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테크가 예술" S&P500보다 더 돈된다..MZ세대 꽂힌 '이곳'
[SPECIAL REPORT] 한국 미술시장 1조 시대
한국 미술시장은 지난해 거래액 9000억원을 돌파했다. 예술경영지원센터의 ‘2021년 한국 미술시장 결산’에 따르면 경매시장 3280억원, 화랑 4400억원, 아트페어 1543억원 등을 더해 약 9223억원 규모다. 코로나19가 시작된 2020년 미술시장이 13.7% 감소해 3291억원 규모였던 것에 비하면 2.8배로 부풀었다.
경매시장만 해도 2020년 낙찰총액 약 1158억원에서 3280억원대로 183.2% 치솟았는데, 연간 최대 낙찰액이었던 2018년의 약 2000억원을 훌쩍 뛰어넘는 수치다. 작가별 낙찰총액 1위에 오른 이우환의 거래액 약 394억원은 국내 기록이었던 2018년 김환기의 354억원을 갈아치웠다. 지난해 타계한 김창열의 ‘물방울’ 시리즈 중 가장 작은 1호 사이즈 작품이 케이옥션 경매에서 시작가 1200만원보다 7배 뛴 8200만원에 낙찰된 것도 화제였다.
올해는 세계 양대 아트페어 중 하나인 프리즈(Frieze)가 9월 서울에서 국내 최대 아트페어인 키아프(KIAF)와 공동 개최될 예정이라 미술시장은 최초의 1조원 돌파를 점치고 있다. 규모와 유통 면에서 글로벌 경쟁력을 갖춘 프리즈가 한국을 아시아 거점으로 택한 만큼 우리 미술시장에 변곡점이 될 것이란 관측이다. 황달성 한국화랑협회장은 “2002년 출범 당시 아시아 제일의 아트페어였던 키아프가 지금은 6,7위로 밀렸다. 프리즈로 인해 우리 컬렉터들이 어느 정도 해외 시장으로 빠지겠지만, 현재 정세가 불안한 홍콩, 지진 탓에 장치비가 많이 드는 일본, 관세가 높은 중국의 틈새를 잘 이용해 외국 컬렉터와 관광객들을 불러들이면 아시아 최고 미술시장으로 거듭날 수 있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급격한 팽창에 거품이 낀 건 아닐까 싶지만, GDP 대비 0.1~0.2%인 선진국 미술시장에 비해 아직 한국 시장은 0.02%에 불과하다. 지난해 약 20조원 규모였던 게임시장에 비하면 미술시장은 20분의 1 수준으로, 세계 시장 점유율도 아직 1%에 불과한 걸 고려하면 성장 잠재력이 큰 시장이다.
최근 ‘아트테크’ 열풍도 시장을 키우고 있다. 원래 미술품은 수익률이 상당한 자산이다. 씨티은행의 2021 미술시장 보고서에 따르면 1985년부터 2020년까지 장기 투자자산 중 현대미술품이 사모펀드 다음으로 가장 높은 11.5%의 수익을 냈다. 미술투자자문사 마스터웍스도 지난 25년간 현대미술품의 수익률(14%)이 S&P500(9.5%)보다 월등히 높은 것으로 파악했다. 특히 미술의 가치는 주식이나 채권에 비해 경제 지표에 덜 민감하다는 점에서 매력적인 대체 투자자산으로 여겨진다. 2017년 크리스티 뉴욕 경매에서 사우디 아라비아의 국부 펀드가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살바토르 문디’를 미술품 경매 사상 최고가인 4억5030만 달러(약 5060억원)에 낙찰받는 등 중동 대부호들도 미술 투자 러시다.
GDP 대비 0.02% 불과, 성장 잠재력 커
이런 ‘부자들의 놀이터’의 문턱이 낮아진 게 지금 열풍의 양상이다. 일반 대중이 미술 시장에 참여하기 시작한 것이다. 미술품에 대한 대중의 거리감부터 확 좁아졌다. 지난해 삼성가의 수장고에서 공공 미술관으로 옮겨간 ‘이건희 컬렉션’의 영향도 크다. 총 2만3000여 점, 시가 10조원이라는 역대급 기증이 상속세 물납제 등 사회적 이슈를 일으켰고, 국립중앙박물관, 국립현대미술관, 대구미술관, 광주시립미술관 등 전국의 공공 미술관에서 이건희 특별전이 연달아 열리면서 대중의 호기심 어린 발걸음이 몰렸다. 도현순 케이옥션 대표는 “코로나 때문에 풍부해진 유동성과 함께 투자 열풍이 미술시장까지 확대됐고, 이건희 컬렉션으로 인한 미술품 수집에 대한 대중의 인식 변화도 시장 호황에 긍정적인 요인으로 작용했다”고 짚었다.
