈냉전 시대가 강대국과 그 연대 세력 간 힘의 각축을 통한 신냉전 시대로 진입하는 전조일 수 있다. 독일·프랑스 등 유럽 주요국은 자강(自强)으로의 국방정책 대전환을 예고했다. 핵전략 국가라는 자강의 목표를 향해 달려온 북한은 말할 필요조차 없이 한국도 자강을 각성하기는 마찬가지다. 국제주의와 보편 규범은 도전을 받고 본격적인 군비 경쟁의 시대가 도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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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대 정부는 비핵화 추진하면서도 협상은 미·북에 맡겨
북한과 제대로 협상하려면 충분한 북핵 억지력 보유해야
‘핵은 핵’이 최선이지만 한계 있는 만큼 억제 수단 갖추고
튼튼한 안보로 뒷받침하면서 대북 대화의 문 열어놓아야
」
이러한 대혼란과 각자도생, 복합·중층의 위기 속에서 윤석열 행정부가 출범한다. 국가 안위와 국리민복의 길을 탄탄히 닦기 위한 도전이 엄중하다. 부동산·물가 등 시급히 해결해야 할 현안이 많지만, 문재인 행정부의 굴종적 대북정책도 제대로 교정해야 한다. 현재의 남북 관계가 지속하면 우리는 사반세기가 지나기 전에 적대적 상황의 분단 100년을 맞게 될 것이다. ‘남북 관계의 정상화’를 이뤄내야 평화 통일의 문을 열 수 있다. 지난 30년의 대북·통일 정책을 냉정하게 점검하고 남북 관계를 바로 세우기 위한 행동 계획을 마련·추진해야 한다.
문 정부, 북한 핵전략 오판
올해는 남북 관계의 포괄적 발전을 도모했던 남북기본합의서와 북한 비핵화를 목표로 한 한반도 비핵화 공동선언이 발효된 지 30주년이 되는 해이다. 김영삼 행정부부터 문 행정부에 이르기까지 북한 비핵화, 평화 정착, 남북 관계 개선 등의 목표를 세우고 추진했다. 그러나 현재의 남북 관계를 보면 그 본질이 변하지 않았고, 북한 비핵화의 목표는 처절한 실패로 나타났다. 그런데도 역대 정부마다 북한을 탓하고 자신의 업적을 자화자찬했다. 예컨대 문 행정부는 북한이 남북공동연락사무소를 폭파하고 올해 초부터 10여 차례의 탄도미사일을 실험발사하는 와중에 ‘문재인 정부 5년 보고’에서 “‘전쟁 없는 한반도’ 비전을 현실화”했다며 비현실적인 자평을 했다.
역대 정부의 대북정책이 실패한 여러 원인 중에서도 크게 세 가지를 지적할 수 있다. 첫째, 남북 관계를 지배해온 북한의 핵전략에 대한 오판이다. 북한은 늘 경제적으로 어려웠다. 그러나 국방 우선의 정책 기조는 바뀌지 않았다. 체제·국가·정권 수호가 최우선인 북한 독재자에게 핵무기 개발은 포기할 수 없는 전략적 선택이었다. 그러나 김대중 전 대통령은 “북(한)은 핵을 개발한 적도 없고 개발할 능력도 없다”고 말했으며, 2018년 3월 문 행정부의 대북 특사단은 김정은이 비핵화 의지를 보였다고 판단했다. 북핵 협상을 미국에 의존해온 한국은 문 행정부에 이르러서는 마치 남의 일처럼 미·북 간 ‘중재자’로 나섰다. 경제 패키지와 비핵화를 바꾸려는 정책은 ‘선 비핵화’의 보수 정부나 ‘선 경제 지원’의 진보 정부 모두 마찬가지였다. 특히 경제 지원이 북한의 행동 변화를 유인한다는 진보 정부의 정책은 순진함을 넘어 어리석기까지 했다.
보수·진보 정부 따라 대북 정책 우왕좌왕
둘째, 이러한 오판의 원인은 북한 체제와 정권·전략에 대한 객관적이고 현실적인 평가의 결여에 있었다. 북한 체제의 변화나 북한의 비핵화 언급을 희망적 사고에 의해 평가했다. ‘기대하는 북한’의 인식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독일이 통일하자 북한 붕괴론에 기울었고, 북한이 ‘고난의 행군’을 겪자 경제 지원을 하면 변할 것으로 판단했다. 그러나 대북 식량·비료 지원이 한창이던 시절 북한은 핵·미사일 개발의 기반을 다졌다.
북한의 경제난관 극복을 위한 제한적인 내부 경제 개혁 조치를 경제 개방·개혁의 흐름으로 평가했다. 북한 독재자가 ‘우리식 사회주의’를 외치며 0.00001%의 체제 변화 가능성이 없다고 반복해도 단순 레토릭으로 보았다. 남북 정상회담을 한 대통령들은 “한반도에서 전쟁의 위협은 사라졌다”라거나 ‘국가 핵 무력 완성’을 자랑하는 10만의 평양 군중 앞에서 그들이 “얼마나 민족의 화해와 평화를 갈망하고 있는지 절실하게 확인”했다는 허언(虛言)을 늘어놓았다.
