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돌 팬이고요, 휠체어 탑니다. 공연 보고 싶습니다"
휠체어를 이용하는 신모(22)씨는 지난달 유명 아이돌 그룹 공연을 가려다가 뜻밖의 난관에 부닥쳤다. 공연장 안에서 휠체어를 타고 이동하려면 보호자가 필요한데, 보호자 좌석이 따로 제공되지 않아서다. 공연 예매 페이지에 20만 명 이상이 동시 접속했을 만큼 예매 경쟁이 치열한 공연이었다. 개인 좌석과 보호자 좌석 두 장을 모두 예매하기는 하늘의 별 따기였다. 다행히 같은 날 공연을 보는 ‘트친’(트위터 친구)을 찾아 함께 공연장에 들어갔지만, 입장 당시에도 휠체어석 이용 관객 안내 방침이 제대로 마련되지 않아 한참을 기다려야 했다.
그나마 신씨는 운이 따른 경우다. 또 다른 휠체어 이용자 A씨는 그룹 세븐틴 공연을 보려다 ‘보호자 티켓도 알아서 구해야 한다’는 안내를 받고 관람을 포기했다. 티켓 두 장을 동시에 예매할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런 안내를 받기까지도 우여곡절이 많았다. 공연장 내 휠체어석을 따로 예매할 수 있는지, 보호자와 함께 입장할 수 있는지, 이 경우 보호자와 거리두기는 어떻게 이뤄지는지 등을 예매처에 물었지만 돌아오는 답은 ‘일단 티켓을 예매하라’는 말뿐이었다. A씨를 대신해 예매처와 소통한 B씨는 21일 쿠키뉴스와 통화에서 “기획사가 처음부터 휠체어석 운영 방침을 마련하지 않은 채 티켓을 오픈했다는 인상을 강하게 받았다”고 말했다.
휠체어석 없는 공연장 태반…있어도 정책 제각각
휠체어가 닿을 수 없는 곳, 그 중엔 K팝 성장 근간으로 꼽히는 공연장이 있다. 장애인이동권증진 콘텐츠제작 협동조합 ‘무의’가 2018년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서울 등 수도권 소재 1000석 이상 대형 공연장 21곳 중 휠체어석을 마련한 곳은 절반가량인 11곳에 그쳤다. 장애인·노인·임산부 등 편의증진보장에 관한 법률 시행령에 따르면 공연장 측은 좌석 1000석당 1%(10석) 이상 휠체어석을 마련해야 한다. 법이 닿지 않는 소규모 공연장 실태는 더욱 열악하다. 홍윤희 무의 이사장은 “최근에 지어졌거나 규모가 큰 공연장은 대부분 휠체어석을 만들어 놨지만, 작은 공연장 혹은 옛날에 만들어진 공연장 가운데선 (휠체어석이) 없는 곳이 너무 많다”고 지적했다.
휠체어석이 있더라도 공연 기획사마다 운영 방침이 달라 휠체어 이용자들이 불편을 겪고 있다. 가령 SM엔터테인먼트는 휠체어석을 전화 예매로 판매한다. 반면 하이브는 휠체어 이용자에게도 일반석을 예매하게 한 뒤, 공연장에선 휠체어석에 앉도록 안내한다. 신씨는 “휠체어석 이용은 가능하지만 예매는 불가능한 경우가 많다”며 “내가 예매한 좌석이 앞쪽이더라도 가장 뒤편에 있는 휠체어석으로 입장하는 경우가 많아 속상하다”고 했다. 연극·뮤지컬 기획사도 사정은 비슷하다. 신씨는 과거 김해 문화의전당에서 뮤지컬 ‘시카고’를 보려다가 ‘일반 좌석을 예매한 뒤 휠체어석으로 입장하라’는 말에 관람을 포기했다. “내가 예매한 좌석을 비워두려니 다른 사람의 관람 기회를 뺏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고 말했다.
“비장애인 위주로 설계된 공연장, 이대로 괜찮나”
장애인 관객의 발목을 붙잡는 건 비단 휠체어석 문제만이 아니다. B씨는 “공연장 대부분 비장애인 위주로 설계됐다는 점도 문제”라고 꼬집었다. 공연장 내 이동 통로가 좁고 바닥에 턱이 많아 휠체어로 이동하기 불편하다는 지적이다. 이런 환경에서 보호자 동반을 보장해주지 않는 기획사의 공연 정책은 사실상 휠체어 이용자를 배제하는 것이라고 B씨는 꼬집었다. 그는 “세븐틴 공연을 포기한 A씨는 국가 장애인활동지원서비스 대상자로 동반인(보호자)이 반드시 필요했는데도 ‘보호자도 따로 티켓을 예매해야 한다’고 안내받았다”며 “공연 예매부터 관람에 이르는 모든 과정이 비장애인 중심이다. 장애인 관객이 겪는 다양한 경로의 불편함을 이해하고 해소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짚었다.
미국 장애인법은 새로 짓는 스타디움 공연장에 대해 전체 좌석의 1% 이상을 휠체어석으로 두게 할 뿐 아니라 △ 휠체어석을 모든 구역에 배치할 것 △ 휠체어석이 고립되지 않도록 할 것 △ 휠체어석 옆에 동반인석을 마련할 것 △ 휠체어석 시야를 고려할 것 등을 의무화한다. 홍 이사장은 “외국 공연장과 극장은 통로를 계단이 아닌 경사로로 만들어 장애인도 일반석에 앉을 수 있도록 하는 경우가 많다”며 “한국은 (일반석과) 동 떨어진 휠체어석조차 제대로 운영되지 않는 수준”이라고 안타까워했다.
다만 최근 들어 공공 공연장을 중심으로 휠체어 이용자 등 장애인 관객의 접근성을 높이려는 시도가 이어지고는 있다. 아르코미술관 직원들은 최근 무의 측과 함께 워크샵을 열고 휠체어 이용자들이 느끼는 불편함을 체험한 뒤 개선안을 논의했다. 홍 이사장은 “세종문화회관, 국립극장 등도 휠체어 접근성을 높이기 위해 노력 중”이라고 귀띔했다. 대형 가요기획사 한 곳도 최근 무의 측에 연락해 휠체어석 운영 방침을 상의했다고 한다. 홍 이사장은 “K팝이 세계적으로 인기를 끌면서 공연장을 찾는 장애인 팬들도 늘고 있다”며 “세계적인 표준에 맞춰서 대형 기획사들이 장애인 공연 관람 정책을 정비하길 바란다”고 소망했다.
이은호 기자 wild37@kuki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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