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가족부 폐지?! 대선에서 페미니즘이 사라졌다!

2022. 3. 8. 0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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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선 후보들이 여성 권리 관련 사안 언급에 끝끝내 몸을 사리고 있다. 그러는 사이 '페미니즘'은 입에 담기조차 꺼려지는 대선판의 '볼드모트' 같은 존재가 됐다. 향후 5년간 우리 삶을 좌우할 20대 대선이 코앞으로 다가온 지금, 주요 대선 후보들의 여성 관련 공약을 살펴보고 그들의 전략적 침묵에 숨은 함의가 무엇인지 진지하게 곱씹어볼 때다.

2022년 첫날, 〈뉴욕 타임스〉가 한국의 ‘안티페미니즘’ 움직임을 집중적으로 다룬 기사를 냈다. 기사는 “젠더 전쟁이 한국 대선에 스며들었다”며, 페미니즘에 강하게 반발하는 일부 젊은 세대의 마음을 얻기 위해 표 경쟁을 벌이고 있는 우리나라 대선 후보들의 행보를 함께 분석했다. 주요 후보들은 여성 문제에 대해 말하지 않으며, ‘여성가족부 폐지’ 같은 안티페미니스트들의 목소리에만 반응하고 있다는 것이다. 대통령 후보로 선거를 치르던 5년 전, 문재인 대통령이 “나는 페미니스트 대통령”이라고 공개적으로 말하며 지지를 잃지 않았던 것과는 사뭇 대비된다. 20대 남성, 이른바 ‘이대남’으로 대표되는 안티페미니즘 지지자들은 젊은 남성들이 ‘여성을 배려하는 정책’으로 역차별을 받고 있다고 말한다. 기성세대가 성차별을 만들었는데, 그 대가를 이미 성평등한 사회를 살고 있는 지금 시대의 청년들이 감당하는 것은 부당하다는 것이다. 과거와 시대가 달라진 건 맞다. 하지만 숫자가 보여주는 현실은 ‘성평등한 사회’와 여전히 거리가 있다. 세계경제포럼이 발표한 2021년 한국의 성 격차 순위는 156개국 중 102위다. OECD 국가 중 성별 간 임금 격차가 가장 큰 나라는 한국이다. 디지털 성범죄와 스토킹 강력 범죄로 신상 공개 명령을 받은 강력범의 수는 2021년 한 해 동안 10명으로, 역대 최고를 기록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선 후보들은 유리천장이나 여성 대상 범죄는 중요한 문제가 아닌 듯 언급을 피한다. 선거전을 바라보는 여성들 사이에서 “여자들은 투표권이 없는 나라가 된 것 같다”란 탄식이 나오는 이유다. 대체 무엇이 대선 후보들로 하여금 여성 유권자의 목소리를 지우고 페미니즘을 ‘보이콧’하게 만들었을까?

「 가부장제 사회의 지위를 되찾고 싶어 하는 남자들 」
전문가들은 지금의 젊은 안티페미니스트들이 앞선 세대에 비해 보수화됐다고 분석한다. 프랑스 뉴스 매체 ‘France 24’가 소개한 요크 대학교 논문은 한국의 젊은 세대 사이에서 성평등 사회에 대한 의견이 특히 더 엇갈린다는 사실에 주목한다. 논문 저자 정의솔 씨는 성차별과 여성 혐오에 저항하는 여성들의 말과 행동이 점점 가시적으로 드러나면서, 가부장제를 되찾고 싶어 하는 젊은 남성들이 이 변화를 위협적으로 느끼게 됐다고 분석한다. 그러면서 불만을 가진 이들이 변화한 사회 분위기에 대항하는 방식으로서 남성주의자들, 즉 안티페미니스트들에게 지지를 보내게 됐다고 설명한다. 안티페미니스트들의 활동 방식은 젊은 여성 유명인에게 ‘페미’나 ‘메갈’ 낙인을 찍어 온라인상에서 괴롭히며 ‘본때’를 보여주는 것으로 가장 잘 드러난다. 괴롭힘의 대상이 실제로 페미니즘을 옹호하는 말이나 남성을 혐오하는 말을 했는지 아닌지는 관계없다.
