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달에 가장 인상 깊게 본 콘텐츠가 뭐야?
몸 쓰는 희열
〈빅씨스〉 & 〈운동하는데이브〉 홈트 영상
레전드 스트레칭, 전신 근력 운동, 아쉬탕가 프라이머리… 내 유튜브 보관함의 폴더 목록이다. 음악, 아트, 명리 등 다른 관심사에 비해 세분화된 폴더에 담겨 수시로 업데이트되는 나의 홈트 영상들. 누가 보면 무릎 대지 않고 푸시업쯤은 거뜬한 사람인 줄 알겠지만 체지방률 30%에 육박하는, 준수할 것 없는 체력과 근력의 소유자다(아무리 운동을 열심히 해도 식단 조절을 하지 않으면 인바디 수치는 변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내가 홈트에 집착하는 이유는 마감 노동자기 때문이다.
이번 주에도 이틀에 하나꼴로 마감을 쳐내고 마지막으로 이 원고를 쓰고 있는 프리랜서에게 운동이란 선택이 아닌 필수다. 취재나 촬영, 미팅이 없는 날엔 하루의 반을 앉아 있는 인간에게 제 몸의 뼈와 살, 근육과 지방을 느끼는 일은 매우 중요한 일과다. 매달 마감을 해야 하는 패션 잡지 에디터로 15년을 살아오면서 처음 5년은 마음 가는 대로 일하고 놀았다. 마감 기간에는 새우깡을 씹으며 ‘아빠 다리’ 자세로 원고를 쓰다 잡지 더미 위에 엎드려 잤다. 마감이 끝나면 신나게 술을 마셨다. 그렇게 5년여를 보내고 나니 목과 허리, 고관절이 ‘아작났다’. 정신은 그보다 더 피폐해졌다. 수년을 월 단위로 쪼개 살며 내 정신세계에서 일상성은 자취를 감춰버렸다. 그리고 어느 순간 깨달음이 왔다. 운동만이 살길이다! 난데없는 그 각성은 유년 시절의 경험 혹은 그보다 더 거슬러 올라가 내 핏줄에 새겨진 행동 패턴이었는지도 모른다.
중국인 사부에게 팔괘장이라는 무술을 사사하고 쿵후 도장을 운영했던 아버지와 그의 제자들 틈에서 발차기를 하며 자랐으니까. 각성 이후 헬스장이나 요가원에 적을 두지 않은 날이 없었다. 센터들이 문을 열었다 닫았다 하는 데다 샤워 불가, 마스크 필수 착용의 지침이 내려온 ‘코시국’ 2년을 지나면서 나는 유튜브의 드넓은 세계에서 퍼스널 트레이너를 찾았다. PT 한 회당 와인 한 병 값을 낼 필요도, 스과 데드리프트만 무한 반복하는 트레이너를 참아낼 필요도 없었다. 내가 좋아하는 운동 강도와 종류는 물론 목소리와 농담 스타일에 맞춰 선호하는 선생님을 고를 수 있었고, 미안함이나 무안함 없이 내키는 대로 교체할 수도 있었다. 새해를 맞으며 나의 ‘최애’는 맨해튼이 내려다보이는 근사한 집에서 다채로운 운동을 시연하는 〈빅씨스〉의 뉴욕 언니와 인체 구조에 관한 디테일한 설명을 곁들여 신박한 동작을 소개하는 〈운동하는데이브〉의 ‘데이브’로 정리됐다. 마침 〈빅씨스〉에서는 1월 3일부터 ‘작심삼일러’들을 위해 100일 홈트 프로그램을 업로드하고 있었다.
