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 만든 일등 공신, 그는 괴물이었다
여러모로 역대급 대선입니다. 국내외 영화와 드라마, 다큐멘터리로 20대 대선과 한국정치를 읽습니다. 어떤 후보와 정당이 나의 일상을 안전하고 풍요롭게 할 지, 대한민국의 미래를 책임질 지 다각도로 모색해 봅니다. <편집자말>
[하성태 기자]
▲ 미국 드라마 <라우디스트 보이스> 스틸 컷 |
ⓒ 왓챠 |
여기 괴물이 있다. 2016년 7월, 무려 23명의 여성으로부터 성폭력 관련 줄 소송을 당한 경악할 만한 성범죄자였던 그가 더 큰 놀라움을 안겨준 이유는 (그의) 직업 때문이었다. 2020년 기준 시청률 1위 뉴스 채널이자 미국을 대표하는 케이블 보도전문채널인 <폭스 뉴스>를 1995년 공동설립하고 십 수 년 간 이끈 언론인이자 방송국 대표, 그리고 정치 컨설턴트. 그의 이름은 로저 에일스다.
2016년 <폭스 뉴스>의 간판 진행자였던 메긴 켈리와 그레천 칼슨은 로저 에일스 회장을 상대로 성폭력 소송에 나섰고, 미국 사회를 충격에 빠뜨린 이 소송은 이듬해 할리우드의 실력자였던 하비 와인스타인의 줄소송에 이은 '미투' 운동의 전초전이 됐다.
이를 그린 영화가 바로 <밤쉘: 세상을 바꾼 폭탄선언>(2020)이다. 그 로저 에일스가 사회 유명인사에 속하는 방송사 여성 앵커와 직원들을 어떻게 성적으로 유린했는지를, 또 두 여성 앵커는 그 괴물에 맞서 어떻게 싸웠는지를 <밤쉘>은 잘 표현하고 있다.
이 범죄만으로도 로저 에일스는 충분히 미국 사회가 낳은 괴물이라 칭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괴물과 싸우기 위해선 그 괴물의 심연을 바라볼 필요도 있는 법. 미국 케이블 방송국 '쇼타임'이 같은 시기인 2019년 제작하고 한국은 왓챠에서 스트리밍 중인 7부작 <라우디스트 보이스>(The Loudest Voice)가 들여다 본 로저 에일스는 단순히 여성 직원들에게 막대한 피해를 입힌 가해자에 그치지 않는다.
<라우디스트 보이스>는 미국 사회의 우파 정치권력과 결탁한 텔레비전·미디어 권력이 어디까지 탐욕스러울 수 있는지, 또 그 권력의 결탁이 미국 사회에 어떤 영향력을 끼쳤는지에 대한 정치사회 보고서이자 인간 탐구다. 그와 동시에 가해자에게 감정이입을 할 여지를 절대 주지 않는, 더불어 한국 사회 속 정치와 언론의 관계를 반추할 수 있게 만드는 문제작이다.
▲ 미국 드라마 <라우디스트 보이스> 스틸 컷 |
ⓒ 왓챠 |
<폭스 뉴스>는 '친공화당' 성향을 넘어 극우/우파 논조를 대변하는 패널이 토크쇼 단골손님으로 출연하는, 정치적 주장뿐만 아니라 자극적이고 선동적인 보도행태로 개국 이후 시청률 1위에 올라서는 기염을 토했다. 일례로, <폭스 뉴스>는 트럼프가 애호하는, 아니 이를 넘어 트럼프를 대통령으로 만든 1등 공신 중 하나였다. 2011년 <폭스 앤드 프렌즈>란 오전 프로그램에 고정 출연하기 시작한 트럼프는 이후에도 로저 에일스와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고, 예정된 수순처럼 <폭스 뉴스>는 2016년 대선에서 트럼프를 지지했다.
대중들이 나에 대해 뭐라고 말할지 잘 안다. 내가 직접 읊어 보자면, 우파, 편집증, 뚱보. 반박하고 싶진 않아. 난 보수주의자고, 먹는 걸 좋아하고, 텔레비전의 힘을 믿지. 대중이 원하는 걸 선사하는 것. 자신들이 원하는 사실이 뭔지 모르더라도 말이다.