셋째, 보수·진보 정부를 교차하면서 대북 정책은 일관성은커녕 전략적 지속성도 찾을 수 없었다. 역대 정부마다 지난 정부의 정책을 존중하고, 계승할 부분은 더 발전시켜 나가겠다고 했으나 말뿐이었다. 정책 단절은 정책 입안·추진 과정에서 국민 합의가 아니라 국내 갈등을 오히려 증폭시켰다. 특히 이념적 토대에 입각한 대북 인식이 정세 평가나 정책 선택을 지배하면서 국제사회와의 협력에서는 물론 상대방 북한으로부터도 신뢰를 얻지 못했다. 문 대통령은 유엔 안보리의 대북 제재 결의를 충실히 이행해야 함에도 제재 완화·해제 외교를 펼쳐 국제적 망신을 당하고 북한으로부터는 조롱의 대상이 되었다.
‘핵보유국 북한’ 반영한 정책
대북·통일 정책, 어떻게 해야 하나. 첫째, 대북 정책은 확고한 대한민국 국가 정체성의 기반 위에 서야 한다. 자유민주주의, 자본주의 시장경제, 인권, 법의 지배, 공화주의 등 헌법의 기본 가치는 남북 관계 개선·발전과 통일 추진 과정에서 양보할 수 없는 요소다. 6·15공동선언 1항에 ‘우리 민족끼리’ 용어가 담긴 이래 남한의 대북 정책은 상당한 정도로 북한의 볼모가 됐다. 사회주의 민족을 함의한 ‘우리 민족끼리’는 외세 배격과 남·남 갈등 조장, 남한 사회의 친북화 등을 위한 북한의 대남 통일전선 사업의 강력한 도구다. 북한의 의도대로 남북기본합의서 대신 6·15공동선언이 남북 관계의 전범이 됐다. 향후 대북 정책은 시간이 걸리더라도 우리 헌법의 기본 가치를 투영·확산해 나가야 한다.
둘째, 한반도 전략 환경에 대한 현실적이고 냉철한 평가를 해야 한다. 남북 관계는 ‘민족의 신화’가 아니라 국제 정치의 현실이다. 경제와 안보의 융합이 심화하고, 보건·사이버·신기술 등 새로운 안보 위협의 도전이 거세다. 우리의 전략 환경은 한반도 지정학에 국한되지 않는다. 특히 중국의 속내를 정확히 읽어야 한다. 또 문 행정부처럼 내세운 정책에 부합하도록 전략 환경을 평가하는 오류를 절대 범하지 말아야 한다. 문 행정부는 대북 유화정책 추진을 위해 마치 선험적으로 북한 체제와 핵전략에 변화가 있다고 보았다. ‘한반도(조선반도) 비핵화’가 북한엔 절대 ‘북한 비핵화’가 아님에도 마치 북한 비핵화인양 기만했다.
셋째, 전략 환경 평가에 토대한 현실적인 정책과 전략을 세워 추진해야 한다. 5년의 임기 동안 장기적인 통일정책을 추진하기 어렵다. 그러나 국가 전략 차원의 통일 대계(大計)를 마련하고, 그에 기반하여 최선으로 실현 가능한 대북 정책을 기획·추진해야 한다. 주변국의 국가 전략과 북한의 체제 전환을 고려하지 않은 문 행정부의 ‘한반도 신경제지도’ 같은 장밋빛 청사진은 공허하다. 윤석열 행정부 임기 안에 남북 관계의 정상화를 이뤄내면 지속 가능한 관계가 이어질 수 있다. 한편, 민족공동체 통일방안은 사실상 시효를 다했다. ‘핵보유국 북한’, 한국 사회 구조의 변화 등 현실을 반영한 업그레이드가 필요하다.
남북 관계는 인내 필요한 대장정
넷째, 북핵 문제의 당사자로서 그 해결 과정에 직접 관여해야 한다. 역대 정부마다 비핵화를 최우선 정책으로 추진했으나, 북핵 협상을 사실상 미·북의 수중에 맡겼다. 수십 기의 핵탄두를 가진 북한과 실효성 있는 협상을 하기 위해선 무엇보다 충분한 북핵 억지력을 보유해야 한다. 김정은 정권은 이제 강력한 공격 능력 차원의 핵·미사일 고도화에 나섰다. 이론상 ‘핵은 핵으로’가 최선이지만 현실적인 한계가 있다. 따라서 그에 상응하는 수준의 신뢰성 높은 군사적 억제 수단과 능력을 빠르게 갖춰야 한다.
다섯째, 남북 관계는 인내와 의연함이 요구되는 대장정이다. 남북 관계 정상화의 목표 실현을 위해선 ‘사실상 국가 대 국가 관계’ 차원에서 국제법, 국제 규범과 관행을 적용하는 남북 관계를 운용해야 한다. 그래야 상호주의적이고 호혜적인 남북 관계를 형성해 나갈 수 있다. 북한은 이에 거부감을 보이고 군사 도발, 위기 조성, 대화 단절 등으로 대응할 개연성이 크다. 이에 조급할 필요는 없다. 튼튼한 안보로 뒷받침하면서 대화의 문을 열어놓으면 된다. 체제의 성격이 변해 나가지 않는 북한과의 합의는 사상누각임을 잊지 말자.
박영호 한반도포럼 위원장·전 강원대 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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