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은 이성계의 나라였나 이방원의 나라였나 [김종성의 사극으로 역사읽기]

김종성 2022. 1. 24. 1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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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성의 사극으로 역사읽기] KBS 1TV <태종 이방원>

[김종성 기자]

조선 건국시조는 분명히 이성계이지만, 정말로 이성계의 나라였나 하는 의구심을 가질 만도 하다. 건국 6년 만인 1398년에 이방원이 쿠데타를 일으켜 이성계를 몰아냈다. 건국시조가 왕좌에서 끌어내려진 것이다.

아들에 의해 끌어내려졌건 남에 의해 끌어내려졌건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누구에 의해서든 건국시조가 정권을 빼앗겼다는 것은 부동의 사실이다. 다만,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이기 때문에 아들이 예의를 갖춰 아버지를 끌어내렸을 따름이다.

그 뒤 조선의 왕위는 이방원과 그 후손들에게 돌아갔다. 이방원의 후손이 곧 이성계의 후손이기는 하지만, 이성계와 이방원 사이에 정치적 연속성이 존재하는가를 따져볼 필요가 있다. 혈통상의 연속성이 곧바로 정치적 연속성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이방원이 아버지한테서 왕위를 물려받았다면, 정치적 연속성은 당연히 존재한다. 하지만 이방원은 아버지를 몰아내고 패주로 전락시켰다. 아버지를 광해군·연산군과 다를 바 없는 처지로 내몬 것이다.

1398년 제1차 왕자의 난 이후에 이성계는 상왕에 이어 태상왕이 됐다. 실각 후에도 형식상의 예우는 받았지만, 이는 이방원과의 부자관계 때문이기도 하고 이방원의 정치적 필요 때문이기도 했다.

군주의 혈통
 
  KBS 1TV <태종 이방원>
ⓒ KBS1
 
왕조국가에서는 군주의 혈통이 중시됐다. 천명을 받은 거룩한 존재로 인식돼야 건국시조로 추앙을 받을 수 있었고, 그 건국시조의 혈통으로 인정돼야 왕위를 이을 수 있었다.

이방원은 정권은 잡았지만 건국시조는 아니었다. 이방원은 이미 존재하는 나라를 가로챌 능력이 있음은 입증했어도, 없는 나라를 새로 세울 능력이 있음을 입증하지는 못했다.

그랬기 때문에, 1398년 집권(즉위는 1400년) 이후의 이방원한테는 자신과 혈통적으로 연결되는 건국시조가 필요했다. 이방원이 왕이 되려면 건국시조 이성계를 자신과 연결시키는 것이 필요했다. 이방원이 아버지를 상왕과 태상왕으로 추대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이 같은 현실적 필요 때문이기도 했다.

쿠데타를 당한 이성계는 광해군이나 연산군과 다를 바 없었다. 광해군과 연산군에게는 임금이 되기 전에 받은 군호(君號)가 있었다. 그런 대군 칭호가 있었기에 실각 뒤에 광해군·연산군으로 불릴 수 있었다. 이성계는 왕자를 거치지 않고 왕이 됐기 때문에 실각 뒤에 군호로 불릴 여지가 없었다. '패주 광해군'이나 '패주 연산군'처럼 불릴 수 없었던 것이다. 그냥 '패주 이성계'로 불릴 수밖에 없었다.

왕좌를 빼앗겼으니 그렇게 불릴 수밖에 없었지만, 이성계가 공식적으로 패주가 되면 누구보다 곤란해지는 것은 다름 아닌 이방원이었다. 패주의 몸에서 태어난 사람은 군주로 인정해주지 않는 것이 당시 사람들의 관념이었다. 그래서 그런 사람이 군주 자리를 지키게 되면 정치 불안이 조성될 수밖에 없었다.

건국시조를 제외한 군주들은 시조의 혈통을 계승한 이전 군주의 몸에서 태어나야 했다. 그래야 한다는 것이 당시 사람들의 관념이었다. 실제로는 임금 생활을 한 적이 없는 사람을 죽은 뒤에 임금으로 격상시키는 추존왕 제도가 필요했던 이유도 거기에 있었다.

세조(수양대군)의 아들인 의경세자는 만 19세에 세상을 떠났다. 세조를 계승한 사람은 의경세자의 동생인 예종이다. 예종 역시 19세에 사망하자, 의경세자의 아들이자 예종의 조카인 성종에게 왕위가 돌아갔다. 그 뒤 의경세자가 덕종으로 추존된 것은, 성종을 군주의 몸에서 태어난 사람으로 만들어야 했기 때문이다. 성종의 왕권을 안정시키고자 의경세자를 왕으로 격상시켰던 것이다.

왕의 아들이 아닌 사람이 왕이 되면 그 아버지를 추존왕으로라도 만들어주는 것이 왕조시대 사람들의 관념이었다. 이런 관념이 존재하는 시대에, 이방원의 아버지가 패주가 되고 죄인이 되면 누구보다 이방원이 곤란해질 수밖에 없었다. 이방원이 아버지를 상왕과 태상왕으로 격상시킬 수밖에 없었던 데는 그런 정치적 이유가 있었다.