낮에는 취재나 커뮤니케이션에 집중하고 밤에 원고를 쓰는 나의 하루 루틴은 다음과 같다. 오후 5시 즈음 이른 저녁을 먹고 나서 1차로 글 쓰는 시간을 갖고 밤 11시 즈음 운동을 한 후 좀 전에 쓴 글을 리터칭하며 하루를 마감한다. 흰 캔버스가 비극이라는 화가도 있듯이 새하얀 워드는 공포다. 첫 문장을 완성하는 데만 반나절이 걸리기도 하는 1차 마감 시기에는 분별되지 않은 생각들을 잭슨 폴록처럼 흩뿌리고 워드 창을 닫는다. 암담하고 복잡한 머리는 깨끗이 비워내는 과정을 거쳐야 다시 채울 수 있다. 예전에 한 명상 선생님이 “생각과 감각은 제로섬 게임”이라는 얘길 해준 적이 있다. 머릿속이 수만 가지 생각으로 터질 것 같은 때는 오롯이 감각에 집중해 생각을 비워내면 된다고 말이다. 명상으로는 영 어렵던 것이 운동으로는 쉬웠다. 운동이 주는 몰입감은 1분 동안에도 갖가지 생각이 머릿속을 점령하는 순간을 잠시나마 차단시켜준다. 이때 중요한 건 어떤 근육에 힘이 들어와야 하는지 알고 운동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상체를 사선으로 숙인 채 한 손은 의자 등받이를 잡고 덤벨을 든 다른 한 손은 옆구리 쪽으로 힘 있게 당겨주는 ‘원 암 덤벨 로’를 한다면 팔꿈치가 벌어지지 않도록 광배근의 수축감을 느끼면서 운동해야 한다. 그런 식으로 삼두근, 대둔근 등이 조여지고 단단해지는 감각에 일정 시간 집중하는 일은 잡념을 떨쳐내자는 생각마저 생각하지 않는 무아지경을 선사한다.
사실 노트북 화면 속 누군가의 정제된 움직임을 따라 하는 건 나에게 운동이라기보다 무용에 가깝다. 여행 갈 때 가벼운 매트를 트렁크에 넣어 다닐 정도로 요가를 좋아하는데, ‘태양 경배 자세’를 시작하려고 ‘산 자세’로 서면 발 아래 매트가 나만의 무대라는 생각이 든다. 몸치로서 내가 할 수 있는 유려한 몸의 움직임 정수가 태양 경배 자세 10개에 담겨 있다. 요가할 때는 물 흐르듯 이어지는 플로에 집중한다면 근력 운동을 할 때는 ‘무게 치기’의 스타카토 같은 호흡에 희열을 느낀다. 그래서 아령을 중량별로 구비하고 케틀벨도 샀다. 부자가 되면 사고 싶은 0순위에 ‘이탈리아 명품 피트니스 기구’ 테크노짐의 시크한 크롬 도금 머신도 올라 있다. 집중해서 근력 운동을 하고 나면 땀이 샘솟으며 내가 내 몸을 컨트롤하는 것처럼 어떠한 일이 닥쳐도 무난히 처리할 수 있을 것 같다는 만능감이 온몸에 퍼진다. ‘운동가즘’이라는 이상한 단어로도 통용되는 그 기분은 신체적 반응에서 기인한다. 운동이 뇌에 산소를 공급해주기에 시야가 환해지고 도파민 등의 호르몬을 배출해 스트레스가 해소되며 기분이 편해지는 것. 〈3분 운동과학〉 유튜브 채널에 따르면 근육이 뇌의 명령에 따라 움직이도록 디자인돼 있기 때문에 근력 운동을 통해 뇌와 근육이 연결되고 나면 운동을 할 때뿐 아니라 움직임이 없는 일상에서도 서로 커뮤니케이션을 하게 된다고 한다. 그 결과 운동할 때 느끼는 희망찬 만능감이 평소에도 꾸준히 유지된다는 것이다. 그야말로 ‘바이브’가 달라지는 거다.
‘심신 상관’이라는 말도 있듯이 꾸준히 근력 운동을 하며 느낀 건 운동이 결코 신체 활동에만 국한되지 않는 좀 더 지적이고 고차원적인 활동이며 무엇보다 가슴과 머리를 건강하게 만들어준다는 것이다. 몸과 정신, 몸과 두뇌는 매우 민감하게 연결돼 있고, 내 몸을 다스려야 마음도, 머리도 다스려진다는 걸 너무 늦게 알았는지는 모르겠지만.
