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르보이스] 혼자 호텔에서 보낸 시간이 내게 알려준 것

이마루 2022. 1. 2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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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캉스가 전부는 아니다. #임현주 아나운서가 혼자 호텔로 향한 이유

호텔에서 내가 쓴 것

12월의 어느 토요일, 호텔에 체크인했다. 혼자 호텔에 간다는 건 혼밥만큼 쉬운 일이지만 이번엔 달랐다. 여행을 위해 머무는 것도 아니고, 출장도 아니고, 파티를 열기 위함도 아닌, 순전히 혼자 시간을 보내기 위해서다. 그래야 생각들을 정리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여러 일에 둘러싸여 바삐 지낸 1년이지만 내내 마음속에 끈적하게 붙어 있는 아쉬움 같은 게 있었다. 무언가 놓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언제 이렇게 시간이 흘렀을까, 잘 살아온 걸까, 앞으로 나는 어떤 삶을 살고 싶은 걸까? 뒤죽박죽 뒤섞인 느낌. 정리가 필요했다.

체크인 줄에 서서 30분 넘게 기다릴 때는 후회가 스멀스멀 올라왔다. 생각 정리라면 카페 한 귀퉁이에 앉아 해도 될 것 아닌가. 작지만 작업실도 있는데…. 하지만 영 내키지 않았다. 생활의 흔적이 묻어나지 않는 공간에서 일이나 어떤 관계에 대해 고민하지 않고 오로지 내 안의 의문에 집중하고 싶었다. 체크인을 기다리느라 진이 빠져서인지, 얼마 전 맞은 백신 때문인지, 푹신한 침대 시트의 유혹을 이기지 못해서인지, 방에 들어오자마자 옷도 갈아입지 않고 그대로 침대에 널브러져 30분을 잤다. 일어나 샤워하고 짐을 꺼냈다. 평소엔 1박 여행이어도 캐리어를 들고 다니지만 내내 방에만 머물 작정이라 에코백 두 개가 짐의 전부였다. 가방 하나엔 잠옷과 간식으로 먹을 귤, 다른 하나엔 노트와 책 한 권이 들어 있었다.

아이패드로 웬만한 작업을 하는 나지만 오늘은 필기를 하고 싶었다. 마음속 생각을 모두 끄집어내 적을 참이었다. 갖고 온 책의 제목은 〈미드나잇 라이브러리〉. 침대에 앉아 책을 열었다. 꿈에 대해, 가지 않은 길에 대해, 한정된 시간에 대해, 선택하지 않은 것에 대한 아쉬움에 대해, 앞으로 삶에 대해…. 이런 주제의 대화가 절실했기에 매우 집중하며 소설 속 ‘루나’가 될 수 있었다. 퍼즐 한 조각이 꼭 채워지는 기분이었다. 삶의 진짜 문제는 후회 그 자체라는 것(그러니까 후회는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 세상의 좋은 것은 모두 거칠고 자유롭다는 문장을 필사하며 해방감을 느꼈다. 책은 내게 필요한 순간에 언제나 크고 작은 구원이 돼주었다. 뒤늦게 〈스트릿 우먼 파이터〉를 정주행하며 몇 번을 ‘광광’ 울었고, 떡볶이를 시켜 먹었다. 바깥은 깜깜했고, 밤 10시가 다 돼가고 있었다. 이대로 잠들어도 좋겠다 싶었지만 아직 내게 중요한 일이 남았다.

드디어 노트를 펼쳤고, 거침없이 쓰기 시작했다. 써 내려가는 그 행위에서 자유를 느꼈다. 묵은 감정을 비워내고 난 후엔 내년을 그려볼 차례. 먼저 ‘앞으로 무엇을 하고 싶은가’에 대해 적어 내려갔다. 적어놓고 보니 몸을 쓰는 비중이 확연히 늘어난 게 보였다. 한동안 나는 몸 쓰는 일에 소홀했다. 방송, 글, 인터뷰, 만남, 휴식 시간을 보내고 나면 운동은 늘 후순위였다. 가끔 달리기, 1주일에 한 번 필라테스를 하긴 했지만 이젠 보다 건강하고 탄탄한 몸을 만들고 싶었다. 이전까지 ‘정신’이 우선이었다면 이젠 ‘몸’이었다. 몸이 건강해지면 뭐든 잘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우선순위를 마음속에 명확히 하는 것이 중요한 이유는 하루의 루틴과 시간 분배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근력과 스트레칭을 주 3~4회로 늘리는 목표를 세웠고, 지금은 새롭게 발레 강습을 끊었다. 새해 하반기엔 프리 다이빙에도 도전하리라 적었다. 무엇을 할 것인가만큼 중요한 질문은 ‘무엇을 하지 않을 것인가’였다. 다짐 중 하나는 SNS 줄이기였다. SNS가 많은 확장과 소통 기회를 주었지만, 저녁 시간이 되면 꼬리에 꼬리를 물고 허투루 쓰는 시간이 너무 많았다. 더 비밀스러운 시간을 만들어야지 다짐하며 수면 부족과 마음 숨기기, 원하지 않는 네트워킹을 하지 않을 것 등을 적었다.

앞으로 나는 굳이 멀리 떠나는 대신 종종 호텔에서 고립을 택할 것이라는 예감이 들었다. 가져온 책 속에는 내가 왜 굳이 이곳에 와야 했는지 깨닫게 하는 문장이 있었으니까. “도시에선 혼자 있더라도 진정한 고독을 느끼기엔 너무 분주하고, 계속해서 다른 사람과 연결되기를 갈망하게 된다”는 문장이었다. 해외 대신 국내 곳곳을 부지런히 돌아다녔음에도 이상하게 채워지지 못한 갈증을 느꼈던 지난 2년이 떠올랐다. 진정한 고독을 만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곳은 여전히 도시지만 혼자 보내는 호텔에서의 하룻밤은 나와의 연결을 가능케 하는 차선책이 될 수 있다는 걸 느꼈다. 약간의 고독함, 누군가를 그리워하는 마음, 늦은 밤 혼자 써 내려간 일기들. 마치 부다페스트의 호텔 방에서 보내는 시간과 다르지 않았다. 다음날 호텔 밖을 벗어나는 순간 다시 현실의 생각이 뒤섞이겠지만, 혼란한 도시에서 벗어나 나와의 만남을 위해 종종 호텔 속으로 숨을 고르러 떠날 것이다.

임현주 듣고, 쓰고, 읽고, 말하는 MBC 아나운서. 좋아하는 것을 하며 신중하고 치열하게 살아가는 부지런한 나날을 담은 책 〈아낌없이 살아보는 중입니다〉〈우리는 매일을 헤매고 해내고〉를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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