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야구 40주년 올스타⑪] '불사조' 박철순

차승윤 2022. 1. 28. 07: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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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년 현대 유니콘스전에 등판한 OB 베어스 투수 박철순. 사진=IS 포토

프로야구 원년 최우수선수(MVP), 두산 베어스의 영구결번 선수 '불사조' 박철순(68)이 일간스포츠가 선정한 프로야구 40주년 올스타 선발 투수 부문에 선정됐다. 20대부터 50대까지 세대별 야구인 10명씩 총 40명이 참여한 투표에서 선동열(40표), 최동원(37표), 류현진(36표), 송진우(22표)에 이어 5번째로 많은 총 17표를 얻었다.

박철순의 야구 인생은 다른 40주년 올스타들과 조금 다르다. 그의 커리어는 굽이치는 파도에 가까웠다. 누구보다 화려했지만, 누구보다 고통스러웠다.

박철순은 1980년 메이저리그 밀워키 브루어스에 마이너리그 계약을 맺고 입단했다. 사진=IS 포토

프로 입성 전 그는 최초로 미국 무대를 밟은 한국인 선수였다. 공군 성무팀 전역 후 연세대 소속으로 1979년 7월 한미대학 야구선수권대회에서 호투한 덕에 현지 스카우트의 주목을 받았고, 메이저리그(MLB) 밀워키 브루어스와 마이너리그 계약을 맺었다.

미국 생활은 순탄하지 않았다. 첫해인 1980년 11경기(선발 6경기) 3승 2패 평균자책점을 기록했지만, 어깨 부상 탓에 단 35이닝 소화에 그쳤다. 이듬해 더블A로 승격했지만, 평균자책점이 5.77에 불과했다.

그에게 새로운 기회가 찾아왔다. 1982년 고국에서 프로야구가 출범했다. 대전을 임시 연고로 했지만 MBC 청룡(LG 트윈스의 전신)과 서울 연고지명권을 2대1 비율로 나눠 가졌던 OB 베어스(두산의 전신)가 그에게 다가간 끝에 계약금 2000만원, 연봉 2400만원에 계약했다.

그러나 다시 한번 고비가 찾아왔다. 밀워키는 계약 종료 전 OB와 합의한 그에게 7만 달러(당시 약 4900만원)의 벌금을 요구했다. 당시 박용민 OB 단장이 이적료 3만 달러를 지불하며 박철순 영입을 마무리했다.

1982년 정규시즌 MVP를 수상한 박철순의 모습. 사진=IS 포토

고생 끝에 데려온 에이스의 위력은 확실했다. 미국 무대를 경험한 박철순의 투구는 프로야구 원년을 지배했다. 박철순은 1982년 36경기(선발 19경기) 224와 3분의 2이닝 동안 24승(1위) 4패 7세이브 평균자책점 1.84(1위), 승률 0.857(1위)로 최고의 투구를 펼쳤다. 완투가 15번, 완봉이 2번에 22연승을 거두며 OB의 전반기 우승을 이끌었다.

박철순은 허리를 크게 젖히고 다리를 높이 올리는 투구 폼에서 시속 140㎞ 중후반의 강속구를 뿌렸다. 여기에 유독 큰 손으로 던지는 팜볼(무회전 체인지업)은 당시 타자들에게 마구에 가까웠다. 그해 박철순의 피안타율은 0.191에 불과했다. 독보적인 에이스를 보유한 OB는 그해 전기 리그에서 우승했고, 이어 한국시리즈까지 제패하며 프로야구 초대 챔피언에 올랐다.

OB베어스 시절 박철순. 원년 팬들에게 박철순의 인기는 절대적이었다. 사진=IS 포토

박철순의 통산 성적은 76승 53패 20세이브 평균자책점 2.95에 불과하다. '국보' 선동열, '200승' 송진우는 물론 98승을 기록 후 미국으로 떠난 류현진에도 미치지 못한다. 그런데도 야구인들이 그를 뽑은 이유는 박철순 그 자체가 프로야구의 원년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양상문 전 롯데 자이언츠 감독은 "박철순 선배는 프로야구 원년 당시의 임팩트가 정말 강했다. 원년 기록이 40주년 대표 올스타를 뽑을 때 재조명되길 바랐다"고 전했다. 김경기 스포티비 해설위원도 "박철순 선배가 지금 뛴다면 그 기록을 세우기 힘들 수 있지만, 그 당시에는 독보적인 퍼포먼스였다"고 떠올렸다. 이동욱 NC 다이노스 감독 역시 "박철순 선배는 정말 잘했던 선수다. 40주년의 의미가 있기에 그를 뽑았다"고 했다.

영광은 짧았고 고난은 길었다. 박철순의 몸은 이미 첫해부터 정상이 아니었다. 허리 반동으로 던지는 특유의 투구 폼 탓에 부담이 컸다. 80경기 시즌에서 36경기에 등판한 일정도 치명적이었다. 결국 시즌 정규시즌 최종전 번트 수비 중 발을 헛디뎌 허리를 다쳤고, KS 1, 2차전에도 등판하지 못했다. 코치진의 만류를 뿌리친 그는 진통제를 맞고 3차전 등판을 강행했다. 끝내 팀을 우승시켰지만, 이후 오랜 시간 허리 부상이 그를 괴롭혔다.

박철순은 1983년 전지훈련에서 다시 허리를 다쳤다. 1승도 거두지 못한 채 회복 훈련에 전념했지만, 불운이 다시 그를 찾아왔다. 재활 훈련 마무리 단계에서 팬들 앞에 서기 위해 시즌 마지막 경기에 등판했다가 허리에 타구를 맞고 쓰러졌다. 결국 미국으로 건너가 수술을 받았고, 재활 치료로 다시 1년을 보냈다. 불굴의 의지로 재기한 그는 원년에는 미치지 못했지만, 꾸준히 등판하며 투수로서 기량을 유지했다.

고난은 거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1988년에는 구단의 배려로 속옷 광고를 촬영하다 왼쪽 아킬레스건이 끊어졌다. 걷기조차 쉽지 않은 상태였다. 모두가 끝이라고 생각했지만, 그는 끝내지 않았다. 지독한 재활로 이듬해 복귀에 성공했다. 1990년 선발 16경기에 등판했고, 1991년부터 4년 연속 7승을 거두며 당당히 부활했다. 나이와 허리 부상으로 구위가 흔들리자 투구 폼도 바꿨다. 역동적이던 와인드업 대신 세트 포지션만으로 던지며 시속 140㎞대 직구를 유지해냈다.

1995년 한국시리즈 우승 후 후배들에게 축하받는 박철순. 사진=IS 포토

박철순은 1995년 정상의 자리에 다시 올랐다. 개인 성적은 9승 2패 평균자책점 4.47. 13년 전에 미치지 못했지만, 선발•중간•마무리를 가리지 않고 등판했다. OB가 13년 만의 우승을 차지하는 데 결정적인 열쇠가 됐다. 당시 나이 39세. 박철순은 그해 리그에 남아있던 몇 안 되는 원년 선수였다. 쟁쟁했던 프로 입단 동기들이 이미 물러났거나 백업으로 황혼을 보내던 시기였다.

가장 많은 시련을 겪었던 불사조, 박철순은 꺾이되 부러지지 않았다. 그리고 마지막까지 살아남아 영광을 되찾았다.

차승윤 기자

박철순은 1997년 은퇴식을 치렀다. 사진은 박철순이 은퇴식에서 후배들의 박수 속에 마운드에 입맞추는 모습. 사진=IS 포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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