당신 덕분에 웃었어요
개그맨 황제성 활약 모음 영상
경험은 소중하고 신기하다. 지난해를 지나지 않았다면 나는 간혹 TV에 출연해 좋아하는 연예인을 만난 사람들이 그 연예인의 손을 잡고 “너무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었는데 TV에 나오는 당신을 보고 견딜 수 있었어요. 웃게 해주셔서 감사해요” 같은 말을 하는 것을, 혹은 유튜브 영상에 그런 진심 어린 댓글을 다는 사람들을 영영 이해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 말을 믿지 않는 사람으로 살았을 것이다. “어떻게 그럴 리가 있어, 그렇게까지 느낄 수가 있어” 하면서. 그러나 내가 마음이 무너지고 입이 마를 때, 웃고 싶어 하는 간절한 마음으로 망망대해 같은 유튜브 세상을 떠돌다가 어떤 개그맨의 활약 모음을 보게 됐을 때, 보기 시작하고 영 끊지 못하며 다음, 다음, 다음 클립을 계속 클릭하고 있는 걸 발견했을 때 나는 어느새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의 마음이 돼 있었다.
그 와중에도 이전의 내가 먹던 마음과 지금 먹게 되는 마음이 너무 달라서 나 스스로를 조금 우스워했던 것 같다. ‘사람이 변하는 순간은 스스로 알 수 없구나. 그저 갑자기 어느 순간에 그렇게 되는구나’ 하고 세상에서 제일 웃긴 유튜브 영상을 보며 속으로는 이상하게 물러진 마음이 되곤 했다. 그리고 언젠가 내가 이해하지 못하던 사람들처럼, ‘고마워요. 당신 때문에 웃을 수 있어요’ 하고. TV에 출연할 길은 없고 댓글은 달지 않는 사람이라 속으로만 그렇게 말하곤 했다.
바깥의 말과 내 속의 말들이 서로 와장창 부딪혀 마음이 엉망진창일 때, 오로지 그 개그맨이 나오는 영상을 보는 동안에는 다른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있었다. 순전히 웃기만 할 수 있었고 그래서 알지도 못하고 상관도 없을 그에게 순도 높은 고마움을 느꼈다. 나도 어쩌면 기회가 된다면 어딘가에 혹은 누군가에게 “당신 덕분에 웃었어요, 웃으면서 그 시간을 보냈어요” 하고 말하고 싶어지는 지경에 이르렀고, 신기하게도 이렇게 기회가 닿아 그 말을 하고 있다. 경험은 이렇게 신기하고 소중하다.
그 개그맨은 황제성이다. 내가 본 황제성의 활약 모음 영상은 수도 없이 많다. 〈개그야〉 시절부터 유튜브 채널 〈빽사이코러스〉, 〈코미디빅리그〉의 그가 나온 모든 코너들…. 그중 최근까지 돌려 본 코너는 ‘뽀스 베이비’다. 나는 대사량이 많은 모든 콘텐츠를 좋아하는데, 그런 것을 좋아하는 이유는 남들보다 말을 월등하게 잘하는 사람들이 그 재능을 가지고 최대한으로 노력하며, 심지어 즐기며, 대단한 결과물을 내놓는 것을 보는 게 짜릿하기 때문이다. 나는 황제성이 그 방면으로 천재라고 생각한다. 생각해보면 나는 언제나 황제성을 좀 좋아했는데, 이렇게 본격적으로 좋아하게 된 것은 얼마 되지 않았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보면 이미 준비돼 있던 마음이 힘든 시기에 왈칵 수면 위로 올라온 게 아닐까 싶기도 하다. 나는 그가 〈나 혼자 산다〉나 〈미운 우리 새끼〉 같은 예능 프로그램에 고정 출연자로 나오는 것이 아니라 고정 출연자의 친구로 잠깐 등장하는 것에도 반가워하며 평소 안 보던 프로그램까지 챙겨 보곤 했다. 그리고 유튜브에서 우연히 황제성의 레전드 영상이라고 불리는 클립 영상을 보게 된 이후 그의 모든 코너를 정주행하기 시작했다.
