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집사, 시작은 아보카도 씨앗이었습니다
시민기자 그룹 '워킹맘의 부캐'는 일과 육아에서 한 발 떨어져 나를 돌보는 엄마들의 부캐(부캐릭터) 이야기를 다룹니다. <편집자말>
[이나영 기자]
잘 익은 아보카도의 건강한 맛에 한참 빠져 있을 때였다. 마트에서 사온 아보카도를 샐러드에 넣어 먹고 커피에 넣어 갈아마시기도 하던 무렵, 우연히 인터넷에서 사진 한 장을 보았다. '아보카도 발아시키기'라는 제목의 글이었다.
플라스틱 재활용 커피컵 안에 아보카도 씨앗이 반신욕을 하듯 반쯤 물에 잠겨 있었다. 자세히 보니 그 씨앗에서 뿌리와 싹이 돋아나고 있었다. 내친김에 좀 더 찾아보니 넓적한 초록색 잎을 자랑하며 화분에서 자라는 아보카도 사진이 제법 많았다.
다 먹은 아보카도의 씨앗을 버리지 않고 발아를 시키면 꽤 근사한 화초가 된다는 이야기였다. 싱싱하고 건강해 보이는 초록색 잎이 내 마음을 끌었다. 일주일에 한두 개씩 먹고 버려지는 탁구공만한 아보카도 씨앗들이 모두 다 새로운 생명으로 재탄생할 수 있다니! 도전해보고 싶었다(참고로 내가 사는 곳은 베트남이지만, 아보카도 키우기는 한국에서도 충분히 가능하다).
▲ 이쑤시개에 꽂혀 재활용 컵에 담겨진 아보카도 씨앗. |
ⓒ 이나영 |
그렇게 이쑤시개에 꽂혀 재활용 컵에 담겨진 아보카도 화분(?)들이 하나 둘 늘어나기 시작했다. 아보카도 씨앗이 갈라지고 뿌리가 내려오기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래도 어느날 소리도 없이 단단한 원형의 씨앗에 금이 생겨 갈라지고 하얀 뿌리가 나왔다. 마치 아기 앞니가 자라듯 쏘옥 내려오는 모습을 보니 기특하기도 하고 대견하기도 했다.
그러다 어느 순간, 귀여운 초록색 새순이 삐죽 모습을 드러낸다. 여기까지 오는 데 몇 주가 걸린다. 단단한 씨앗이 미동도 없이 물 속에 잠겨 있다가 어느날 문득 새 생명을 아주 조심스럽게 꺼내어 놓는 모습은 꽤나 근사했다. 하루이틀 만에 쑥쑥 자라는 게 아니라 그런지, 티나지 않게 조용히 생명을 키워내기 위해 애쓰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더더욱 애착이 갔다.
▲ 줄기가 솟아나오고 잎이 더 달리면서 아보카도는 제법 화초다운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
ⓒ 이나영 |
잘 자라다가도 어느날 문득 잎이 시들시들해지기도 하고 빨갛고 누렇게 변하다 죽어버리기도 했다. 그렇게 여러 개의 아보카도 키우기를 실패하고, 몇 년 전 발아를 시켰던 아보카도 중 겨우 하나가 살아남아 무럭무럭 자랐다. 지금은 거의 일곱 살 꼬마의 키 정도가 되어서 우리집 베란다 한쪽에 자리를 잡고 있다.
아보카도 씨앗을 발아시키고 나니 이 세상 모든 씨앗은 무엇을 품고 있는지 궁금해졌다. 레몬을 자르다 튀어나온 씨를 심어보았고, 호박씨 자두씨 복숭아씨 망고씨 등등을 흙 속에 묻어보고 싹이 나는지 기다려보곤 했다.
레몬이나 라임 씨앗은 금세 초록색 잎을 무성하게 키워냈고 자두나 복숭아 씨앗은 소식도 없이 흙 속에서 잠만 잤다. 숙주와 보리싹은 깜짝 놀랄 만큼 잘 자라서 감당이 안 될 정도의 성과를 내기도 했다.
