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과 소금] 법과 행정보다 사람이 먼저다

김재중 2022. 1. 29. 0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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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중 종교국 부국장


지난해 3월 유덕열 동대문구청장을 인터뷰한 적이 있다. 청량리 일대 재개발이 마무리되고, 올해부터 입주가 시작되면 동부 서울의 관문인 청량리역 주변은 과거와는 전혀 다른 상전벽해가 될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실제로 청량리에는 40~65층의 초고층 건물들이 하늘로 치솟고 있다. 빛이 있으면 어둠이 있는 법. 청량리역 일대가 초고층 건물들의 스카이라인으로 채워질 때 가장 낮은 곳에 있는 노숙인들은 점점 설 땅을 잃어가고 있다.

34년간 청량리에서 노숙인들에게 무료급식 밥퍼나눔운동 사역을 해온 다일공동체 대표 최일도 목사를 서울시가 최근 불법 증축 혐의로 고발해 논란이 됐다. 다일공동체는 밥퍼 본부 건물 양쪽에 식당 공간 등으로 쓰일 임시 건물을 짓고 있었으나 지금은 공사가 중단돼 앙상한 철골만 드러내고 있다. 다행히 밥퍼 측이 증축 건물을 서울시에 기부채납 후 사용하고, 시는 고발을 취하하기로 해 일단락되는 분위기다. 하지만 이번 사태는 코로나 상황에서 행정기관조차 방치하다시피 한 노숙인들의 배고픔이 얼마나 절실한 것인지 돌아보게 한다. 최 목사는 “코로나보다 무서운 것이 배고픔”이라고 말했다.

고발 사태 전말은 이렇다. 추운 겨울 밖에서 급식을 기다리는 노숙인들이 떨고 있는 모습을 안타깝게 여긴 유 구청장이 무료급식소 증축을 허가했다. 건축허가권은 구청장에게 있다. 그런데 밥퍼 측이 불법 점유한 시유지에서 증축 공사를 한다며 서울시가 문제 삼은 것이다.

밥퍼나눔운동은 최 목사가 1988년 11월 청량리 역전에서 사흘간 밥을 굶고 쓰러져 있는 노인을 위해 냄비 하나로 라면을 끓이면서 시작된 밥상공동체다. 청량리 다일공동체 건물 1층에 조그마한 오병이어 식당을 마련했으나 줄을 잇는 밥상공동체 식구들을 감당하기엔 협소했다. 동대문구청 등의 도움으로 2002년 8월 비바람과 추위를 피해서 인간답게 식사할 수 있는 공간을 갖춘 밥퍼 본부가 건립됐다. 다일공동체는 주일을 제외한 매일 오전 11시 1000여명에 달하는 무의탁 노인·노숙인에게 무료로 음식을 제공하고 있다. 26일 밥퍼 본부 옆 답십리 굴다리 지하차도를 찾아갔을 때 자원봉사자 2명이 500인분 도시락을 나눠주고 있었는데 1시간반 만에 거의 동이 났다. 도시락을 받아든 한 할머니는 배고픔을 해결할 수 있게 됐다며 밝은 표정으로 고마움을 표했다.

서울시는 그동안 밥퍼 측이 시유지에 지은 임시 건물에서 무료 급식하는 것에 대해 단 한 번도 문제 제기를 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에 최 목사는 정부나 서울시가 해야 할 일을 민간단체에서 하고 있는데 황당하다며 “건축허가는 구청의 책임인 만큼 서울시가 이제 와서 문제 삼는 건 상식적이지 않다”고 맞섰다. 그러자 다급해진 서울시가 실무자의 성급한 조치였다며 사과하고, 오세훈 서울시장이 지난 21일 최 목사를 만나 해결방안을 논의했다.

서울시가 법 조문만을 내세워 최 목사를 고발한 것은 성경 속 바리새인들을 떠올리게 한다. 누가복음 6장의 안식일 논쟁을 보자. 안식일에 예수님과 제자들이 밀밭 사이로 지나가다가 제자들이 배고픈 나머지 밀 이삭을 잘라 먹었다. 그러자 이를 본 바리새인이 안식일 규정을 어겼다고 문제 삼고 나섰다. 이에 예수님은 다윗이 율법을 어기고 성전에서 사제들만 먹을 수 있는 진설병을 먹었던 사실을 언급하며 제자들도 정죄받을 이유가 없다고 말씀하신다. 그러면서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있는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있는 게 아니라며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고 반문하신다. 율법의 정신은 사랑이다.

코로나 이후 전국의 많은 무료급식소가 문을 닫았다. 갈 곳이 없어진 노숙인들은 추위와 배고픔의 이중고에 시달리고 있다. 예수님이 지금 상황을 보신다면 어떻게 하실까. 법과 행정이 사람을 위해 있는 것이지, 사람이 법과 행정을 위해 존재하는 게 아니다.

김재중 종교국 부국장 jjkim@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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