그가 대사를 생각하고 준비하고 연기하는 모든 순간을 좋아한다. 특히 ‘뽀스 베이비’ 같은 코너의 대사 조합을 좋아하는데, 그 코너를 간단히 설명하자면 ‘아이들이 아무것도 모를 것 같지만 어른들의 사정을 모두 알고 있다’는 설정을 극대화한 코너로, 여기서 황제성은 아빠의 비밀을 모두 알고 있는 어른아이 캐릭터를 연기한다. 주로 엄마 몰래 주식 투자를 했다가 돈을 몽땅 날린, 지난밤 취해서 객기로 어마어마한 술값을 모조리 계산한, 엄마의 허락을 받지 않고 게임기를 몰래 산 아빠의 비밀을 아기 제성이 듣는 것으로 시작된다. 이 코너에서 아기 제성의 말투는 신세계이고 베테랑이다. “다 들었지롱, 엄마한테 다 이를 거야!” 같은 말투는 없고 이런 대사만 있다. “아이 김 사장, 어쩌려고 이래? 이거 안 되겠어. 엄마랑 아줌마한테 얘기해서 정상회담을 한번 열어야겠어. 햇볕정책은 여기까지야.” 이 코너는 황제성의 말맛과 암기력을 한껏 보여주는 코너로, 다른 코너보다 황제성의 원맨쇼를 볼 수 있어 좋아한다. 언어 센스가 탁월한 황제성이 하는 외국 사람 개인기도 좋아한다. 포인트는 어떤 외국 사람도 그냥 대충 한국 사람처럼 혹은 더 능숙하게 한국말을 구사한다는 점이다.
“안녕하세요, 저는 미국 사람입니다. 저는 연세어학당에 다녀서 한국어 패치가 돼 있지.” 쓰려고 떠올려보니, 나는 황제성의 개인기와 특기에 대해 하루 종일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이런 식의 개그를 좋아하는 사람들을 모아 ‘황제성 감상회’ 같은 것도 할 수 있을 것만 같은 기분이다. 적다 보니 비로소 내가 이렇게 좋아했구나, 이렇게 자세히, 이렇게 여러 번 돌려 봤구나, 그리고 여기저기 말하고 싶어 했구나 깨닫는다. 그러고 보니 작년에는 황제성이 하는 개그 코너도 모르고, 그 코너에서 패러디한 타짜 캐릭터도 모르는 회사 동료를 붙들고 틈만 나면 황제성 성대모사를 해서 그를 아연하게 만든 적이 있다. 조금 늦은 사과지만 미안해…. 환장하게 좋아하는 유튜브에 대해 이렇게까지 늘어놓을 수 있는 기회가 없어 그랬던 것 같다. 늦은 변명을 전해본다. 미안해, (황제성을) 좋아해서 그랬어.
비혼자의 결혼식 축사
웹툰 작가 이말년 축사 영상
축사를 써야 한다. 새해에 내가 해내야 할 가장 큰 미션은 단연코 사랑하는 친구의 결혼식에서 낭독할 축사 쓰기다. 올해 써야 할 어떤 글보다도 어려운 글일 거란 확신이 든다. 2022년이 밝았으니 이제 슬슬 써볼까. 내일은 써야지. 모레부터 써야지. 아, 진짜 오늘은 꼭 써야지…! 아니, 지금까지 이토록 막막한 첫 문장 쓰기가 있었나? 물론 처음부터 이런 건 아니었다.
작년 봄, 일찍이 결혼식 축사를 부탁받았을 때만 해도 마냥 기쁜 마음이었다. 꼭 결혼 같은 빅 이벤트가 아니라도 나는 평소 누군가를 사소하게 축하하고 응원하는 일에 소질이 있고, 또 그러한 스스로를 좋아하니까. 이렇듯 ‘기쁨이’의 자아가 유난한 사람이 무려 절친의 결혼식 축사를 맡게 된 것이다. 그건 좀 더 공식적인 하객으로 참석하는 일. 친구의 결혼을 공공연하게 축하하고 당사자들만큼이나 그들의 행복을 구체적으로 상상해보는 일이었다. 축사를 써야겠다고 마음먹은 날 때마침 인스타그램 알고리즘은 신통하게도 웹툰 작가 이말년 씨가 지인 결혼식에서 축사를 낭독한 영상으로 나를 안내했다. 축사의 첫마디는 이랬다. “결혼 생활을 10년간 체험 중인 이병건입니다.” 그가 자기소개를 했을 뿐인데 어쩐지 나는 지는 기분이 들었다. “결혼 생활을 어떻게 지혜롭게 해야 하는지는 저도 아직 잘 모르겠습니다. 단지 어렴풋이 느낄 뿐입니다. 그냥 나와 가장 가까운 사람이 내가 하는 행동을 지켜봐주고 나도 그 사람의 행동을 지켜봐주면서 서로만 아는 에피소드들을 쌓아가는 재미가 결혼 생활이 아닐까 하고요. (…) 결혼 생활이란 서로가 서로의 증인이 돼주는 추억 블록을 모아가는 것. 