「 남자를 위한 공약만 있다고 느끼는 여자들 」
정치권은 20대 남성들의 지금과 같은 분노가 지지율과 득표에 큰 영향을 미친다고 본다. 더불어민주당 서울시당은 지난 1월 서울 지역 남녀 유권자 2500명을 대상으로 여론조사를 실시한 후 ‘이대남’을 잡는 것이 득표에 중요하다는 결론을 냈다. 20대 남성 주도로 이재명 후보의 지지율이 하락하고 있고, 20대 여성을 배제해도 역풍은 없다는 것이 이들의 분석이다. 한편 국민의힘은 당내 갈등과 〈삼프로TV 경제의 신과함께〉(이하 〈삼프로TV〉) 출연 등으로 추락했던 윤석열 후보의 지지율을 반등시키기 위해 ‘여성가족부 폐지’ 공약을 발표했다. 이런 인식은 공약뿐 아니라 후보들의 말과 행동에도 반영된다. 이재명 후보는 지난해 11월 “광기의 페미니즘을 멈춰야 한다”는 내용의 온라인 커뮤니티 글을 페이스북에 공유해 비판을 받았다. 이후 “이런 의견이 있다고 전달하려 한 것일 뿐 내 생각은 아니었다”라고 해명했지만, 어떤 경우라고 해도 ‘이대남’을 의식한 행동이 아니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윤석열 후보는 지난해 8월 저출생 문제의 해결 방법에 대해 말하던 중 “페미니즘이라는 게 너무 정치적으로 악용돼 남녀 간 교제를 막는다더라”며 페미니즘을 저출생의 원인으로 지목했다. 여론에 따라 입장을 번복하는 해프닝도 벌어진다. 이재명 후보는 다양한 사회적 약자를 다루는 CBS 유튜브 채널 〈씨리얼〉에 출연을 약속했다가 “페미 성향”이라는 남초 커뮤니티 여론을 접하고 이를 번복했다. 여성 유권자를 무시하고 젊은 남성 유권자들의 마음을 잡는 데만 치중한다는 반발을 의식한 것일까? 〈씨리얼〉 출연 거부로 비판을 받은 더불어민주당은 1월 중순 페미니즘을 중심 소재로 다루는 진보 성향 유튜브 채널 〈닷페이스〉와의 인터뷰에 응했다. 그다음 주에는 2019년 N번방을 집중 취재해 폭로했던 활동가 집단 ‘추적단 불꽃’의 멤버 박지현 씨를 디지털성범죄근절특위 위원장으로 영입했다. 박 위원장은 선거 캠프 합류 후 경향신문과의 인터뷰에서 “페미니즘이 여성 우월주의라고 잘못 주장하는 남성들이 너무 많으니 이 후보도 조심하는 것 같아 아쉽다”라고 말했다. “윤 후보는 여가부 폐지를, 이 후보는 탈모약 건강보험 적용을 내걸었다. 남성들을 위한 공약밖에 없다고 느끼는 2030 여성이 많다”는 박 위원장의 말은 현재 여성 유권자들의 입장을 종합해 대변한다.
