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식민지였던 미국은 어떻게 초강대국이 됐나

이준목 2022. 3. 16. 14: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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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 리뷰] tvN <벌거벗은 세계사>

[이준목 기자]

세계의 초강대국 미국은 어떻게 시작되었고 어떻게 인류의 역사를 바꾸었는가. 3월 15일 방송된 tvN <벌거벗은 세계사>에는 전남대학교 사학과 김봉중 교수가 강연자로 등장하여 '미국의 시작'을 주제로 이야기를 펼쳤다.

미국의 국기인 성조기(Flag of the United States, 星條旗) 변천사가 소개됐다. 성조기의 의미는 별이 빛나는 국기(The Star-Spangled Banner)라는 뜻을 담고 있다. 하얀색과 빨간색의 13개 가로줄은 영국이 아메리카 대륙 식민지에 처음 세운 13개 주를 상징한다. 좌측 상단의 박스에는 원래 영국 국기가 새겨져있었으나 처절한 독립전쟁을 거친 이후 각 주를 상징하는 별을 새겨넣게 됐다. 13개의 별로 시작했던 성조기는 영토가 넓어지면서 별의 숫자도 점점 늘어났고, 1959년 하와이가 50번째 주로 편입되면서 현재의 성조기가 완성됐다.

초강대국 미국의 과거
 
 tvN <벌거벗은 세계사>의 한 장면.
ⓒ tvN
 
15~16세기 당시 유럽 열강들은 적극적으로 아메리카 대륙에 진출하여 식민지 건설 경쟁을 벌였다. 영국은 상대적으로 경쟁국들의 손길이 닿지않은 북아메리카에 주목했다. 하지만 시작은 순탄하지 않았다. 정착민과 원주민의 갈등, 질병 유행 등 현지적응의 한계로 인하여 식민지 건설정책은 실패로 끝나는 듯했다.

1620년 영국 플리머스항에서 출항한 메이플라워호는 사실상 미국 역사의 본격적인 시작이 된다. 이 배에 탑승했던 인물들은 주로 청교도들이었다. 성경중심 신앙과 금욕주의, 반가톨릭적 개혁 노선을 강조한 개신교 일파인 청교들은, 성공회를 국교로 하는 영국에서 탄압을 피하여 북아메리카로 이주하면서 오늘날 미국의 기원이 되었다.

이주민들이 장기간의 항해 동안 벌어진 내부 갈등을 봉합하는 과정에서 맺어진 '메이플라워 서약'은 자치적이고 평등한 성격을 추구하는 내용들이 포함되어 오늘날에도 미국 최초의 자치 헌법으로 평가받는다.

험난한 항해를 거쳐 신대륙에 무사히 도착한 청교도들은 불과 53명, 이들은 언덕위의 도시(City upon a hill)이라는 슬로건을 만들어냈다. 모두가 우러러보는 유토피아를 만들기 위하여 식민지로 부름받은 사람들이라는 신념과 자부심을 드러낸 것이 미국 건국 정신의 기원이 됐다.

초기에 많은 어려움을 겪던 정착민들은 차츰 자신들의 공동체를 구축하고 땅을 개척하여 확대해나가면서 자리를 잡아갔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원주민들과의 갈등은 피할 수 없었다. 초기 청교도들은 원주민들에게 도움을 얻거나 동맹을 맺으면서 우호적으로 교류하기도 했지만, 세력이 커지면서 충돌을 피할 수 없었다.

청교도가 중심이 된 이주민은 주로 원주민들을 개종시키려고 했지만, 원주민들은 자신들만의 언어, 문화, 전통을 포기할 수 없었다. 토지에 대한 개념도 전혀 달랐다. 유럽 정착민들에게 땅이 삶의 터전이자 소유물이라면, 원주민에게 땅은 소유할 수 없고 자연에서 빌려 사용한다는 개념에 가까웠다. 이는 결국 정착민과 원주민간 피비린내나는 전쟁의 서막이 됐다.