‘누구나 예술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을 환기시킨 아트테이너의 활약도 한몫했다. 가수 송민호·강승윤·헨리 등이 10월 런던 사치갤러리에 진출해 떠들썩했고, 구혜선·솔비 등 왕성히 활동해온 아트테이너가 자신의 실력을 취미 수준으로 폄훼한 평론가와 예술가 자격 논쟁을 벌이며 대중의 이목을 끌기도 했다.
세계 미술시장의 빅이슈로 뜬 NFT아트도 해외 경매에서 고가에 낙찰되며 미술에 대한 관심을 부추기고 있다. 지난해 크리스티 뉴욕 경매에서 6930만 달러(약 785억원)에 낙찰된 비플의 NFT아트 ‘에브리데이즈’는 현존 작가 경매가 순위에서 제프 쿤스의 ‘토끼’와 데이비드 호크니의 ‘예술가의 자화상’에 이어 3위에 올랐다. 팬데믹으로 디지털 공간에서 미술을 전시하고 유통하는 일이 많아지면서 등장한 NFT아트는 그간 값을 매길 수 없어 존재하지 않았던 디지털아트 업계의 시장을 활짝 열었다.
아트페어에도 대중이 몰렸다. 예술경영지원센터 조사에 따르면 지난해 신설 아트페어 수가 무려 19개다. 키아프는 관람객 8만8723명, 매출액 659억원으로 역대 최고를 기록했는데, 2019년 매출 310억원의 두 배 이상이다. 아예 진입 장벽을 없앤 아트페어도 등장했다. 신진 작가·갤러리와 초보 컬렉터를 연결하는 기획이었던 ‘더프리뷰 한남’은 갤러리의 최초 참가비를 없애고 작품 판매금액의 20%(최대 100만원)를 후불로 지불할 수 있게 하는 등의 장치로 눈길을 끌었다.
‘NFT아트’도 세계시장 빅이슈로 떠올라
미술시장의 문턱을 낮춘 결정적 요인은 온라인화와 MZ세대의 참여다. 아트바젤과 금융그룹 UBS의 ‘2021 세계 미술시장 보고서’에 따르면 온라인 거래 비중이 25%로, 전년도에 비해 2배 수준으로 껑충 뛰었다. 디지털세상이 되면서 서서히 조짐은 있었다. 1차 시장을 주도하는 갤러리에 소속되지 못한 작가들이 온라인에서 유통 활로를 모색하기 시작한 것. 그런데 팬데믹으로 경매사들이 온라인 경매를 늘리고 MZ세대 투자 열풍까지 불면서 주요 소비계층 자체가 달라졌다.
미술시장 전문 컨설팅 기관인 아트 이코노믹스에 따르면 지난해 상반기 밀레니얼 세대가 세계 고액 자산가 컬렉터 중 64%를 차지하고, 이들의 미술작품에 대한 지출이 평균 37만8000달러로 전체 세대 중 최고다. 19년과 20년의 2배 이상 증가한 액수로, 평균 11만8000달러를 쓴 X세대보다 훨씬 높고, 베이비부머들의 4배에 가깝다.
서울옥션의 지난해 신규 회원도 약 3500명이 온라인으로 가입한 30대가 가장 많았고, 컬렉터층이 젊어지면서 우국원, 문형태 등 젊은 작가 작품에 대한 수요도 크게 증가했다. 주로 전문가의 조언을 듣고 작품을 구매하는 기성 컬렉터들과 달리, MZ세대 컬렉터는 자신의 취향에 맞는 작품을 고르는 경향이 강하다. SNS를 통해 스스로 홍보하는 작가들의 작품에 많이 노출되면서 나름의 취향을 갖게 된 영향이다. 서울옥션 김서영 선임은 “기성세대가 이미 시세가 형성된 안정적인 작가들 위주로 투자한다면, MZ세대는 시세는 몰라도 본인이 보기에 예쁜 그림을 찾기에 예상치 못한 작품 가격이 올라가거나 경합이 붙곤 한다”면서 “특히 2년 전 시작한 제로베이스 경매는 신진작가 소개를 목적으로 0원에서 시작하는데, 젊은 층이 적극 참여해 직접 시세를 형성하고 있다”고 전했다.
인플루언서의 역할도 크다. 국내외 거장들과 신진 작가들의 작품을 다양하게 소장해 젊은 컬렉터의 대명사로 통하는 BTS의 RM이 대표적이다. RM이 단색화 거장 윤형근의 전시를 해외까지 날아가 관람하고 관람객에게 직접 작품을 설명하는 등 팬으로 알려지자 지난해 윤형근은 최초로 경매시장 낙찰총액 10위권에 진입했다.