억울한 일을 억울하지 않게 지켜보는 것. 무플인 서로의 글에 댓글 한 개 적어주는 것. 오늘따라 평소와는 다른 상대방에게 갸우뚱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결혼 축하드립니다.” 아…. 나는 뜻밖의 깨달음을 얻은 사람처럼 살짝 멍해졌다. 오직 경험에서만 나올 수 있는 조언이자 고백이었다. 우리만의 에피소드, 그 속에서 서로의 기쁨과 슬픔을 가리지 않고 목격하는 사려 깊은 증인이 되는 일. 그의 축사를 곱씹는 동안 1분 남짓한 영상은 거듭 자동 재생됐다. “결혼 생활을 10년간 체험 중인…”이 반복될 때마다 문득 겁이 났다. 내가 겪은 더불어 사는 삶이라고는 지난 6년간의 연애 중 겪은 간헐적 동거가 전부였다. 다시 1인분의 삶으로 돌아와서는 ‘왜 나는 결국 혼자됨을 택했을까’ 따위의 자조적인 일기를 적으며 혼자인 날들의 외로움과 가뿐함에 취하곤 하는 내가, 아마 미래에도 높은 확률로 비혼의 삶을 살아갈 내가 과연 얼마나 유의미한 축사를 전할 수 있을지 의문이 밀려왔다. 축하에 자격이 필요한 것은 아니지만, 나는 사랑하는 친구에게 부치는 축사를 너무 잘 쓰고 싶은 나머지 갑자기 나의 경험치를 문제 삼기 시작했다.
오랜 시간, 나는 결혼을 선택이 아니라 불가능의 영역으로 남겨두고 있다. 결혼은 표면적으로는 내가 하고 싶지 않은 것이기도 하지만 그 마음을 조금 더 파고 들어가보면 할 수 없다는 판단이 기저에 단단히 깔려 있다. 사랑하는 사람과 만족스러운 연애를 할 때도 그랬다. 당장 내 부모를 비롯해 결혼을 긍정하게 만드는 지인 부부 등 충분히 좋은 롤모델이 가까이 있는데도, 이상하게 내 몫의 장면을 상상하면 눈앞이 깜깜해졌다. 축사 영상을 볼 때도 비슷한 심정이었다. ‘평소와는 다른 상대방에게 갸우뚱하는 것’이라니. 생각할수록 참 아름다운 말이라고 마음으로 밑줄을 그으면서도 아득해졌다. 별것 아닌 것처럼 보이는 그 일은 실은 상대에 대한 넉넉한 다정함과 따뜻한 호기심이 있어야만 가능한 일일 테니까. 나를 좀 아는 사람들은 “그거 네가 가장 잘하는 일 아냐?”라고 반문할지 모른다. 그래도 결혼이라는 테두리 안에서라면 자신이 없어지는 걸 어쩌나.
당연히 이것이 내 비혼을 설명하는 전부가 되지는 못한다. 거기에는 좀 더 복잡하고 섬세한 이유가 끼어 있지만 여기서 내 히스토리를 풀어놓을 필요는 없으므로 나는 그저 나로서 할 수 있는 축사 쓰기에 골몰한다. 돌이켜보면 이번이 벌써 세 번째. 그동안 축사를 제법 한 셈이다. 모두 내가 우정 이상으로 애정하고 존경하는 이들의 결혼식에서였다. 나는 그 축사들을 따로 저장해두었는데, 쓰고 나면 꼭 친구에게 보내는 러브레터 같아 머쓱했다. 하나씩 읽다 보니 나보다 조금 높은 단상 위에서,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잇는 나를 바라보던 친구들의 촉촉한 눈빛이 떠오른다. 결혼이 다른 누구보다 한 사람을 깊고 내밀하게 사귀는 일이라면, 그동안 내 친구들이 제 반려자들에게 내어준 자리는 얼마나 크고 따뜻한 걸까. 나는 결혼이라는 결정 자체보다 그 마음에 더 감탄하며 축사를 썼던 것 같다. ‘친구야, 너와 나의 우주는 앞으로 어떻게 변해갈까.’ 친구들이 결혼할 때마다 속으로 되뇌었던 말이다. 그런데 이제는 좀 다른 말을 생각해내고 싶다. 앞으로 우리 삶에 어떤 변화가 소용돌이치더라도 각자의 자리에서 신뢰와 사랑을 잊지 않는 사람이면 좋겠다. 결혼식을 앞둔 너처럼, 그런 너를 등불 삼아 축사를 쓰려는 지금의 나처럼. 이 글이 지면에 실려 내가 잡지를 받아볼 즈음에는 이미 축사를 낭독하고도 며칠이 지나 있을 것이다. 그러니 지금 당장, 축사를 써야 한다. 축하의 말이라기보다는, 내가 모르는 희망을 적립한다는 기분으로.