전쟁으로 원주민을 몰아낸 영국 이주민들은 북아메리카에 13개의 완성형 식민지를 건설했다. 초기에 본국인 영국은 지역마다 총독을 파견하기는 했지만 적극적으로 간섭하지 않고 직선의회를 통한 자치를 보장했다. 뉴욕, 펜실베니아 등 유명한 미국의 지명들은 모두 영국 귀족들의 이름에서 유래했다.

불안한 미래에 고뇌하던 미국인들
 
 tvN <벌거벗은 세계사>의 한 장면.
ⓒ tvN
 
영국은 아메리카에서 식민지 건설 경쟁을 벌이던 네덜란드, 스페인, 프랑스 등과 충돌할 수밖에 없었고, 식민지인들은 어쩔 수 없는 전쟁에 휘말려야 했다. 또한 원주민인 인디언은 정착과 농지 확보가 주목표였던 영국에 비하여 교역을 중시한 프랑스와 더 우호적인 관계를 형성했다. 유럽에서 시작된 열강들의 전쟁은 북아메리카 대륙까지 번졌고 영국과 프랑스-인디언 동맹간의 '7년 전쟁(1756년~1763년)'으로 이어졌다. 이 전쟁에서 승리한 영국은 광활한 영토를 손에 넣게 된다.

하지만 전쟁에서 막대한 비용을 소모한 영국은 그 부담을 메우기 위하여 아메리카 식민지에 눈을 돌리게 되었고, 설탕법, 인지세법, 타운센드법 등을 둘러싼 세금 전쟁은 미국 독립운동의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본국의 불합리한 행동에 식민지들의 불만을 점점 고조되어갔고 저항운동으로 번졌다. 아메리카는 '대표없이 과세없다'는 슬로건을 제시하여 식민지 대표자가 없는 영국 의회에서 세금을 부과하는 데 이의를 제기했다.

영국과 아메리카 식민지의 계속된 갈등은 결국 1773년 '보스턴 차(茶)' 사건을 계기로 폭발한다. 인디언 복장으로 위장한 식민지 상민들이 차세법에 항의하여 영국 본토로부터의 차 수입을 저지하기 위하여 영국 선박을 습격, 당시 사치품이었던 차 상자들을 바다에 폐기한 사건이다. 큰 충격을 받은 영국 의회는 보복으로 강제법을 도입하여 보스턴 지역을 다른 식민지로부터 고립시키는 강경책에 나선다.

하지만 하지만 자유가 박탈 당할수 있다는 위기의식을 느낀 식민지인들은 오히려 보스턴과 연대하여 영국 정부에 저항했다. 식민지인들은 협의회를 통하여 선출된 13개 식민지 대표 55인으로 대륙회의를 개최하고 식민지의 자치권 보장과 강제법 철회 등을 요구했다. 당시 대표로 참석한 조지 워싱턴, 존 애덤스 등은 훗날 미국의 대통령이 되며 '건국의 아버지'로 추앙받게 된다.

영국은 대륙회의의 요구를 반란으로 받아들이고 식민지는 결국 피할 수 없는 독립전쟁을 시작했다. 1775년 4월 19일 렉싱턴에서 벌어진 식민지 민병대(미니트맨)와 영국 정규군간의 전투로 독립전쟁의 막이 올랐다. 민병대는 영국군에 비하여 전투경험과 훈련에서 열세였지만 지형지물을 확인한 게릴라전으로 영국군에 막대한 피해를 입혔다.

식민지인들은 1775년 5월 2차 대륙회의를 열고 체계적인 독립군을 창설하고 워싱턴을 초대사령관으로 선출했다. 당시 식민지 내부에서도 독립파와 독립 반대파로 의견이 갈렸다. 독립 반대파들은 영국의 보호 없이 주변 강대국이나 인디언들의 위협에 버틸 수 있겠냐는 두려움을 내세웠다.