2017년 바닥에 쓰러져 있는 로저 에일스(를 외양까지 그럴싸하게 연기한 명배우 러셀 크로우)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화면이 바뀌면, 1995년 평범한 식당에서 홀로 시럽을 듬뿍 뿌린 팬케이크를 먹고 있는 로저 에일스가 보인다. 한 눈에 보기에도 탐욕이 철철 흐르는 배 나오고 머리가 벗겨진 중년 남자의 등장. 이때 그의 나이 55살이었다.
미국을 대표하는 제조기업 제너렐 일렉트릭사의 회장이자 미 NBC 소유주였던 잭 웰치 회장과 독대한 로저 에일스는 그 자리에서 예고됐던 해고 통고를 못내 받아들이는 제스처를 취하면서 일종의 구애와 '반협박'에 가까운 양동 작전을 펼친다. MSNBC나 CNN 등 경쟁사로 이직하지 말라는 잭 웰치에게 "지구상 존재하는 모든 매체"로 갈 수 있다는 계약 조건을 추가하겠다고 말한다.
30년 간 방송계에 몸 담으며 방송 프로듀서로, 홍보맨으로 살아온 '방송쟁이'가 "너는 뉴스는 못해"라며 자신을 무시하는 굴지의 대기업 회장에서 맞서는 이 장면은 미국의 텔레비전 산업과 뉴스 채널 및 언론이 어떻게 결탁돼 있는지를 상징하는 인장과도 같다. 그리고, 옮겨 간 곳이 바로 루퍼트 머독이 새로 설립한 <폭스 뉴스>. 그리하여, 로저 에일스의 질주가 시작된다.
이기기 위해선 우리가 가장 큰 목소리(Loudest Voice)가 돼야 해.
평소 철학을 관철시키기 위해 로저 에일스는 인정사정 볼 것 없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언론이 곧 플레이어다. "미국에선 텔레비전이 왕이야"란 그의 소신은 "우리는 뉴스를 따라다니지 않아! 뉴스를 만들지"란 언론관으로 진화한다. 관점에 따라 사회의 공기가 돼야 할 언론이 무시무시한 무기가 될 수도 있음을 암시하는 대목이다.
부연하자면, 로저 에일스에게 대중을 상대로 엄청난 영향력을 발휘하는 텔레비전 뉴스는 보이는 것보다 보여주는 것이 중요하고, 알아야 하는 사실보다 알고 싶은 진실이 중요한 법이다. 2000년 9.11 테러 당시, 로저 에일스는 세계무역센터에서 사람이 추락하는 화면을 거의 실시간으로 내보내는 만행을 저지른다.
<라우디스트 보이스>가 그리는 그 당시 로저 에일스는, 사실 확인 따윈 개나 줘버려도 좋다는 자세였다. 확고한 보수우파인 로저 에일스 본인조차 자국이 당한 충격적인 테러로 인해 패닉 상태를 겪고 있었다.
9.11 테러 당시 로저 에일스는 언론 본연의 임무보다 어떻게 하면 미국 국민들에게 확실치 않았던 적들에 대한 적대감과 분노를 일으킬지에 더 몰두했다. 그것이 애국자로서, 애국 우파로서 언론인이 해야 할 책무라 여겼고, 이는 실제 뉴스 논조에 반영됐다. 이후 <라우디스트 보이스>는 로저 에일스와 <폭스 뉴스>가 아버지 부시 정부가 일으킨 이라크 전쟁을 어떻게 응원하고 선동했는지 세세하게 묘사한다.
<폭스 뉴스>를 지탱한 한 축이 전쟁이라면 다른 한 축은 일상적인 선동과 선정성이라 봐도 무방할 것이다. 드라마 속 우스꽝스럽지만 씁쓸한 일화 하나. 폭스뉴스에서 욕설을 일삼으며 폭군으로 군림한 로저 에일스는 프로듀서들의 만류에도 가짜뉴스를 앞세우는 남성 백인 패널을 진행자 자리에 앉힌다. 그런 막무가내 선동과 요즘말로 혐오 전략이 시청자들에게 잘 먹힐 거란 이유에서다.