「 여성을 위한 공약, 진짜 없는 걸까? 」
주요 대선 후보들에게 성평등이나 여성 관련 공약이 전혀 없는 건 아니다. 하지만 부동산·에너지·세금과 같은 경제 이슈에 비해 이런 정책은 그다지 전면에 내세워지지 않은 상태다. 다만 ‘친이대남’ 행보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가 지속되면서 더불어민주당과 국민의힘은 좀 더 구체적인 공약을 내놨다.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후보가 1월 발표한 ‘여성·가족 5대 공약’이 대표적이다. 노동 분야에서는 성별 임금 격차 해소를 위한 중장기 로드 맵 마련, 남녀고용평등법 개정, 기업 ESG(환경·사회·기업지배구조) 평가 지표에 성별 다양성 항목 비중 높이기 등의 내용이 담겼다. 성과 임신·출산 문제와 관련해서는 모든 여성 청소년의 생리대 구입비 지역화폐로 지원, 남성 청소년에까지 HPV 백신 무료 접종 확대, 난임 시술 약제비 급여화 등이 있다. 앞서는 디지털 성범죄와 관련해 유포된 성 착취물을 빠르게 삭제하는 기술 개발에 투자하는 내용, 그리고 성 착취물로 얻은 범죄 수익을 법원 판결이 나오기 전에 몰수할 수 있게 하자는 내용의 공약을 발표했다. 국민의힘의 여성 관련 공약은 대부분 출산과 육아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윤석열 후보는 1월 초저출산 시대 산모의 고통을 줄이기 위해 산후우울증 등 정신 건강 관련 지원 바우처를 지급하겠다고 밝혔다. 또 자녀 등·하원 도우미 비용 소득공제 적용을 추진하고, 부모 각각의 육아휴직 기간을 늘리겠다고 공약했다. 이에 앞서 지위를 이용해 저지르는 권력형 성범죄의 처벌 수위를 높이겠다고 했다. 주요 후보 중 유일하게 여성가족부 ‘개편’이 아닌 전면 ‘폐지’를 언급한 윤석열 후보는 이후 신설 부처에서 가족과 인구 감소 문제를 집중적으로 다루겠다는 방향을 제시했다. 정의당은 유일하게 차별금지법 제정을 촉구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성범죄와 관련해서는 형량을 전체적으로 높이고, 비동의 강간죄를 법에 명시하겠다고 공약했다. 노동과 돌봄 관련해서는 성별임금격차해소법 제정, 육아휴직 아빠 할당제, 육아 노동시간 유연제 도입을 공약했다. 1월에는 지금의 대선이 2030세대의 남녀 갈등에 집중돼 있다며, 50대 이상 여성들을 위한 정책 방향을 새롭게 내놨다. 퇴근도 은퇴도 없는 가사와 돌봄 노동을 하고, 집 밖에서는 저임금 장시간 노동을 하며, 이름 대신 ‘엄마’라고 불리는 5060 여성들의 건강과 자립을 위한 공약들이다. 돌봄자 수당 지급, 노후 일자리 지원, 완경기 주치의제도 등이다. 여성가족부에 대해서는 기능을 확대 강화해 성평등부로 개편하겠다고 밝혔다. 국민의당은 일과 가정의 양립을 위한 돌봄 지원에 집중해 공약을 내놨다. 저녁 7시까지 나라에서 아이를 돌보겠다고 했으며, 국공립어린이집을 확대하겠다고 공약했다. 여성가족부에 대해서는 전면적으로 확대 개편을 거쳐 성평등인권부로 만들겠다고 밝혔다.
「 정치판의 ‘볼드모트’가 된 페미니즘 」
다양하지 못하다는 한계가 있지만, 위에 자세하게 담지 못한 내용까지 포함하면 여성 관련 공약의 수가 절대적으로 적다고 볼 수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관련 공약도 거의 존재하지 않는 ‘안티페미니즘’이 이번 대선에서 더 큰 목소리를 내는 이유는 뭘까? CNN은 한국의 신남성주의와 안티페미니즘이 대선의 중심이 된 것에 대해, “여성 혐오는 미국과 유럽, 중동 등 세계 곳곳에서 이전부터 우파 정치의 수단으로 쓰여왔다”라고 해설한다. 성별과 인종적 소수자들에 대한 혐오를 자극해 쉽게 지지 세력을 얻기 위해 구호를 만드는 방식이 세계 곳곳에서 반복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윤석열 후보가 페이스북에 올린 ‘여성가족부 폐지’라는 7글자짜리 포스트는 이번 대선의 안티페미니즘 행보를 잘 요약해 보여준다. 정책이 존재하지 않는 7글자 구호와, 존재하지만 호명되지 않는 정책. ‘페미니즘’은 이렇게 정치판의 말할 수 없는 볼드모트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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