그런 이유에 따라 이성계가 패주가 되지 않았을 뿐이지, 실질적 측면을 놓고 보면 이성계는 패주와 다를 바 없었다. 건국시조가 실질적 패주가 됐으니 이성계의 나라는 이방원의 집권을 계기로 사실상 단절됐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런 뒤 조선은 실질적인 새 출발을 했다. 그러니 1398년 이후의 조선을 이성계의 나라로 볼 것인가 이방원의 나라로 볼 것인가 하는 의문이 생길 수 있는 것이다.

태종 묘호를 받은 이방원
 
  KBS 1TV <태종 이방원>
ⓒ KBS1
 
조선왕조가 이방원에 의해 새 출발을 했다는 인식은 이방원 본인과 그 자손들에게서도 표출됐다. 이방원과 세종대왕 부자가 훗날 정종으로 불리게 될 제2대 주상인 이방과에게 묘호(사당 명칭)를 부여되지 않은 사실이 그 점을 드러낸다.

클 태(太)가 들어간 태종이란 묘호는 건국시조인 태조에 버금가는 칭호였다. 그래서 태종 묘호를 받은 군주는 건국시조에 버금가는 위상을 가졌다. 한국·중국·베트남 등에서 형성된 관행에 따르면, 이 묘호는 두 번째 임금에게 부여되는 것이 원칙이었다. 두 번째 군주에게 무조건 태종 묘호를 부여하는 것은 아니었다. 태종 묘호를 부여할 수 있는 대상이 두 번째 군주에 국한됐다는 의미다.

제29대 임금인 신라 김춘추가 태종 묘호를 받을 때도 당나라와의 마찰이 있었다. 조선은 신라보다 훨씬 더 중국에 사대를 했기 때문에, 이 묘호를 쓰면 중국과의 마찰이 생길 가능성이 농후했다. 그렇기 때문에 제3대 임금인 이방원이 이 묘호를 쓰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런데도 이방원은 태종 묘호를 받았다. 명나라와의 마찰을 피하고자 '교묘한' 혹은 '절묘한' 방식을 구사한 결과였다.

1398년에 즉위한 제2대 주상 이방과가 사망한 해는 이방원이 상왕일 때인 1419년이다. 이때의 형식상 임금은 세종이지만 실질적 임금은 상왕인 이방원이었다. 군사권 같은 핵심 권한은 여전히 상왕에게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방과에게 어떤 묘호를 부여할 것인가는 세종이 아닌 이방원의 판단에 달려 있었다. 그런데 이방원은 형인 이방과에게 아무런 묘호도 부여하지 않았다.

이방과가 묘호를 받게 되면, 이방과가 공식적인 제2대 군주가 되는 것이었다. 이렇게 되면 이방과가 태종 묘호를 받든 다른 묘호를 받든, 이방과 이후의 왕들은 태종 묘호를 쓸 수 없게 되는 것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이방원은 이방과에게 아무런 묘호도 부여하지 않음으로써 이방과 이후의 군주가 제2대 태종이 될 가능성을 남겨놓게 됐다.

태종 묘호는 그로부터 3년 뒤에 사망한 이방원에게 돌아갔다. 이로써 이방원은 '제2대 태종'이 됐다. 건국시조에 버금가는 위상을 누리게 된 것이다. 그가 건국시조 이성계를 몰아내고 실질적으로 새로운 나라를 만든 사실이 '제2대 태종'이란 위상에 어느 정도 반영됐다고 할 수 있다.

이방원이 이방과에게 묘호를 주지 않은 사실과 세종이 이방원에게 태종 묘호를 준 사실은 이방원이 건국시조에 버금가는 군주라는 인식이 이방원 가족들 사이에 존재했음을 시사한다. 1398년 쿠데타로 이성계의 나라가 실질적으로 단절됐음을 이들도 인식했음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방과가 정종 묘호를 받은 것은 조선 후기 숙종 때인 1681년이다. 이로 인해 이방과는 공식적으로 제2대 군주의 지위를 갖게 됐다. 엄연한 군주에게 묘호를 주지 않은 잘못된 일이라는 판단 하에 묘호를 부여하게 됐다.

이는 이방원을 '제2대 태종'이 아니라 '제3대 태종'으로 만드는 결과를 초래했다. 제3대로 밀려남에 따라 이방원이 태종 묘호를 유지하는 것이 결과적으로 어색해지고 말았다. '제2대 태종' 위상을 통해 이방원에게 건국시조 버금가는 지위를 부여했던 사람들의 의도가 훗날 뒤틀리게 됐던 것이다.

1681년 조치가 있기 전까지 이방원은 '제2대 태종'이었다. 건국시조에 버금가는 위상을 누렸던 것이다. 건국시조를 몰아냈지만 완전히 몰아낼 수 없었던 이방원이 제2대 태종으로서 건국시조 버금가는 지위를 누렸던 상황이 1681년까지 유지됐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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