누가 볼까 무서운 나의 검색 기록
인스타그램 모 카페 계정 등
카페에 너무 자주 간다. 사장님이 나를 지겨워하면 어떡하지 걱정해야 할 정도로. “가져갈게요. 안녕히 계세요” 인사하고 돌아나와 문 앞에서 다 마시곤 다시 들어간다. 그날을 포함해 하여튼 앉은자리에서 석 잔 연거푸 마셔야 아쉽지 않게 집에 간다. 그렇게 드나들기를 며칠, 인스타그램에서 자주 가는 카페의 계정을 찾았다. 언제 열고 언제 닫는지 외에는 알 수 있는 정보가 없다. 내가 알고 싶은 건 손맛의 기원이 되는 손의 주인인데. 나는 늘 이렇다. 메일과 메시지에 전부 답했어도 새롭게 답할 것을 찾아 인터넷 세상을 돌아다닌다.
인터넷은 과연 바다. 하나를 물면 그걸 바탕으로 줄줄이 사탕을 내어준다. 새해에는 휴대폰 좀 덜 보자. 루테인 좀 먹자. 음악을 배우면 연인을 덜 기다리게 될 거야. 책을 잡으면 휴대폰을 덜 보게 될 거야. 그러나 설탕이 인도하는 즉각적인 행복에 항복하며 다시 그걸 쥐고야 만다. 현실에서 궁금한 사람은 그 밤, 온라인에서도 찾아내야 한다. 마음에 드는 사람의 SNS에 갔다가 철 지난 유행어를 물색없이 쓰는 걸 보고 마음이 조금 접힐지라도 그렇다.“인스타 계정 2개 쓰시죠” 하고 첫 만남에 그 사람이 물었을 때, 나는 처음 만난 상대를 집에 데려가는 길에 그러하듯 ‘지금 내 집이 어떻더라’ 골똘해졌다. SNS 역시 온라인상의 내 집이니까. 그래서 나는 수시로 인스타그램과 트위터의 글을 삭제하니까. 그를 처음 만난 곳은 카페였다. 그에게 나중에 전해 들은 바로, 나는 한 손으로 커피를 마시면서 눈은 딴 데를 보고 있는 그를 보았다고 한다. 그가 나를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다면 내 눈빛은 리마리오처럼 느끼하고 이글아이처럼 부담스러웠을 것이다. 그러니 천 년의 이상형이 앞에 있더라도 우리는 차분한 눈빛을 유지해야 한다. 어렵다면 내가 보고 있다는 사실이라도 의식하거나.
오프라인에서 시선의 이동이 한 사람의 주관적인 기억에 의존한다면, 온라인에서는 눈이 따라간 기록이 냉정하게 남는다. 그러니 맘에 들고 싶은 상대에게 “나 씻고 올게. 유튜브 보고 있어” 하기 전에 검색 기록을 지워두는 편이 좋다. 그래 봤자 컴퓨터 오류 해결 방법이나 신경과 예약, 화제의 인물 같은 것들이 있을 뿐이지만…. 스펠링 두 번 틀려서 세 번 검색한 건 혼자 있을 때 봐도 민망한 일이니까. 쇼핑몰을 걷다 보면 복도에서도 마음에 드는 옷이 보인다. 걸쳐보고 걸어놓고 걸어 다니며 망설일 때 도움이 되는 것은 남의 경험이다. 검색 결과를 따라가다 보면 패션 커뮤니티에 올라온 글이 필연적으로 걸린다. “이 옷 요즘 어떤가요” 묻는 글들 사이 단정한 닉네임이 눈에 띈다.
