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수근 "도와달라"에 로비스트 박동선 집 한 채 값 선뜻

손영옥 2022. 1. 23. 20:47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국민화가 박수근 아들 박성남 화백 전화 인터뷰
1965년 작고한 박수근은 생전 마거릿 밀러 등 외국인들의 사랑을 받았다. 한국인 중에선 코리아게이트의 로비스트 박동선씨가 간경화로 고생하는 박수근의 부탁을 받고 집 한 채 값인 25만환을 선뜻 내주며 후원한 사실이 확인됐다. 박수근은 고마움의 표시로 리어카에 그림 40점을 가득 싣고 가 선물했다. 사진은 대표작인 '나무와 두 여인'(1962, 캔버스에 유채, 130×89㎝, 리움미술관)인데, 밀러가 오래 소장한 작품이다. 리움미술관 제공


박수근(1914∼1965)은 국민화가다. 박완서의 등단작 ‘나목’에서 묘사한 것처럼 초등학교 학력이 전부인 그는 6·25전쟁 때인 52∼53년 미군부대 PX에서 초상화를 그려주며 생계를 유지했다.

무명시절의 추운 겨울을 견디도록 도와주는 것은 눈 밝은 컬렉터다. 박수근에게도 그런 후원자가 있었다. 처음 그를 알아본 이는 외국인들이었다. 서울 을지로 반도호텔(현 롯데호텔 자리)에 생긴 최초의 상업화랑인 반도화랑을 드나들던 외교관, 무역상사 주재원, 군인 등이었다. 코리아파운데이션에서 영화관련 일을 하던 실무자의 부인이었던 마거릿 밀러가 대표적이다. 이는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에서 전시 중인 ‘박수근: 봄을 기다라는 나목’전에서도 조명되고 있다.


박수근의 아들 박성남(75) 화백은 최근 국민일보와 전화 인터뷰에서 “당시에는 아버지를 알아주는 이가 5명도 안 됐다”면서 “밀러 여사가 어머니 다음으로 아버지를 섬기고 도왔다. 한국인으로선 박동선(87) 파킹턴 인터내셔널 회장이 어머니 다음으로 아버지를 도와주셨다”고 털어놨다.

박동선은 1970년대 한국과 미국을 떠들썩하게 했던 코리아게이트 사건의 주역인 재미교포 로비스트다. 미국 워싱턴포스트가 76년 10월 25일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를 받은 재미교포 실업가 박동선씨가 미 의회 의원들에게 거액을 뿌렸다고 보도하면서 세간에 알려졌다.


미국 조지타운대학을 졸업하고 26세 때 워싱턴에서 사업을 시작한 그는 한국과 미국을 오가며 유력인사들과 교류했다. 한국에선 정계 유력자들을 서울 오류동 별장으로 불러 파티를 열곤 했는데, 거실에는 60년대부터 모은 청자 등 도자기와 박수근 천경자 이인성 등의 그림이 걸려 있었다고 한다. 사무실에는 이당 김은호가 그린 자신의 모친 초상화도 걸려 있었다. 박동선은 미술애호가이자 컬렉터로 유명했지만, 박수근의 특별한 후원자였음은 알려지지 않았다.

-어떻게 도와줬나.

“63년쯤인 것 같다. 아버지가 잘 아는 사이도 아닌데 박 회장님께 ‘아프다. 신장도 안 좋고 간경화가 있다. 치료를 받아야 하는데 돈이 없다. 좀 도와달라고’고 말씀하셨다. 그랬더니 25만환을 선뜻 내주셨다. 아버지가 고마우시니까 리어카에 그림 40점을 싣고 남산의 무슨 호텔 옆 사무실로 가져다 주셨다.”

창신동 집 마루에 앉아 있는 박수근과 아내 김복순, 막내딸. 1959년 사진.


박수근은 1957년 국전에 ‘세 여인’을 출품했지만 떨어지자 낙심했다. 심사과정에 의혹을 품고 과음하기 시작했는데 신장과 간이 망가졌다. 합병증으로 생긴 백내장 수술을 세 번 했지만 한쪽 눈은 의안을 해야 했다.

-당시 얼마나 큰 금액이었나.

“아버지가 미군 PX에서 초상화를 그려주고 번 돈을 어머니가 차곡차곡 잘 모아서 창신동에 집을 샀다. 그게 35만환이었다.”

창신동 시절은 박수근의 가족에게 가장 행복한 시절이었다. 비 오면 비 들이치는 창신동 한옥 조그만 마루가 박수근의 화실이었다.

“하지만 대지 소유권이 없는 집을 잘못 샀고 소유권 분쟁에서 져 집을 비워줘야 했다. 아버지가 전농동에 작은 땅을 샀고 거기다 집을 지었다. 건물 대금만 받아서 어떻게 집을 지었나 의아했는데 박 회장 얘기를 듣고 보니 돈의 일부가 집 짓는 데 사용됐겠구나, 이해가 됐다.”

박수근은 전농동으로 이사 간 후 2년 만에 건강이 악화돼 별세했다.

-리어카에 실은 그림은 어떤 게 있었나.