영국에서 미국으로 이주해온 토마스 페인은 저서 <상식>에서 영국 왕 조지 3세를 짐승으로 비유하며 군주정의 폐해와 한계를 지적했다. '계몽주의 사상에 입각한 자유와 평등이라는 시대적 요구에 따라 완전한 미국의 독립이 곧 상식'이라는 페인의 파격적인 주장은, 불안한 미래에 고뇌하던 미국인들에게 독립에 대한 분명한 논리와 확신을 심어줬다.

영국군 이긴 미국-프랑스 연합군
 
 tvN <벌거벗은 세계사>의 한 장면.
ⓒ tvN
 
1776년 7월 4일 필라델피아에 식민지 대표들이 모여서 역사적인 독립선언문을 발표한다. 미국 독립의 중요한 슬로건은 생명-자유-행복의 추구였고 그중에서도 핵심은 자유였다. 미국인 타일러는 "별개의 주라는 인식이 강했던 13개 주가 독립선언문을 기반으로 하나의 국가로서 공동체 의식을 가지게 되었다는 것이 엄청난 의미가 있다"고 설명했다.

토마스 제퍼슨이 작성한 독립선언문에서 행복은 원래 자산(Property)이었지만, 하층민들의 반발과 오해를 우려하여 포괄적인 의미의 행복으로 바꿨다는 뒷이야기도 있다. 내 재산을 힘있는 이들에게 빼앗기지 않고 지키는 것이야말로 행복을 추구할 권리에 포함된다는 것이다. 미국의 독립선언문에 담고있는 가치가 이념과 현실, 실용과 경제적인 의미까지 아우르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미국은 독립전쟁에서 막강한 영국군을 상대로 초반에 어려움을 겪었지만 차츰 전세를 역전시켜나갔다. 독립군은 1777년 세러토가 전투에서 숲지대라는 지형과 저격수들을 활용하여 영국군 지휘관들을 집중 겨냥하는 전술로 대승을 거뒀고 전쟁의 승기를 잡았다.

또한 미국은 영국의 숙적이었던 프랑스를 아군으로 끌어들였다 당시 미국이 프랑스로부터 지원받은 규모는 약 13억 리브르, 현대로 환산하면 7조 6300억 원에 이른다. 아이러니하게도 프랑스의 대규모 지원이 자국의 재정 고갈로 인한 과도한 세금징수로 인하여 민심 이반을 부르며 프랑스 대혁명의 도화선으로 이어졌다.

미국과 프랑스의 연합군은 영국군을 요크 타운에서 포위하며 항복을 받아냈다. 승산이 없다고 판단한 영국은 결국 평화 협상에 돌입했고 1783년 9월 프랑스 파리에서 마침내 미국의 독립을 인정하는 강화조약을 체결했다. 미국이 비로소 하나의 국가로서 정식으로 인정받는 순간이었다.

프랑스는 미국과 이후로도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고 독립 100주년에는 기념으로 너무나도 유명한 자유의 여신상을 제작했다. 7개의 대양과 대륙을 상징하는 왕관을 쓰고 오른손에 자유의 횃불, 왼손에는 독립선언문을 들고 있는 모습은 미국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아이콘 중 하나가 됐다.

김 교수는 파란만장한 미국의 역사를 "자부심과 오만 사이의 아슬아슬한 이중주"라고 정의했다. 신대륙에서 유토피아를 만들기 위하여 부름을 받은 사람이라는 자부심, 하지만 그 자부심은 아차하는 사이에 종이 한 장 차이의 오만으로 변질되기 쉽다. 오늘날의 초강대국 미국을 만든 이면에 원주민에 대한 침략과 학살, 강대국간의 영토 분쟁, 본국과의 독립전쟁에 이르기까지 무수한 피의 역사를 넘어야했던 미국의 어두운 이면을 돌아보게 만드는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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