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 왜인? 한반도 전방후원분 주인은?

유성운 2022. 2. 3. 15: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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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 함평 예덕리 신덕고분. 전형적인 일본 전방후원분의 형태를 갖고 있다. [사진 국립광주박물관]

무덤에 묻힌 것은 한국인일까, 일본인일까
최근 나주 광주-강진 간 고속도로를 건설하는 5공구 현장에서 발견된 한 삼국시대의 고대 무덤이 해묵은 논쟁에 다시 군불을 피우게 됐다. 이번에 발견된 무덤이 이른바 '전방후원분'이라고 불리는 고대 일본 특유의 고분 양식을 갖추고 있어서다. 지금까지 영산강 유역에서 14기의 전방후원분이 발견됐지만, 내륙지역인 나주에서 확인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꼼꼼히 살피는 장고분 유적 (나주=연합뉴스) 천정인 기자 = 8일 오후 전남 나주시 봉황면 고속도로 건설 현장에서 발견된 장고분 추정 유적지에서 문화재청 등 관계기관 관계자들이 현장조사를 하고 있다. 2021.12.8 iny@yna.co.kr (끝)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전방후원분(前方後圓墳)은 무엇?
전방후원분은 일본의 고분 시대(4-6세기)에 유행한 무덤양식이다. 위에서 보면 원형(圓形)과 방형(方形)의 분구가 붙어, 마치 열쇠 구멍을 연상케 하는 특유의 형상을 갖고 있다. 주로 규슈와 간사이 지역에서 발견되는데, 오사카의 다이센 고분(大仙陵古墳)은 직경이 840m에 달해 세계에서 가장 거대한 무덤으로 꼽힐 정도다. 문제는 1980년대 이후 한반도 남부, 특히 영산강 일대에서도 이런 형태의 무덤이 발견됐다는 점이다. 하지만 규모는 일본 전방후원분보다 적은 20~30m 정도에 불과했다.

오사카부 사카이시의 거대 전방 후원분인 다이센릉고분(大仙陵古墳)의 모습. [사진 위키피디아]

그간 '전방후원분=일본 고분'이라는 입장이 워낙 굳어진 만큼 한반도에서 이 무덤이 발견된 것에 대해 한국 학계는 무척 곤혹스러워했다. 자칫 일본에서 주장하는 임나일본부설(일본의 진구황후가 3세기에 군사를 이끌고 쳐들어와 가야를 중심으로 한 한반도 남부를 점령하고 지배했다는 설)을 뒷받침해주는 근거로 사용될 수 있어서다.
또 한편으로는 영산강 일대에서 발견되는 전방후원분이 5세기 후반~6세기 중반에 집중되어 있다는 점에 주목해 이 시기의 특수한 정치사회적 변동과 연관 지으려는 해석도 적지 않았다.
이러한 이유로 매장 주체를 두고 한국과 일본 사이에서 다양한 논쟁이 이어져 왔다. 지금까지 제기된 주장은 크게 4가지다.

광주 월계동 전방후원분 [사진 임영진 전남대 교수 '한국의 장고분']

①망명 왜인설: 일본의 정치사회적 변동 때문에 일본열도에서 거주하기 어려워진 사람들로 보는 견해
②토착 세력자설: 서울·경기 지역에 있던 백제가 남하하자, 위기감을 느낀 영산강 유역 외곽에 토착 세력자들이 왜와 교류하면서 도입했다는 설
③야마토 정부 파견 왜인설: 영산강 유역과 일본 야마토 정권 사이에서 교역을 담당하기 위해 파견된 왜인이라는 견해
④백제 파견 왜인설: 백제의 웅진(공주) 천도 후 영산강 유역에 대한 장악력이 감소하자 백제가 토착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파견한 일본계 백제 관료가 축조하였다는 설
⑤귀국 백제인설: 일본 열도에서 거주하다가 귀국한 백제인이 축조하였다는 설

영산강 유역 전방후원분 분포 [사진 임영진 전남대 교수 '한국의 장고분']

하지만 이런 주장은 각각 몇 가지 약점도 있다.
①일단 일본에서 대규모로 망명한 세력에 대한 기록이 없으며, ②토착세력이 전방후원분 이전에는 거대한 무덤을 축조한 게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또 ③교역을 위해 파견됐다면 교통이 편리한 강과 가까워야 하는데, 현재까지 발견된 전방후원분은 영산강 유역이긴 하지만 무덤 자체는 강에서 먼 구릉에 축조되어 있다. 백제가 파견한 왜인들도 대개 수도 일대나 가야라는 점에서 ④설도 근거가 약하다. ⑤번설도 현재까지 뒷받침하는 기록이 없다.