하지만 누구나 실물 작품을 소유할 수 있는 건 아니다. 고액자산가가 아닌 일반 대중에게 미술시장 문을 열어준 건 새로운 플레이어로 등장한 미술품 공동구매 플랫폼이다. 소유권 분할을 통해 고가의 미술품을 다수의 투자자가 나눠서 구매하고 되팔아 투자금을 회수하는 방식으로, 소액으로도 투자가 가능하다. 2018년 아트앤가이드가 첫선을 보인 이래 테사, 소투, 아트투게더 등이 가세해 지난해 500억원 규모로 성장했다. 한 번도 미술품을 구매한 경험이 없는 대중에게 재테크로 관심을 유도한다는 점에서 시장 저변 확대의 공이 크다. 하지만 자본시장법상의 금융상품이 아닌 만큼, 소비자보호 측면에 의문이 있고 플랫폼 운영 방식에 따라 분쟁의 소지도 있다.
양적 팽창 넘어 작품 가치 논의 동반돼야
향유보다 투자에 포커싱한 아트테크 열풍은 오래 가지 않을 수도 있다. 2006년~2008년 사이 미술시장 붐을 타고 생겨났던 전 세계 50여 개 아트펀드 중 상당수가 2008년 세계 금융위기로 폭락해 큰 손실을 안긴 바 있다. 도현순 대표는 “지난해 세계 3대 경매회사 매출이 사상 최대를 기록하는 글로벌 호황 속에서 국내 시장 팽창도 당연한 현상이지만, 미술시장도 통화긴축의 영향 등 거시경제 흐름에 따라 호황과 불황이 반복되는 법”이라고 진단했다.
2000년대 활황장과는 차별점도 분명히 있다. 김희근 예술경영지원센터 이사장은 “그사이 ‘영앤리치’들이 폭증했고, 사회 전반적으로 예술시장에 대한 이해도가 높아지면서 너도나도 미술작품 구매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이 다르다”면서 “프리즈 아트페어를 비롯해 타데우스 로팍 등 세계 유수 갤러리들의 한국 지사 설립과 전문 인력 고용은 해외에서도 한국 시장을 아주 높게 평가하고 있다는 증거”라고 분석했다.
하지만 지금 우리 시장은 극소수 유명 작가 작품에 쏠림현상이 심하다는 점에서 양적 팽창에 불과할 뿐이라는 지적도 있다. 미술평론가 박영택 경기대 교수는 “고도의 감식안이 작동되어야 하는 컬렉터가 되는 건 쉽지 않다. 안목있는 컬렉터들 덕분에 안정적인 고미술 시장에 비해 현대미술 컬렉터는 작가의 명성만 믿고 제대로 따져보지도 않고 사거나, MZ세대 컬렉터들은 얄팍하고 장식적인 작품에 몰리니 장기적으로 가치없는 작품이 비싸진다”면서 “화랑이 정말 좋은 작품을 소개하는 차원이 아니라 너무 쉽게 투자가치나 명망으로 소개하는 풍토도 아쉽다. 작품의 가치에 대해 지적인 논의를 유발하는 수준있는 화랑이 많아져야 하고, 컬렉터 또한 안목과 감각을 훈련하는 자세를 갖출 때 시장의 질적 성장도 가능하다”고 말했다.
아트테크 열풍의 과실을 컬렉터나 투자자만 누릴 게 아니라 예술가들이 왕성하게 창작활동을 할 수 있는 생태계 구축으로 이어지게 하는 시스템도 고민해야 할 시점이다. 예컨대 유대계 아트 펀드 회사인 티로시 드레온 컬렉션은 400여 점의 공동 소유 작품을 소장하고 연평균 9%의 수익률을 내고 있는데, 유망한 신진 작가들의 작품을 구입하고 그들을 위한 레지던스 프로그램을 진행해 재량을 펼칠 기회를 준 뒤 미술관과 컬렉터들에게 추천해 가치를 상승시키는 것으로 유명하다.
도현순 대표는 “아트테크는 많은 사람들이 미술품 컬렉션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하는 계기가 되지만, 미술투자의 가장 큰 즐거움은 작품을 소장한 사람이 경험할 수 있는 심미적 만족감과 미적 가치 그리고 예술적 경험이다. 재테크 수단을 넘어 작가를 아끼고 후원하며 함께 성장할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하는 컬렉터가 많아진다면 미술 생태계도 풍요로와질 것”이라고 말했다. 김희근 이사장도 “시장 팽창으로 작가들이 세계 시장에서 인정받을 수 있는 기회가 크게 열린 시점”이라면서 “전문 인력의 고용과 미술 관련 기업의 성장 기회까지 넓어지는 선순환으로 이어질 수 있도록 세제혜택 등 미술품 수집을 장려하는 정책적 뒷받침이 적극 추진되어야 할 것”이라고 당부했다.
유주현 기자 yjjo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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