그는 재질 좋은 옷 몇 장을 돌려 입으며 카페 게시판에 일기를 썼다. 한 장 한 장 눈여겨볼 데가 있는 사진들. 선물로 준다면 마다할 사람 없는 까르띠에의 조붓한 시계를 찬 손목. 그는 시계를 가졌고, 중고 스피커를 샀으며, 산에 오르는 취미가 있다. 온라인에서 나는 남이 향유하는 것을 향유한다. 그런 사람을 부를 이름이 필요하다. 서로이웃, 인플루언서, 그런 것 말고 동굴 속에서 혼자 지켜보는 느낌이면 좋다. 새 글이 올라왔다고 하면 휴대폰을 쥐고 엎드려 음식 포장을 뜯기 직전의 기대감과 함께 들여다볼 든든한 이름. 어쩐지 친구에게는 못 알릴 이름. 그나저나 카페 주인 개인 계정 어떻게 하면 알 수 있지. 검색 기록은 가장 노골적인 나열이니, 남김없이 지워주는 기능이야말로 인류를 화목하게 하는 기술이다. 간밤에 내가 겪은 게 무의식이라면 검색 기록은 의식이 꾼 꿈이다. 제때 설거지하지 않으면 갑자기 들이닥친 소중한 사람에게 창피를 당하고야 만다.
유튜브 알고리즘이 이국의 요리법을 들이밀어도 ‘관심 없음’을 누르고 내가 아는 유튜버가 김치에 라면을 몇 봉지 먹는지 들여다본다. ‘내일은 나도 짜파게티에 파김치 먹어야지’ 계획한다. 영상 밑에도 볼거리가 있다. 댓글에는 한 줄 평하는 사람과 별안간 분노하는 사람, 서정적인 수필을 쓰는 사람이 있다. 김광진이 부른 ‘동경소녀’ 영상에는 천 명이 좋다고 누른 댓글이 있다. “동틀 때 들으면, 당장 현관 박차고 나가서 동네 한 바퀴 달리고 싶어지는 청량감 한 바가지 머금은 마성의 노래.” 예상하지 못한 곳에서 다른 사람을 만난다. 알고리즘이 내게 들이미는 것은 어딘가 안 맞아 엇박으로 그치지만, 우연히 본 〈TV 동물농장〉 클립에서 자신을 거둬준 할머니를 졸졸 쫓아다니는 염소 염순이를 보고 눈물을 쭉 뺀 날에는 마음이 사랑으로 가득 찬다. 이어지는 〈TV 동물농장〉 레전드 풀버전 목록이 화면 오른쪽에 뜬다는 사실은 겨울밤의 은총이다. 사람을 사랑할 수 있을 것 같애. 몸과 마음이 알맞게 조율된 것 같애. 그럴 때까지 유튜브를 돌아다닌다. 전화통 너머에선 “뭐를 위해 사는지 모르겠다니까” 하는 말이 들리고, 나는 그에게 염순이와 할머니의 우정이 담긴 30분짜리 영상 링크를 보낸다. 27℃로 데운 방에 불러다 앉히고 큰 화면에 틀어준 뒤 귤이라도 내어주고 싶은 심정을 대신해서. 지금 나는 좋아하는 카페 옆 공원에 있다. 문 열기를 기다리며 오금 펴기 운동기구에 앉아 휴대폰을 타닥거리며 이 글을 쓴다.
다리를 몇 번 굽혔다 폈는지 숫자는 세지도 않고 그저 열 때까지. 지금은 좌우로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오전 10시 15분. 카페는 오전 11시에 연다. 이 카페를 이렇게까지 좋아할 줄 몰랐다. 수요일에 닫으니 화요일 저녁에는 슬슬 체념하는 루틴까지 좋아한다. 네이버 지도에 검색해볼 때만 해도 여긴 그냥 샌드위치가 맛있는 신도시의 카페였는데. 온라인과 오프라인 사이에 낀 인생은 나처럼 집요한 이에게 즐거운 오답을 준다. 샌드위치 먹으러 갔다가 플랫화이트에 빠지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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