그렇게 아보카도의 키가 자라는 동안, 그리고 잎이 무성해진 레몬나무를 조금 더 큰 화분으로 옮겨 심으면서 나는 자연스레 '식물집사'가 되었다. 화초에 관심이 생기기 시작했고 화분을 모으고 이런 저런 화초들을 심었다. 가끔 산책길에 화원에 가서 화초들을 구경하고 식물을 잘 키우는 사람들의 블로그를 기웃거리기도 했다.
▲ 우리집 베란다 한쪽에 자리를 잡고 있는 아보카도 화분. |
ⓒ 이나영 |
식물을 잘 키우는 특별한 재능이 있는 사람들을 '그린핑거'라 부른다고 한다(실제로 옥스퍼드 영어사전에 green fingers(green thumb)는 '화초를 잘 기르는 손'이라는 의미라고 설명되어 있다). 식물을 어루만지고 초록색 잎을 잘 키워내는 재능을 가진 사람에게 어울리는 별명이라는 생각이 든다. 사실 나는 아직 '그린핑거'가 되기엔 많은 부분이 부족하다. 처음 화초를 키우기 시작할 땐 '그린핑거'는커녕... '데드핑거'가 아닐까 좌절한 적도 있다.
그럼에도 식물에게 매료된 마음은 쉽게 사그러들지 않았다. 식물은 말이 없고 보채지 않는다. 적당한 햇빛과 적당한 물을 주면 묵묵하고 조용히 자라난다. 하지만 내가 잠시라도 무심해지거나 각자에게 적절한 정도의 물과 햇빛을 맞추어주지 않으면 금세 풀이 죽어 시들거나 말라버린다.
분명하게 자신의 상태를 온몸으로 표현하는 섬세함이 있음에도 식물은 보채지도 소리를 지르지도 않는다. 고요히 바람에 흔들리는 것 말고는 아무런 표현을 하지 않는 생명체들에게 나는 늘 고맙고 동시에 미안했다. 내가 챙겨주고 돌봐주기만 해야 하는 존재라고 해서 억울하지도 서운하지도 않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였다면 어땠을까? 나 혼자 애쓰고, 살피고, 물을 주고, 빛을 잘 받게 하느라 이리저리 움직이는 일을 해주어야 한다면 억울하고 지치지 않았을까? 식물을 키우는 일을 통해 나는 인간관계에서는 경험할 수 없는, 억울함 없이 베푸는 그런 감정을 배웠다.
마음이 조금 답답하고 기분이 가라앉은 날, 화원에 가서 마음이 끌리는 아이를 골라와 땀을 흘리며 화초를 심다보면 기분이 맑아지는 경험을 하곤 한다. 화원에서 새로 사온 화초들을 옮겨심을 때 나는 장갑을 끼지 않는다.
분갈이를 하거나 화초를 심는 날이면 손톱 밑이 흙으로 새까매져도 그렇게 맨손으로 일하는 게 좋다. 잎사귀를 손으로 어루만지고 꽃에 붙은 흙을 털어내는 기분도 좋고, 화분에 물을 주며 흙투성이가 된 손을 물로 씻어낼 때의 개운한 기분도 좋다.
마음에 묻은 얼룩은 잘 지워지지 않지만 화분을 심다가 흙투성이가 되었던 베란다와 내 옷, 손은 호스의 물을 세차게 뿌려주면 금세 깔끔해진다. 가끔은 덩달아 마음에 묻은 얼룩도 씻겨 나가곤 했다. 물이 씻겨나간 자리에 화분에 잘 심어져 올곧게 서 있는 고무나무, 율마, 수국 같은 것들을 바라보면 어찌나 기특한지.
식물을 키우며 조금 더 좋은 사람이 되어야겠다는 생각을 많이 하게 되었다. '건강하고 기분이 좋을 때는 조용히 초록빛을 내뿜고 아프고 물이 부족하면 축 처지거나 시드는 식물처럼 조금 더 정직한 사람, 조금 더 섬세한 사람이 되면 좋을텐데'라는 생각을 한다. 그러면서도 식물처럼 세상에 이로운 공기와 향을 내보낼 수 있는 사람이면 더 좋겠지.
오늘도 물을 주며, 햇빛을 향해 몸을 기울인 아이들의 방향을 바꿔주며 초록색 기운을 가진 사람으로 살아내야겠다는 다짐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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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기자의 개인 브런치에도 게재됩니다. https://brunch.co.kr/@writeurmi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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