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논단] 대통령의 '알아알아'병 예방법

2022. 5. 9. 04: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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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선숙 전 국회의원


김대중 전 대통령은 매일 아침이면 여러 신문 가운데 하나씩 번갈아 가며 선택해 1면부터 맨 뒷면까지 꼼꼼히 읽었다. 사실 공보수석실에서 스크랩해 보고하는 주요 기사들만 해도 상당하니 직접 신문을 읽는 수고까진 하지 않아도 된다. 그럼에도 굳이 그러는 이유에 대해 김 전 대통령은 “신문에는 국민에게 영향을 미치는 모든 문제가 들어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스크랩만 보면 주요 이슈에 집중하게 되지만 신문을 구석구석 읽다 보면 국민의 희로애락이 담긴 모든 문제를 살펴볼 수 있다는 뜻이었다.

흔히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들이 쉽게 걸리는 병이 있다. 늘 많은 정보가 모이고 그래서 세상만사 다 알 것 같은 착각에 빠지는 ‘알아알아’병이다. 가장 치명률이 높은 고위험군은 바로 대통령이다. 그야말로 모든 정보와 자료가 그에게 모이기 때문이다. 대통령이 ‘알아알아’병에 걸리면 참모도 장관도 의견을 내놓기 어려워진다. “그건 내가 아는데…”라며 쉽게 갈라치고 우선순위를 정하면 누가 ‘그게 아니다’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대통령은 보고서의 홍수 속에서 산다. 참모들 사이엔 ‘보고서가 A4 두 장을 넘기면 범죄’라는 우스갯소리도 있다. 매일 수많은 중요사안을 보고받고 결정해야 하는 대통령에게 짧고 분명한 보고서를 올리는 건 참모의 필수 능력이기도 하다. 보고서에 담지 못한 내용은 대통령이 추가로 지시하면 보충 자료나 브리핑으로 보완된다. 그렇게 분량을 줄여도 대통령은 밤마다 보고서를 한 보따리씩 안고 관저로 돌아가 늦은 밤까지 읽어야 한다. 하나하나가 대충 결정을 내릴 수 없는 사안들이고, 그날 다 읽지 못하면 다시 다음 날 보고서가 쌓인다. 그래서 대통령이란 직업은 엄청난 체력과 정신력이 필요한 중노동이다. 오죽하면 이희호 여사가 “내일 말고(밤 12시 넘기지 말고) 오늘 잡시다”라고 이야기하곤 했을까.

그런 대통령이니 ‘알아알아’라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알아알아’에는 다양한 이견과 반론까지 포함돼 있어야 한다. 미국의 가장 성공한 대통령으로 꼽히는 에이브러햄 링컨은 ‘라이벌 팀(Team of Rivals)’을 이끈 지도자로 유명하다. 대통령의 생각에 이의를 달 수 있는 다양한 입장을 가진 사람들을 선택하고 그들과의 토론 속에서 가장 합리적인 판단이 나올 수 있도록 했던 것이 핵심 성공 요인이었다고 역사가들은 평가한다.

김대중정부 시절 인권위원회와 부패방지위원회가 설치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당장 검찰의 반발이 심했지만 그 맨 앞에는 박상천 법무부 장관이 있었다. 그는 1년 반 남짓한 장관 재직 동안 대통령에게 언성을 높여가며 반대의견을 쏟아내곤 했다. 그 목소리가 집무실 밖까지 들릴 정도였다. 박 장관의 그런 성정을 아는 사람은 다 아는 터인데 그를 장관에 임명한 이유가 무엇인지 물은 적이 있다. 김 전 대통령의 답은 이랬다. “그이는 언제든 자기 의견을 굽히지 않고, 적어도 자기 분야는 책임질 줄 아는 사람입니다.” 라이벌을 두려워하지 않아야, 내부의 반대를 막지 않아야 토론의 공간을 만들 수 있고 ‘알아알아’병도 예방할 수 있다.

새 정부는 “공간이 의식을 지배한다”며, 대통령 집무실과 관저 이전을 추진했다. 그런데 의식을 지배하는 건 바로 대통령이라는 직위 그 자체가 아닌가. 어느샌가 세상만사 다 안다는 착각에 빠질 수 있는 자리, 업무공간이 바뀌었어도 대통령직은 여전히 그런 자리다. 김 전 대통령이 신문을 꼼꼼히 읽은 건 보고서에 담겨있지 않은 세상사를 놓치지 않으려는, 국민에게서 멀어지지 않으려는 노력이었다. 국민에게 고통을 안겨주는 일들은 중요하지 않다고 방치되었던 곳에서 발생하곤 한다. ‘다 알지 못한다’고 늘 두려워하고 살펴야 하는 이유다.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은 얼마 전 “김대중 노무현 두 대통령이 기자들을 제일 많이 만났다”고 했다. 맞는 이야기다. 김 전 대통령은 “기자는 우리가 만나는 첫 번째 국민”이라고 강조했다. 언론에 대한 평가도 이념과 편향에 따라 갈리는 시대, 기자라는 직업이 소명으로 인정받기 쉽지 않은 시대를 우리는 목도한다. 그럼에도 그 첫 번째 국민의 질문을 받고 성실하게 답변하며 설득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지도자의 책무다. 그것은 만나야 하는데 미처 못 만난 국민을 향한 첫걸음이고, ‘알아알아’병의 첫 번째 예방법이다.

박선숙 전 국회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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