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연꼿처럼 사다가 생을 맟처슴 좋겟다"

윤지형 2022. 1. 23. 14: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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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정석조·장희창의 '아흔에 색연필을 든 항칠 할매 이야기'

[윤지형 기자]

사람들은 왜 그림을 그릴까? 이 물음의 끝은 이럴 것이다. 예술이란 무엇인가? 예술의 기원은? 목적은? 답하기가 쉽지 않은 물음이다.

부산에 사는 한 할매. 그는 나이 아흔이 되어 처음으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는데, 일여 년 후엔 그 그림들이 한 권의 그림책으로 엮어져 나왔다. 이건 또 무엇일까?

내겐 하나의 사건처럼 느껴진다. 푸코(Michel Foucault)는 사건이란 돌풍과 같은 자연적 사건처럼 예측 불허, 돌연한 전환, 전복, 첫 발견, 자유, 해방, 전혀 다른 언어로 말하기 등과 관련된 무엇이라 했다.

방금 나는 '할매'라고 했지만, 이건 책 제목에 '항칠 할매'라고 나와 있어서 그랬을 뿐이라는 건 우선 말해 두자. 그림을 그린 이는 그냥 나이 많은 노파나 가족 관계 속의 할머니가 아니라 아흔 살의 오롯한, 미지의 한 '여인'이라 해야 마땅할 것 같기에 말이다.
 
 책 표지 (그림 항칠 할매 정석조, 글 아들 장희창)
ⓒ 호밀밭
 
그림책을 펼쳐보면 금방 눈치채겠지만 거기 무수히 피어 있는 꽃에는 어린 소녀도 있고, 처녀의 봄바람 마음도 숨어있으며, 완숙한 여인도 존재하고 있다. 그림 어디에도 노파나 할머니는 없어 보인다. 그렇기에 나로선 사건이랄밖에.

이 나이 아흔의 여인은 유독 꽃을 많이 그렸다. 당신 방안 화분에 담긴, 나로선 이름을 알 수 없는 꽃부터 민화 책 속의 꽃, 연밭의 연꽃, 색색의 국화, 분홍의 게발선인장 꽃, 배롱나무의 백일홍, 황령산과 아파트촌의 벚꽃 등. 그리고 복사꽃이 키운 복숭아 여섯 개는 나무 몸통을 아주 휘게 할 정도로 지구본처럼 큼직큼직하다.
  
꽃이 있으니 나비가 있고 나비 있으니 무당벌레가 있다. 저수지엔 청둥오리가, 마당인지 산인지 벽지인지 어쨌든 장닭도 꿩도 있다. 어항이나 연못 속엔 물고기들이 벌거벗은 어린아이들처럼 유영한다.

소나무는 또 어떤가. 양산 통도사 서운암의 덩치 큰 소나무도 그러려니와 부산 청사포 바닷가의 200년 넘은 푸른 소나무는 그야말로 '춤추는 소나무'다. 그 춤사위 사이로는 바다가, 또한 등대가 보인다. (118쪽)
 
 부산 청사포 바닷가의 200년 넘은 소나무
ⓒ 호밀밭
  
200년 소나무 곁에는 호랑이가 한 마리쯤은 있어야 할 것 같다고 생각할쯤 호랑이도 등장한다. 덩치는 장군처럼 크고 의젓해도 수염 난 얼굴에 놀란듯한 눈은 아무리 봐도 무섭지가 않은 호랑이다. 이 얘기는 조금 더 해 봐도 좋을 것 같다. 

이 그림책의 그림들은 책으로 엮어져 나오기 전에 이미 페이스북을 통해 세상에 알려졌다고 한다. '항칠 할매'의 맏아들이자 독일 고전문학 연구와 번역에 전념해온 전 동의대 교수인 장희창씨가 그의 페이스북 친구들에게 어머니가 그림을 완성할 때마다 소식을 전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그림책에는 맏아들의 짧은 그림 안내 말, 감상의 글과 함께 페친들이 작성한 댓글들도 담겨 있다. 그 예를 하나 들어보자. 

"항칠 할매가 요새는 쉬엄쉬엄, 호랑이를 여러 번 그려보는데 잘 안 되는 모양이다. 호랑이가 하나도 안 무섭게 생겼다. 여러분들 뭐하시오? 하고 물어보는 것 같네."
   
이는 맏아들이 어머니의 호랑이 그림에 대고 던진 한마디인데, 이에 동조하여 그의 페친들이 올린 댓글은 가히 촌철살인(!)이다.

"되게 무섭습니다. 물려서 죽는 줄 알았습니다."
"물고기가 음표 같아요."
"물고기 잡는 법을 몰라 어리둥절한 호 선생."
"우리 민화 '까치 호랑이'를 닮기도 했고, 19세기 세관원 출신 프랑스 화가 앙리 루소 그림이 떠오르기도 합니다. 뒤늦게 그린 점이 루소랑 비슷하고요."
 
 호랑이
ⓒ 호밀밭
 
'사람들은 왜 그림을 그릴까' 이 물음으로 글을 시작했는데, 불민한 내가 어찌 몇 마디로 대답할 수 있으랴. 다만 '항칠 할매'가 책 중간에 한 다음과 같은 말이 내겐 그 대답의 하나로 다가온다.

"내 나이 90에 내 손으로 그려놓은 그림을 보고 있스며(있으면) 조금은 마음이 평화롭다."(39쪽)

맏아들의 전언에 따르면 바느질만 70년 해온 어머니인 '항칠 할매'는 또 이렇게도 말한다.

"살면서 나를 위해 뭔가를 해 본 적이 없었는데이제야 나를 위해 뭔가를 하고 있으니 행복하다."(123쪽)

그러기에 다음과 같은 숨은 서원의 말도 자연 밖으로 나오게 되는 것이리.

"연꽃은 뻘밧태에서도(뻘밭에서도)
아름다운 몹씁을(모습을) 드려낸다(드러낸다)
나도 연꼿처럼 사다가 (연꽃처럼 살다가)
생을 맟처슴 좋겟다(마쳤음 좋겠다)."(52쪽)

이 또한 그림 그리기가 선사한 선물의 하나가 아닐는지?

이 '할매-여인'이 연꽃을 즐겨 그리는 것은 젊은 시절부터 품어온 불심이 깊은 것과 관계가 있다든지, 그녀가 그림을 시작할 수 있도록 이끈 사람이 바로 그녀의 따님으로 미술 교사라든지 하는 등의 적잖은 흥미로운 숨은 얘기들은 접어두기로 한다.

어쨌거나 백문이 불여일견. 혹여 그림을 그린다는 건 무엇이며 예술이란 무엇인가를 한번쯤은 물어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항칠할매'의 그림책을 펼치는 순간 기쁜 놀람을 경험하게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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