이에 대해 오랫동안 전방후원분을 조사해 온 임영진 전남대 문화인류고고학과 교수는 "일본열도에서 들어오되 영산강 유역 토착세력의 승인 아래 주변 땅을 빌어 생활하다가 현지에 묻힌 정치적 망명객이었을 것으로 보는 것이 합리적일 것"이라며 사실상 ①번설에 무게를 뒀다.
그러면서 "당시의 영산강 유역권의 중심지는 나주 일대였는데, 이 지역에서는 거의 찾아볼 수 없으며, 지금까지 발견된 무덤은 대개 단독분 위주로 흩어져 있다"며 "이것은 무덤의 주인공들이 이를 축조한 역량을 후대로 계승시키지 못했다는 것이며, 현지에서 강력한 세력을 가진 것은 아니라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런 이유로 그는 전방후원분 대신 장고분(長鼓墳)이라는 명칭을 써야한다고도 주장한다. 일본 야마토 정권과 무관한 인사들이 축조했기 때문에 다른 명칭을 붙여야 한다는 것이다.

일본 북규슈형 석실과 히고형 석실의 전파 [사진 임영진 전남대 교수 '한국의 장고분']

또 그는 전방후원분의 석실 형식이 다른 점에 대해서도 지적했다.
임 교수는 "5세기 말에서 6세기 초에는 북규슈형(北九州型) 위주이지만, 6세기 중반에는 히고형(肥後型) 위주라는 점을 감안하여 보면, 각각 규슈 북부지역과 아리아케해(有明海·규슈 북서부에 있는 바다) 지역의 세력자로 추정된다"고 말했다.

현지인일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하기는 어렵다는 주장도 있다.
허진아 전남대 문화인류고고학과 교수는 "무덤에서 발견된 분주토기들이 일본적 스타일이 반영된 것은 맞지만, 일본인이 제작했다기보다 현지에서 제작한 '모방품'에 가깝다. 요즘으로 치면 에르메스백을 중국이나 한국 등에서 '짝퉁'으로 만든 것과 비슷하다"며 "무덤 양식도 100% 일본식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분주토기는 무덤 주변을 장식하는 토기로, 하니와(埴輪)라는 일본 매장 풍습의 특색으로 여겨지는 유물이다.

광주 월계동 1호분에서 나온 분주토기 [사진 임영진 전남대 교수 '한국의 장고분']

지난해 8월 발간된 함평 신덕고분 발굴보고서에서 김낙중 전북대 교수는 신덕 1호분에 대해 "무덤 형태와 매장시설로 보면 왜 규슈 세력과 관계가 깊은 상황에서 축조됐지만, 관대나 관고리가 부착된 목관에서는 백제 영향도 확인된다"면서 무덤 주변 도랑 형태, 돌 뚜껑을 덮은 무덤길의 항아리 등을 근거로 현지 토착 세력이 만들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주장했다.
함평 예덕리 신덕고분은 1991년 3월 국립광주박물관이 지역 조사를 하던 중 도굴갱을 발견하면서 본격적으로 조사가 이뤄졌으며, 30년 만에 보고서가 나왔다.

국립광주박물관은 신일본의 옛 무덤 양식인 '전방후원분'(前方後圓墳·앞은 네모지고 뒤는 둥근 무덤)과 매우 유사한 전남 함평 신덕고분의 조사 보고서를 발굴 30년 만에 이달 하순에 펴낸다고 2021년 8월 10일 밝혔다. 사진은 함평 신덕고분에서 나온 구슬.[연합뉴스[

한편 영산강 유역과 전남 해안 일대에 대해서 기존과 다른 시각으로 접근해야 한다는 견해도 조금씩 나오고 있다.
허진아 전남대 교수는 "당시는 남인도에서 만든 구슬이 고창, 함평 일대에서 발견될 정도로 해로를 통해 활발한 교류가 이뤄졌다"며 "그러다보니 이 일대에 여러 세력이 오가면서 해양 특유의 다양한 문화가 존재했을 수 있다. 지나치게 마한, 백제, 왜라는 정치적 체제와 연결지어 설명하기 어려운 측면도 있다"고 말했다.

전남 일대에서 발견된 다양한 전방후원분 [사진 임영진 전남대 교수 '한국의 장고분']

유성운 기자 pirat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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