“모른다. 저는 못 봤으니까. 어머니한테도 듣지 못했다. 2년 전쯤인가, 박 회장한테 들었다. 50년대 중반에서 60년대까지 작품 중에 아버지가 직접 챙긴 그림이니 나쁘지 않은 작품이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드로잉인가.

“아니다. 유화다. 당시 40점은 지인들한테 나눠줬고 이후 큰 그림 4점을 따로 사주셨다고 했다. 그런데 그분이 미국에서 3년 옥살이를 하고 귀국해보니 4점도 남의 손에 넘어가 있었다. 아주 좋은 작품들인데, 찾으려고 하니 공소시효 10년이 지나서 찾을 수 없다고 하시더라.”

코리아게이트는 면책특권을 조건으로, 공화당 대선 후보인 닉슨에게 2만 5000달러 등 정계 인사들에게 자금을 건넨 사실을 미 의회에서 증언한 것으로 일단락됐다. 박동선은 한 차례 더 옥살이를 한다. 이라크 사담 후세인 정권 시절 이라크에서 받은 로비 자금을 유엔 관리에게 뿌린 혐의로 미연방수사국에 2006년 체포돼 복역했다. 그는 자신은 로비스트가 아니며 인맥을 통해 민간외교를 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 그림들이 이건희 컬렉션으로 넘어갔을까.

“우리나라 경제구조도 그렇고 힘 있는 쪽으로 들어가게 돼 있지 않나. 하지만 숫자가 많으니까 꼭 거기로만 흘러 들어갔다고 추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박수근 화백이 박동선과 친분이 있었나.

“그렇지 않았다. 이분은 문화에 관심이 많은 분이셨다. 70년만 해도 회화와 조각 분야 합쳐도 미술인이 500명도 안 됐다. 그전에는 얼마나 적었겠나. 조금만 관심 있으면 작가와 컬렉터의 만남이 어렵지 않았다. 여럿이 모이는 자리에서 아버지가 부탁하신 거다. 그분이 (당시 20대로) 젊었는데도 재력도 있고 이타심이 있는 분으로 생각한 거 아니겠나.”

박성남씨는 “이것은 어떤 정치·사회·문화적 이슈보다 박애주의적 측면에서 훈훈한 얘기”라며 “지금은 ‘박수근 만나면 영광’이라고 하지만 당시에는 화가 취급도 안 했다. 일본 가서 공부한 학부 출신들이 국전도 장악하고 있었다. 박 회장이 도움을 준 건 참 애틋한 이야기다. 보통 얘기가 아니다”라고 했다. 박동선은 박수근 별세 후에도 유족을 챙겼다.

“아버지 작고하고 나서 박 회장이 한번 연락이 왔다. 어머니를 초대해주셔서 이사장으로 있던 숭의여전 사무실로 모시고 가서 만났다. 얘기 끝나고 나오는데 그분이 고개를 숙이고 어머니 신발을 나가는 방향으로 가지런히 놓으시더라. 그래서 굉장히 인상이 좋게 남았다. 그는 아버지 예술에 붓도 대고 팔레트도 댄, 정신적으로 그런 존재다. 한국에서는 로비스트라 부정적인 이미지가 있지만, 밀러 부인처럼 박 회장이 굉장히 큰 힘이 돼준 것은 사실이다.”

-다른 한국인 후원자는 누가 있었나.

“김수근 건축가도 아버지 작품을 좋아하셨고 ‘뿌리 깊은 나무’ 발행인 한창기 선생도 좋아하셨다. 이렇게 아버지에 큰 애정을 가진 분은 손꼽을 정도로 몇 안 됐다. 이후 10주기마다 현대화랑에서 전시를 해주고 신문에 대대적으로 보도하니까 이제는 너도나도 아버지를 알게 됐다.”

-이들을 제외하면 후원자는 외국인이었던 셈이다.

밀러는 '디자이너스 웨스트'(아래 왼쪽)에 박수근에 관한 글도 썼다.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아버지는 60년대 들어서는 한쪽 눈으로 그렸다. 그럼에도 자신의 그림에 대해 당당하고 떳떳했다. 50∼60년대 외국인에게 그림이 팔려가는 것은 상상도 못 할 일이었기 때문이다. 어떻게 보면 무역을 한 거나 마찬가지였다. 창신동 마루에 있던 그림들이 밀러, 실리아 짐머맨(미국 무역상사 주재원 부인), 마리아 핸더슨(미 대사관 문정관 부인)과 이들의 지인·친척을 통해 샌프란시스코로 건너갔다가 돌아왔다. 샌프란시스코는 제2의 창신동이나 마찬가지다.”

'노변의 행상'(1956∼57년, 캔버스에 유채, 31.5×41㎝, 개인 소장)으로 실리아 짐머맨이 소장했다.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이번 전시에선 밀러 여사가 태평양을 사이에 두고 박수근에 보낸 편지, 잡지 ‘디자이너스 웨스트’에 쓴 글, 짐머맨이 박수근 등 한국미술가를 해외에 소개하기 위해 펴낸 소책자 ‘한국현대화가’(Korean Artists) 등 아카이브 자료도 함께 나와 작가와 후원자의 관계를 조명한다.

손영옥 문화전문기자 yosohn@kmib.co.kr

GoodNews paper ⓒ 국민일보(www.kmib.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Copyright © 국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