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캐롤' 감독도 영감받았다..골목길 관람객 줄선다는 이곳
복합문화공간 피크닉 회고전
영화 '캐롤'에 영감 준 작품
1950년대 컬러 뉴욕 풍경
추상화적 화면, 시적 감성
서울 남산 하얏트호텔 인근 복합문화공간 피크닉(piknic)은 대중교통으로 가기 편한 곳은 아니다. 언덕에 있고, 또 골목 깊숙이 자리하고 있다. 그런데도 요즘 그곳에 관람객 발길이 꾸준히 이어지고 있다. '거리 사진의 대가' '컬러 사진의 선구자'로 불리는 사진작가 사울 레이터(Saul Leiter·1923~2013)의 회고전을 보기 위해서다. 작가는 이미 세상을 떠났고, 이 전시가 그를 국내에서 처음으로 소개하는 자리인 점을 생각하면 흥미로운 현상이다.
전시 '사울 레이터: 창문을 통해 어렴풋이'는 80세가 될 때까지 평생을 거의 무명(無名)으로 활동해온 레이터의 작품 300여 점을 보여준다. 생계를 위해 패션잡지 '보그' '하퍼스 바자' '엘르' 등의 화보를 찍었지만, 전시에서 만나는 대부분의 작품은 놀라울 정도로 일상의 기록이 대부분이다. 마치 요즘 사람들이 스마트폰으로 일상을 찍듯이 그는 60년간 자신이 살았던 뉴욕 거리, 사람들과 이웃, 친구들의 모습을 화면에 담았다.
80대에 주목받기 시작
미국 펜실베이니아 피츠버그 출신인 레이터는 12세가 되던 해 어머니로부터 카메라를 선물받아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유대교 집안에서 랍비(rabbi·유대교 사제) 교육을 받았으나 20대에 가족의 기대를 저버리고 고향을 떠나 뉴욕에 정착했다. 이후 레이터는 뉴욕에서 평생 사진을 찍고 그림을 그렸지만 세상의 주목은 받지 못했다. 80세를 넘긴 2000년대 중반에 들어서야 1940년대 말부터 찍은 컬러 사진이 대중에게 알려지기 시작했다.
국내에서 열리는 레이터를 소개하는 첫 전시이자 대규모 회고전인 이번 전시에선 1940~50년대 그의 초기 컬러 사진과 흑백 사진, 1950~60년대 패션 화보, 미공개 컬러 슬라이드와 더불어 사진과 회화를 결합한 페인티드 누드 작품을 1~3층 전시장에서 소개한다.
아름다움은 가까운 곳에 있다
영국 일간지 가디언은 "(레이터의) 사진에서 사람들은 흐린 실루엣 정도로 보이곤 한다"면서 "눈길을 사로잡는 것은 그것이 드러나는 흥미로운 형태와 색이다. 레이터는 추상화가의 시선으로 삶을 바라봤다"고 평했다.
창 밖으로 보이는 찰나의 풍경도 눈에 많이 띈다. 레이터는 "난 그저 누군가의 창문을 찍는다. 그게 뭐 대단한 업적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했지만, 사진 하나하나는 그가 살면서 '지금 이 순간', '여기 있는 사람들'에게 바친 헌사로 읽힌다. 그의 인생을 담은 다큐멘터리 영화 '사울 레이터:인 노 그레이트 허리( In No Great Hurry’에서 그는 "세상 모든 것은 사진으로 찍힐 만하다"고 그가 말했다. '지금 우리가 있는 이곳에 아름다움이 널려 있다'는 메시지다.
그에게 두 살 터울의 여동생 데보라와 연인 밴트리 솜즈는 가장 아끼는 모델이었고, 차창 너머로 본 거리 흐릿한 풍경이 완벽한 구도와 색을 갖춘 그림이 됐다. 레이터는 눈 내리는 풍경과 눈오는 날 우산 쓴 사람들의 모습도 집요하게 찍었다. 대표작 '붉은 우산'(1958)도 그중 하나다. 케이트 블란쳇 주연의 영화 '캐롤'을 찍은 토드 헤인즈 감독은 이 영화를 찍을 때 레이터 사진에서 많은 영감을 받았다고 말했다.
명성에 연연해하지 않았다
그의 이름이 알려지기까지엔 60년이란 시간이 걸렸다. 2005년 맨해튼에서 개인전이 열리고 2006년 독일 슈타이들 출판사에서 사진집을 발표했다. 40여년간 그의 곁을 지키며 응원했던 여자친구 솜즈가 2002년 세상을 떠난 후였다.
레이터는 대부분의 작품 사진을 인화하지 않은 채 친구들과 모인 자리에서 환등기로 거실 벽에 비춰보는 것으로 만족했다. 국내 전시를 기획한 피크닉 관계자는 "레이터는 대중에게 자신을 알려야 한다는 열망 없이 사진 찍기 자체를 즐긴 사람이었다"며 "그가 사망했을 때 인화되지 않은 채 남은 슬라이드 필름이 매우 많았다"고 전했다.
그는 생전 인터뷰에서 "난 유명해지고 싶은 열망에 사로잡혀본 적이 없다"면서 "나는 세상을 이기려는 야심에 사로잡힌 사람들을 불신할 뿐만 아니라 경멸한다"고 했다. 이어 "그들은 자신을 통제하지 못하고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엄청난 양의 쓰레기들을 만들어 낼 뿐이다. 그건 정말 별로다"라고 했다.
레이터는 사진 찍기를 좋아해서 사진을 찍었다. 그에겐 명성보다 아름다움을 음미하는 자신의 평범한 일상이 우선이었다. 그가 2013년 89세로 세상을 떠났을 때 뉴욕타임스는 "레이터는 대중에게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면서도 "일찍이 뉴욕을 컬러로 촬영한 작가이며, 우리 시대 최고의 사진 작가 중 한 명이었다"고 소개했다. 전시는 3월 27일까지.
이은주 문화선임기자 jule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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