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향기] 렘브란트와 베토벤

2022. 5. 10. 0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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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상직 서울대 음대 교수

10여 년째 애착을 갖고 강의하는 교양 교과목이 하나 있다. 교과목명은 거창하다 못해 오만하기까지 한 ‘음악의 원리’. 고대 로마 원로원 의원이자 철학자였던 보이티우스(477~524)의 동명 저술 『음악의 원리(De institutione musica)』를 그대로 차용했지만, 중세 음악의 철학적 배경뿐만 아니라 이론과 실제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친 이 저술과 이 교과목의 내용은 아무런 관계가 없다.

이 강의는 그저 서양 고전음악의 실제적 원리를 알기 쉽게(수강생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고 들었지만) 설명할 뿐이다. 수강생 대부분이 악보를 읽을 줄 안다고는 하지만, 본질적으로 추상적인 음악의 구성 원리를 말로 설명하는 것이 그리 간단한 일이 아니니 음악에 앞서 미술 작품을 예로 들어 설명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백문불여일견(百聞不如一見)’이고 ‘몸이 백 냥이면 눈이 구십 냥’이라 했듯이 ‘듣는 것’보다 ‘보는 것(직접 경험하는 것)’이 무언가를 이해하기에 훨씬 쉬운 길이니까.

「 두 작가 사이에 흐르는 공통점
견고한 하나 위한 대조적 관계
더 나은 세상 향한 동력 삼아야

지난주 강의 주제는 ‘통일성과 다양성’. 원근법을 최초로 적용한 마사초(1401~1428)의 ‘성삼위(聖三位)’와 레오나르도 다빈치(1452~1519)의 ‘최후의 만찬’을 통해 전체적 구도의 통일성과 개별적 형태의 다양성을 살펴본 후 두 개의 대조적 화두를 제시한다. ‘통일성에 기반한 다양성’과 ‘다양성에 내재하는 통일성’. 이제 드디어 음악으로 들어서서 주제 선율의 변화, 변주, 전개, 변용(變容) 등을 귀로 확인하고 아주 간단한 질문을 던진다. “만약 이러한 변화 없이 같은 상황이 계속 반복되었더라면, 그 반대로 이 다양한 양상이 일관성 없는 별개의 것으로 나열되었더라면?” 답은 아주 간단하다. 첫째 질문의 답은 ‘중언부언(重言復言)’이고 둘째 질문의 답은 ‘횡설수설(橫說竪說)’이다.

화면을 넘겨 렘브란트(1606~1669)의 그림 한 점을 띄운다. 따스한 볕이 드는 창가에 두 손을 모은 채 눈을 감고 앉아 있는 한 노인에게 시선이 쏠린다. 창을 통해 들이치는 햇빛이 마치 무대를 비추는 조명처럼 어두운 실내에 앉은 그를 향하고 있으니 그게 당연한 일이다. 이렇게 빛은 어둠이 있어 더 밝게 빛나고 어둠은 빛이 있어 더 깊어진다. 좀 더 살펴보니 나선형 계단에 의한 S자 구도 오른쪽 계단 밑에 앉아 아궁이에 불을 지피고 있는 하인이 보인다. 그 하인의 얼굴과 손이 희미하게나마 보이는 것 역시 아궁이의 불빛 덕이다.

‘명상에 잠긴 철학자’와 ‘군불을 지피는 하인’. 한 공간 안에 있는 두 인물의 상반된 삶의 모습이다. 주종관계라기보다는 정신적 세계와 현실적 세계의 공존으로 읽힌다. 철학자를 비추는 햇빛이 신의 선물이라면 하인을 간신히 비추는 아궁이 불빛은 삶을 위해 우리가 치른 노고에 대한 대가다. 그래서 창을 넘어 들이치는 빛은 ‘정신을 밝히는 빛’으로, 아궁이 틈새로 새어 나오는 빛은 ‘고단한 육신을 보듬는 볕’으로 다가온다.

다시 음악으로 돌아와 베토벤의 음악 몇 곡을 살펴본다. 한 곡 안에 담긴 여러 개의 주제가 이 그림 속의 두 인물의 지위나 상태와 마찬가지로 각기 그 성격을 달리한다. 한 악장 내에서의 1주제와 2주제가 대조적 성격을 지니고 각 악장의 주제가 표정·빠르기·성격 등을 완전히 달리한다. 이렇게 표면적으로 상이한 각각의 주제가 하나의 주제로부터 파생된 것임을, 즉 표면적으로는 완전히 다르지만, 그 기저에 내적 연관성이 놓여있음을 설명할 때면 수강생들의 눈빛이 달라진다. 누군가는 머리를 쥐어뜯고 어떤 이는 ‘아니, 이런 비밀이?’라는 표정을 짓는다.

이 지점에서 질문 하나. “흙으로 아담을 지었던 신이 이브는 왜 굳이 아담의 갈비뼈를 하나 취하여 지었을까?” 그 대답 역시 마찬가지, ‘남성과 여성의 뿌리가 하나’라는, 즉 그들이 부부를 이룸으로써 온전해진다는 신의 섭리다. 렘브란트 그림 속의 두 인물이나 베토벤 음악의 주제 그리고 아담과 이브의 관계는 이렇게 상반된 개체 사이에 내적 연관성이 자리하고 있음을, 즉 각 개체의 대조적 관계가 궁극적으로 견고한 하나를 이루기 위함이라는 사실을 웅변한다.

하지만 그 대조적 관계에 이해(利害)가 개입되면 이는 더 이상 하나를 위한 둘이 아니라 제로섬 게임을 벌이는 대립적 관계로 변질한다. 대립적 관계는 ‘너 죽고 나 살자’는 살벌한 상황을 거쳐 ‘너 죽고 나 죽자’는 공멸의 상황으로 치닫는다. 상쇄(相殺)로 모자라 상살(相殺)에 이른다. 그러니 소위 리더를 자처하는 이들이라면 그들의 갈라파고스에 다양한 목소리를 허락해야 한다. 그리고 그 다양한 요구의 본질을 하나로 묶어 더 나은 세상을 향한 동력으로 삼아야 마땅하다.

전상직 서울대 음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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