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의도포럼] 법치주의와 톨레랑스

2022. 2. 3. 0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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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기홍 (동반성장위원회 위원장·전 노동부 장관)


‘법과 원칙’을 특히 강조하는 정치인들이 있다. ‘법치주의’에 입각하여 법과 원칙을 지키지 않는 자는 엄단하겠단다. 법치주의가 현대 국가의 기본 원리임은 자명하다. 문제는 법을 준수해야 할 주체를 누구로 보느냐에 있다. 법치주의는 원래 지배자의 자의적인 통치 행위를 제한하고자 하는 사상이다. 법에 따른 통치만이 정당한 통치라는 말이다. 죄형법정주의나 조세법정주의 등이 구체적 사례다. 형사소송법상의 제반 절차를 준수해야 할 의무도 일차적으로 지배자의 몫이다.

법치주의의 이름으로 피지배자의 법 준수를 강조하는 것은 번지수가 틀린 느낌이다. 피지배자는 법을 지키지 않아도 좋다는 말이 아니다. 법과 원칙을 앞세워 피지배자의 행동을 규율하는 것이 법치주의의 본령은 아니라는 말이다. 법과 원칙을 지켜야 할 일차적 주체는 지배자, 즉 국가다. 피지배자인 국민들도 당연히 법과 원칙을 지켜야 할 의무가 있지만, 이때는 법 적용에 일정한 수준의 유연성이 필요하다. 국민들을 대상으로 경직적이고 일률적인 법 적용을 천명하는 것은 법치주의와 무관하다. 국민들을 대상으로 한 법치주의에는 톨레랑스(관용)가 필요하다.

톨레랑스는 원래 종교적 차이의 인정·포용을 의미하는 말이었다. 종교가 다르다고 이교도를 적대시하지 말고 관용하자는 뜻이다. 인종이나 문화·사상 등 다양한 차이에 대한 관용으로 그 의미가 확대·발전됐다. 당연한 말이지만 관용하기 위해서는 무오류성의 함정에 빠져서는 안 된다. 내가 절대적으로 옳다고 믿으면서 타인을 관용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민주주의가 다수의 지배 체제이기는 하나 소수의 입장을 헤아려 관용하지 않는 다수의 독주는 성숙한 민주주의가 아니다.

법치주의도 마찬가지다. 국가는 스스로를 제약하는 법과 원칙에 철저히 복속해야 한다. 만약 그럴 수 없다면 법을 바꾸어야 한다. 아니면 자의적 판단으로 행위하게 될 것이고 법치주의는 무너질 것이기 때문이다. 법과 원칙을 국민들에게 적용할 때는 사정이 다르다. 어떤 법도 무오류성을 주장할 수 없기 때문에 톨레랑스가 필요하다. 유연한 적용이 가능해야 한다. 어디까지가 유연성의 한계인지는 상항에 따라 다르다. 어떤 특정 상황에서 발휘된 유연성이 합리적 한계 내에서 적정했는지는 당시의 사회적 통념에 의해 재단된다. 사회적 통념이란 사회적 합의요, 상식이다. 성숙한 사회란 이러한 합의에 쉽게 도달하는 사회다. 성숙하지 못한 사회에는 사회적 통념이 설 자리가 없다. 따라서 유연성의 발휘가 어려워진다. 국민들은 톨레랑스가 배제된 경직된 틀 속에서 질식하고 만다.

독일 대학의 학과별 정원에는 두 가지 형태가 있다. 엄격한 정원을 적용하는 학과도 있지만, 신축적으로 정원을 운용하는 학과도 있다. 후자의 경우 정해진 입학 정원보다 응시자가 더 많더라도 그 차이가 너무 크지 않으면 응시자 모두를 합격시킨다. 너무 큰지 아닌지는 누가 어떻게 결정할까. 해당 위원회가 사회적 통념에 어긋나지 않는 범위 내에서 결정한다. 이게 톨레랑스다.

우리나라에서 이렇게 하면 분명 난리가 날 것이다. 사회적 성숙도의 차이다. 독일도 의과대학에 들어가기는 대단히 어렵다. 정원도 엄격히 관리되고 성적도 최상위여야 한다. 그런데 여기도 예외가 있다. 아예 입학원서에 의과대학에 꼭 들어가야 할 특수한 사정을 기술하는 난이 있을 정도다. 별지를 얼마든지 첨부해도 좋다. 성적이 좀 미치지 못하더라도 위원회가 사정을 인정하면 합격이다. 이 역시 톨레랑스다. 나하고 다른 특수한 사정을 가진 사람에 대한 관용이다.

우리나라에서 요즘 성적 지상주의가 기승을 부린다. 과거에도 그랬지만 그때는 그래도 이런 세태가 바람직하다고 강변하지는 않았다. 다른 뾰족한 대안이 없으니 어쩔 수 없다는 체념이었다. 요즘 청년들에게는 성적 지상주의가 공정의 대명사가 되어버렸다. 성적으로 평가되는 능력에 따라 기회가 부여되는 것이 가장 공정하단다. 과연 그럴까. 그 능력이, 그 성적이 과연 공정하게 부여된 것일까. 성적으로 평가되지 못하는 재능은 능력이 아닐까. 나하고 다른 능력을 가진 사람, 나보다 못한 능력을 가진 사람에게는 기회가 부여되지 않아도 좋은 것일까. 톨레랑스 정신이 결여된, 따라서 정의롭지 못한 공정은 이미 공정이 아니다.

권기홍 (동반성장위원회 위원장·전 노동부 장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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