로저 에일스가 저지른 성폭력의 역사도 꽤나 주요하게 다뤄진다. 여성 진행자들에게 무조건 짧은 치마를 입게 하고 카메라에 가까운 자리에 앉게 한 것도, 여성 진행자들의 의상이나 화장에 각별히 신경을 쓴 것도 TV가 '시청각' 매체라는 확고한 신념의 발로였다. 방송국 내에서 왕으로 군림한 그가 이를 빌미로 꾸준히, 여러 피해자들에게 위계에 의한 성폭력을 저질렀던 것이다.
정치권력과의 유착 또한 심각한 수준이었다. 미디어 및 홍보 전문가로 경력을 시작한 로저 에일스는 1970년대부터 리처드 닉슨과 로널드 레이건, 아버지 부시 대통령의 언론 컨설턴트로 일했다. 9.11 당시 아버지 부시 대통령과 수시로 통화하고 측근들과의 비밀 회의를 통해 이라크 전쟁과 관련한 미디어 노출 전략을 코치했다.
같은 전략으로 트럼프 전 대통령의 당선에도 일조했다. 철저한 공화당 지지자였던 그의 질주는 루퍼트 머독의 두 아들들과 계속된 대립에도 불구하고 끝날 줄 몰랐다. 그의 몰락을 이끌어낸 것은 그에게 갖가지 성폭력 피해를 입은 <폭스 뉴스>의 여성 직원들이었다.
▲ 미국 드라마 <라우디스트 보이스> 스틸 컷 |
ⓒ 왓챠 |
지난 50년 간 이 나라 정계에서 좌파는 뉴스의 서사를 통제하려고 들었어. 미국에 강제로 큰 정부, 보모 국가를 들먹였지. (...) 우리가 그들에게 줄 비전은 진정한 세상과 그들이 원하는 세상이라고. 그럼 어떻게 될까? 우리가 진짜 미국을 되찾는 거야. 현존하는 어젠다에 맞서고 우리가 가장 큰 목소리가 돼서, 우리가 이 나라에 공정성과 균형을 되찾자고.
로저 에일스는 스스로 <폭스 뉴스>를 공정성을 추구하고 균형 잡힌 언론과 언론인이라 자평했다. <라우디스트 보이스>는 그의 이러한 철학이 미국사회를 지탱해온 한 축임을 부정하지 않는다. 로저 에일스가 <폭스 뉴스>를 이끌었던 20년 넘는 세월동안 민주당과 공화당은 사이좋게 정권을 나눠가졌다.
다만, 선정적이고 연성화된 <폭스 뉴스>가 시청률 1위를 구가하는 사이 소셜 미디어와 유튜브가 출현했고, 진영 논리는 더 횡행했으며, 가짜뉴스의 시대가 도래 했다. 로저 에일스가 구가하던 텔레비전 권력 자체는 축소됐을지 모르지만 뉴스를 만들어내기 더 좋은 환경이 구축된 것이다.
대선을 코앞에 둔 우리 방송언론 환경은 어떤지 돌이켜 볼 때다. 누구는 기울어진 운동장이라 한탄하고, 누구는 정권이 언론을 장악했다 목소리를 높인다. 그 사이, 유권자들은 TV를 떠나 입맛에 맞는 매체를 찾아다니는 중이다.
과연 그런 환경을 자처한 것이 누구인가. 방송통신심의위원회로부터 숱하게 경고 및 제재를 받는 동시에 검언유착 사건의 당사자가 돼버린 방송사들을, 그들이 제작하는 뉴스를 국민들이 신뢰할 수 있을까.
과거 고위직 검사였던 시절, 유력 종편 사주와 술자리를 갖곤 했다는 대선후보가 "집권 후 무책임한 소형 언론사를 파산시킬 수 있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 종편 사주들이, 또다른 방송 권력, 언론 권력들이 이번 대선에서 플레이어로 뛰고 있지는 않은 지 돌아봐야 하는 이유다.
로저 에일스의 흥망성쇠는 언론 및 표현의 자유가 전 세계 어느 국가보다 보장받는 미국에서 벌어진 실화다. 우리는 그저 '한국판 로저 에일스'가 아직 출현하지 않은 것을 감사하는 데 만족해도 될까. 아니면, <폭스 뉴스>에 버금가는 괴물이 탄생하는 것을 막기 위해 노력해야 할까. <라우디스트 보이스>를 떠올리면 근심이 앞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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